소대장과 사이가 안 좋았던 부대원들이 소대장을 골탕먹일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부대 지휘관들이 배석한 가운데 벌어진 도강훈련의 때였습니다. 소대장이 권총을 빼어 들고 목소리도 우렁차게 ‘돌격 앞으로!’를 외쳤습니다. 때는 ‘지금이다’고 생각했던 부대원들이 일시에 ‘뒤로 돌아 앞으로 가’했습니다.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이었습니다. 그날 그 소대장과 소대원들 모두 남한산성에서 특별근무를 명 받았다던 그 옛날 한심한 일화가 있습니다.
동해에서 미국과 함께 벌였던 해상합동훈련에 이어 서해에서 벌이고 있는 을지포커스 가디언 훈련을 두고 북한이 연일 신경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적군과 대치하고 있는 군은 언제나 정병강군으로 육성되어 유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정병강군의 기본은 군인의 기강이 확립되어야 하는 것이고, 군대 기강의 기본 요소는 바로 지휘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군사된 자들입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명령의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이 맡기신 일, 곧 소명을 감당하며 살아 갈 방법을 본문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1:15에서 먼저 ‘회개하라’ 말씀하십니다. 이는 성경중심의 가치관과 세계관으로 돌아가 올바른 크리스쳔의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역시 1:15에서 ‘믿으라’ 말씀하시는데 이는 교회의 본질적인 모습을 믿으라, 곧 예수님을 인격적이고 관계적으로 믿으라는 것을 말합니다.
세번 째로 예수님은 1:17에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머리 속으로, 관념적으로만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대로 행동으로 순종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에서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25번이나 말씀하셨는데 오늘 본문이나 막8:34, 그리고 요21:18-19에서 ‘나를 따르라’고 하신 말씀의 때와 장소를 볼 때 참으로 믿는 자로서 우리 성도들이 깊이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할 말씀인 것을 알게 됩니다.
마가복음을 예수님의 제자훈련이라는 관점에서 살펴 볼 때 예수님이 제자로 삼으려는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말하신 명령의 말씀은 바로 ‘나를 따르라’라는 말씀이셨고, 마가복음의 본래의 본문이 16장 8절에서 끝이나는 것이라고 할 때 마지막 명령은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들 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고 천사의 입을 빌려서 하신 것으로 이 말씀도 역시 그곳으로’ 나를 따라 오라’는 말씀입니다.
‘따른다’는 것은 제자됨의 기본요소인 동시에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때가 찼다,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라, 복음을 믿으라’는 하나님 나라의 대 전제를 선포하시면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동역자로 부르셨습니다. 그 처음으로 시몬과 안드레를 보시고 ‘나를 따라 오너라’하셨고, 다음으로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시므로 그들도 예수를 따라 나섰습니다.(막1:16-20) 여기서 네 명의 제자가 예수를 따라 갔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예수의 선포를 받아 들이고 그 일에 동참하겠다는 뜻입니다.
이때부터 예수께서는 여러가지 활동을 벌이셨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직까지 예수는 ‘내가 누구인가?를 묻지 않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다만 예수께서는 마음에 두신 사람들을 부르시고, 열두제자를 세우시고,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그들을 보내어 말씀을 전하게 하시면서 그들에게 귀신을 내쫓는 권능을 가지게 하시는 등 예수 제자들과 함께 하심으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동역하셨습니다. 이때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은 예수님의 모본이 되는 행동과 삶을 본받아 사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따라 간다’는 것은 예수와 함께하는 동역의 시작이었습니다.
갈릴리 지방의 사역을 거의 끝마칠 즈음에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를 떠나 가이사야 빌립보로 가셨습니다. 지금까지 제자들은 예수가 하신 일들을 목격하고, 예수가 하시는 일들을 대신해 왔는데 여기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예수 자신의 사역과 인격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알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물으신 질문이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물음(막8:27)이었습니다. 예수가 세례 요한, 엘리야, 선지자 중의 하나라는 입소문을 제자를 통해 들으신 예수께서 드디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질문에 성질 급한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하여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막8:29)라고 고백함으로 100점짜리 대답을 예수께 했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은 사람의 이름, 가족관계 또는 그 사람의 직업이나 신분을 말하는 것과 다른 것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한다는 것은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실현시키는 분이시며,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신 것을 말하는 것이며, 동시에 이것을 고백하는 사람도 지금까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이해가 변화되어 자신의 희망, 삶의 목표, 가치관들이 예수에게 맟추어 새롭게 변화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를 따라가는 사람은 예수가 누구이신지를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질문에 100점짜리 대답을 했던 베드로는 이제 완벽한 제자가 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완벽한 대답이 베드로의 제자됨을 완벽하게 만들었던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의 대답에 뒤이어 예수께서 당할 메시야의 영광스러운 고난, 즉 ‘고난받고,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다시 일어나야 할 일’(막8:31)을 말씀하셨을 때 예수께서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간했던 베드로는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극단적인 말씀으로 혼이 납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말 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이것은 지난 세월 예수를 베드로 자신에게 맞추려 하였지 자신을 메시야이신 예수께 맞추어 스스로를 변화시키기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따름의 도리’를 한차원 높여 말씀하십니다. 바로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막8:34)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를 따라 간다는 것은 자기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고난을 각오하고 예수를 따라가는 사람인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훈련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삶을 마감해야 할 시점에 이르게 되었을 때 예수는 제자들을 다시 한번 검증하시기 원하셨습니다. 그곳은 바로 골고다 언덕이었으며, 때는 바로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바로 그 시간이었습니다. 여기서 예수께서 제자들이 치루게 하신 시험은 이론적인 물음이 아니라 예수에 대한 실천적 태도를 확인하는 물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제자들은 시험을 포기했고, 모두가 그 시험장소에서 도망질 쳤습니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것은 빌라도가 내린 사형언도의 집행을 지휘하던 이방인 백부장이 예수의 마지막 운명을 지켜보며 고백한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막15:39)
제자들은 모두 도망질 쳤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또 한번의 기회를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천사의 입을 빌어 하신 막16:7의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갈릴리로 예수를 ‘따라 오라’는 말씀이십니다.
제자들은 갈릴리로 예수를 찾아 갔으며, 거기서 예수를 만났는지에 대해 마가복음은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은 채 끝이 납니다. 그러나 이 명령에 대한 답변은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 치라, 먹이라’는 세번의 말씀으로 베드로를 회복시키신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21:18) 고 말씀하시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어떤 죽음을 당할 것인가를 가리킨 말씀이셨습니다. 이처럼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 훈련 과정의 출발점과 중간점 ,그리고 마지막 종착지에서 반복해서 내리신 명령의 말씀이었습니다.
이 이후 베드로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사도행전을 통해 볼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행4:19-20) 사도행전의 막이 오름과 동시에 이미 베드로는 절대적으로 진리이신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따르는 삶을 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정경은 아니지만 베드로 외경을 보면 베드로는 결국 로마에서 사역하다가 체포 당한 후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처형 당하게 됩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의 군사된 자 들입니다.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주되신 예수 를 따르고 있습니까? 갈릴리에서 어부시대 초기 베드로처럼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나선 자들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2-3년 따라 다녔던 베드로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되 아직 내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을 끊임없이 저울질 하면서 세모로 만들까? 네모로 만들까? 갈까? 말까? 줄까? 말까? 뗄까? 붙일까? 온갖 세상적 생각에 번뇌하면서 예수를 따르는 모양만 그럴듯한 하늘나라 군사들입니까?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나의 삶 전체를 요구하시는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으로 이미 예수님과 ‘나’가 총체적으로 하나가 되어 예수와 ‘나’ 사이에 주객 분열을 극복하므로 예수를 따라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오늘도 ‘나를 따르라’ 말씀하십니다. 오늘, 믿는 자로서 나와 예수님과는 실로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확인하면서 예수를 ‘따라 간다’는 것을 깊이 생각해 보는 귀한 시간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내 자신을 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시니 감사합니다. 마음으로는 늘 하나님과 함께하는 길을 생각하면서도 실제의 삶 속에서는 자꾸만 마음 따로 몸따로, 입따로 머리 따로인 삶을 사는 것을 알게 되어 부끄러운 삶을 살게 됨을 회개합니다. 사랑의 주님 아무리 소원해도 겉과 속이 같은 삶이 참으로 어렵사오니 성령님 붙들어 주시고 이끌어 주시어서 예수 보시기에 합당한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것을 드림으로 따라 갈 수 있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믿사옵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동해에서 미국과 함께 벌였던 해상합동훈련에 이어 서해에서 벌이고 있는 을지포커스 가디언 훈련을 두고 북한이 연일 신경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적군과 대치하고 있는 군은 언제나 정병강군으로 육성되어 유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정병강군의 기본은 군인의 기강이 확립되어야 하는 것이고, 군대 기강의 기본 요소는 바로 지휘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군사된 자들입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명령의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이 맡기신 일, 곧 소명을 감당하며 살아 갈 방법을 본문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1:15에서 먼저 ‘회개하라’ 말씀하십니다. 이는 성경중심의 가치관과 세계관으로 돌아가 올바른 크리스쳔의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역시 1:15에서 ‘믿으라’ 말씀하시는데 이는 교회의 본질적인 모습을 믿으라, 곧 예수님을 인격적이고 관계적으로 믿으라는 것을 말합니다.
세번 째로 예수님은 1:17에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머리 속으로, 관념적으로만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대로 행동으로 순종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에서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25번이나 말씀하셨는데 오늘 본문이나 막8:34, 그리고 요21:18-19에서 ‘나를 따르라’고 하신 말씀의 때와 장소를 볼 때 참으로 믿는 자로서 우리 성도들이 깊이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할 말씀인 것을 알게 됩니다.
마가복음을 예수님의 제자훈련이라는 관점에서 살펴 볼 때 예수님이 제자로 삼으려는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말하신 명령의 말씀은 바로 ‘나를 따르라’라는 말씀이셨고, 마가복음의 본래의 본문이 16장 8절에서 끝이나는 것이라고 할 때 마지막 명령은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들 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고 천사의 입을 빌려서 하신 것으로 이 말씀도 역시 그곳으로’ 나를 따라 오라’는 말씀입니다.
‘따른다’는 것은 제자됨의 기본요소인 동시에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때가 찼다,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라, 복음을 믿으라’는 하나님 나라의 대 전제를 선포하시면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동역자로 부르셨습니다. 그 처음으로 시몬과 안드레를 보시고 ‘나를 따라 오너라’하셨고, 다음으로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시므로 그들도 예수를 따라 나섰습니다.(막1:16-20) 여기서 네 명의 제자가 예수를 따라 갔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예수의 선포를 받아 들이고 그 일에 동참하겠다는 뜻입니다.
이때부터 예수께서는 여러가지 활동을 벌이셨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직까지 예수는 ‘내가 누구인가?를 묻지 않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다만 예수께서는 마음에 두신 사람들을 부르시고, 열두제자를 세우시고,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그들을 보내어 말씀을 전하게 하시면서 그들에게 귀신을 내쫓는 권능을 가지게 하시는 등 예수 제자들과 함께 하심으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동역하셨습니다. 이때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은 예수님의 모본이 되는 행동과 삶을 본받아 사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따라 간다’는 것은 예수와 함께하는 동역의 시작이었습니다.
갈릴리 지방의 사역을 거의 끝마칠 즈음에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를 떠나 가이사야 빌립보로 가셨습니다. 지금까지 제자들은 예수가 하신 일들을 목격하고, 예수가 하시는 일들을 대신해 왔는데 여기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예수 자신의 사역과 인격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알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물으신 질문이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물음(막8:27)이었습니다. 예수가 세례 요한, 엘리야, 선지자 중의 하나라는 입소문을 제자를 통해 들으신 예수께서 드디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질문에 성질 급한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하여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막8:29)라고 고백함으로 100점짜리 대답을 예수께 했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은 사람의 이름, 가족관계 또는 그 사람의 직업이나 신분을 말하는 것과 다른 것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한다는 것은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실현시키는 분이시며,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신 것을 말하는 것이며, 동시에 이것을 고백하는 사람도 지금까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이해가 변화되어 자신의 희망, 삶의 목표, 가치관들이 예수에게 맟추어 새롭게 변화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를 따라가는 사람은 예수가 누구이신지를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질문에 100점짜리 대답을 했던 베드로는 이제 완벽한 제자가 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완벽한 대답이 베드로의 제자됨을 완벽하게 만들었던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의 대답에 뒤이어 예수께서 당할 메시야의 영광스러운 고난, 즉 ‘고난받고,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다시 일어나야 할 일’(막8:31)을 말씀하셨을 때 예수께서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간했던 베드로는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극단적인 말씀으로 혼이 납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말 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이것은 지난 세월 예수를 베드로 자신에게 맞추려 하였지 자신을 메시야이신 예수께 맞추어 스스로를 변화시키기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따름의 도리’를 한차원 높여 말씀하십니다. 바로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막8:34)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를 따라 간다는 것은 자기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고난을 각오하고 예수를 따라가는 사람인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훈련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삶을 마감해야 할 시점에 이르게 되었을 때 예수는 제자들을 다시 한번 검증하시기 원하셨습니다. 그곳은 바로 골고다 언덕이었으며, 때는 바로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바로 그 시간이었습니다. 여기서 예수께서 제자들이 치루게 하신 시험은 이론적인 물음이 아니라 예수에 대한 실천적 태도를 확인하는 물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제자들은 시험을 포기했고, 모두가 그 시험장소에서 도망질 쳤습니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것은 빌라도가 내린 사형언도의 집행을 지휘하던 이방인 백부장이 예수의 마지막 운명을 지켜보며 고백한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막15:39)
제자들은 모두 도망질 쳤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또 한번의 기회를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천사의 입을 빌어 하신 막16:7의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갈릴리로 예수를 ‘따라 오라’는 말씀이십니다.
제자들은 갈릴리로 예수를 찾아 갔으며, 거기서 예수를 만났는지에 대해 마가복음은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은 채 끝이 납니다. 그러나 이 명령에 대한 답변은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 치라, 먹이라’는 세번의 말씀으로 베드로를 회복시키신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21:18) 고 말씀하시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어떤 죽음을 당할 것인가를 가리킨 말씀이셨습니다. 이처럼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 훈련 과정의 출발점과 중간점 ,그리고 마지막 종착지에서 반복해서 내리신 명령의 말씀이었습니다.
이 이후 베드로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사도행전을 통해 볼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행4:19-20) 사도행전의 막이 오름과 동시에 이미 베드로는 절대적으로 진리이신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따르는 삶을 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정경은 아니지만 베드로 외경을 보면 베드로는 결국 로마에서 사역하다가 체포 당한 후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처형 당하게 됩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의 군사된 자 들입니다.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주되신 예수 를 따르고 있습니까? 갈릴리에서 어부시대 초기 베드로처럼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나선 자들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2-3년 따라 다녔던 베드로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되 아직 내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을 끊임없이 저울질 하면서 세모로 만들까? 네모로 만들까? 갈까? 말까? 줄까? 말까? 뗄까? 붙일까? 온갖 세상적 생각에 번뇌하면서 예수를 따르는 모양만 그럴듯한 하늘나라 군사들입니까?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나의 삶 전체를 요구하시는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으로 이미 예수님과 ‘나’가 총체적으로 하나가 되어 예수와 ‘나’ 사이에 주객 분열을 극복하므로 예수를 따라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오늘도 ‘나를 따르라’ 말씀하십니다. 오늘, 믿는 자로서 나와 예수님과는 실로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확인하면서 예수를 ‘따라 간다’는 것을 깊이 생각해 보는 귀한 시간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내 자신을 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시니 감사합니다. 마음으로는 늘 하나님과 함께하는 길을 생각하면서도 실제의 삶 속에서는 자꾸만 마음 따로 몸따로, 입따로 머리 따로인 삶을 사는 것을 알게 되어 부끄러운 삶을 살게 됨을 회개합니다. 사랑의 주님 아무리 소원해도 겉과 속이 같은 삶이 참으로 어렵사오니 성령님 붙들어 주시고 이끌어 주시어서 예수 보시기에 합당한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것을 드림으로 따라 갈 수 있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믿사옵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