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다’(욥5:7)고 말하는 데만 사람의 말처럼 사람들은 고난으로부터 자유롭기가 어렵습니다. 사람들이란 제눈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봅니다. 그래서 고난에 처한 사람들을 위로한다는 말이 상한 마음을 가라 앉히기 보다는 오히려 그 상한 속을 더 끓어 오르게 만드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오늘 고난에 처한 욥과 세친구와 엘리후와의 논쟁이 그렇습니다. 그 끓어 오르는 속마음을 일시에 정리하시는 장면이 바로 하나님이 욥을 만나 주시는 장면입니다.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가운데로서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욥38:1), 호렙산에서 세미한 소리를 통해서 엘리아를 만나주셨던 하나님(왕상19:12)이 오늘은 욥을 폭풍가운데서 만나 주십니다. 고난 가운데 혼돈에 싸인 욥을 위해 위엄과 권능으로 나타나시고, 동시에 하나님의 중대한 자기 표현을 위해서 폭풍가운데 나타 나셨습니다. 세미한 소리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만나든, 푹풍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만나든 하나님을 만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만나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위로자가 되어 주기 위해서 찾아 왔던 친구들과의 설전에 오히려 피로만 더한 채 이제 하나님 앞에 홀로 서게 된 욥에게 하나님께서는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욥38:4, 40:7) 다시 말해서 단단히 정신차리고 하나님의 질문에 대답할 준비를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고난의 이유를 몰라 당황하는 욥과 우리 모두를 향하여 소나기처럼 난데없이 질문을 퍼부어 대십니다. 창조세계와 창조질서에 대한 하나님의 질문들은 지금까지 나를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게 한 그 편협하고 협소한 지금까지의 사고방식을 깨뜨리기 위해서 폭풍가운데 나타 나셔서 정신없이 퍼부으신 질문들입니다.
38장에서부터 41장까지 이어지는 긴 문장 속의 질문들을 정리하면 먼저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눈 곳간에 들어 갔었느냐 우박 창고를 보았느냐?’,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누가 그 도량을 정하였는지 네가 아느냐?’, ‘까마귀 새끼가 먹을 것이 없어서 오락가락 할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을 것을 예비하는 자가 누구냐?,’ 그리고 마지막으로 ’네가 능히 낚시로 악어를 낚을 수 있겠느냐?’ 입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질문들은 ‘ 누구냐?, 네가 아는 것이 무엇이냐?, 네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로 다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이 세가지 질문들을 묵상하는 가운데 교훈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38장 41절의 ‘까마귀 새끼가 먹을 것을 예비하는 자가 누구냐?’, 이 질문은 신앙을 지닌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상식적인 질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욥에게 지금 하시는 이 질문은 천지 만물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가르치기 위한 상식적인 질문이 아니라 까마귀 새끼 한마리의 먹을 양식까지도 챙겨 주시는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가?를 묻는 질문,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의 존재와 정체성에 대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신 것과 같은 종류 질문, 모양만 다른 질문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지난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이 행하신 온갖 기적과 이적을 보고 경험했던 베드로는 거침없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사정이 다릅니다. 극심한 고난에 허덕이면서 그 고난의 궁극적인 원인조차 하나님에게 돌리고 싶은 때에 ‘하나님이 누구인신가?’라는 질문에 베드로처럼 거침없이 숨도 안 쉬고 올바로 대답할 수 있습니까?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다만 하나님이 스스로 보여 주시는 계시의 도움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고,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일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까닭없이, 이유없이’ 당하는 고난의 문제 또한 하나님의 자유행위에 포함되는 것임을 39장에서 산 염소의 출산의 고통을 예로 들어 말씀하십니다. 욥과 같이 우리가 지금 겪는 고난은 바로 하나님께서 성숙한 인격체 창조를 위한 하나님의 자유로운 창조 활동인 것을 출산의 고통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창조 질서에 속해 있는 모든 것들이 출산의 고통을 통하여 새 생명을 낳는 것처럼 욥이 당하는 고통, 즉 자식들의 죽음, 질병으로 인한 견딜 수 없는 육체적 고통,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당하고 있다는 영적 고통, 소외감 등 온갖 실존적 극한의 고난들은 오히려 욥 자신의 성숙한 인격체 창조라는 하나님의 재 창조 사역인 것을 깨달아 온전히 받아 들일 것을 바라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냐?’라는 질문은 바로 지금까지 자신을 위해 항변했던 욥에게 ‘ 네가 하나님이냐?’고 물으시는 말씀인 것이고, 극한 곤경에 욥과 우리를 빠뜨리게 하신 하나님, 그 가운데서도 소망과 의지가 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바로 알아 평안 속에서도 고난을 허락하시고, 고난 속에서도 희망과 평안을 주시는 다양한 하나님의 모습을 납득하므로 내가 지금 겪는 이해 할 수 없는 고난의 문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물음인 것입니다.
두번 째로 하나님께서는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누가 그 도량을 놓았는지 네가 아느냐?’(욥39:1-2)고 물으십니다. 하나님의 이 질문은 욥이나 우리가 편협한 지식의 잣대를 가지고 세상 돌아가는 이치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측량하려고 했던 어리석음에 대한 질타의 목소리입니다. 욥이 안다고 하는 지식은 자기 중심적인 주관적 지식일 뿐입니다. 고난에 처한 자신의 처지로 인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불평하고 항변하는 근거는 바로 욥자신, 바로 우리 자신의 도덕적 충실성입니다. 욥은 말합니다.’ 내가 언제 가난한 자의 소망을 막았던가… 내가 언제 나의 미워하는 자의 멸망을 기뻐하였으며 그의 재앙 만남을 인하여 기운을 뽐내었던가… 나그네로 거리에서 자게 하니지 아니하고,…’(욥31:16, 29)
욥은 도덕적으로 충실한 인생을 살아 왔습니다. 그러나 이 도덕적으로 충실한 삶을 살았다는 것이 때로는 오히려 하나님을 올바르게 아는데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욥의 지식이란 더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명과 도덕적 규범에 충실한 자에게 하나님은 재난과 형벌과 같은 고난의 멍에를 지우지 않을 것이라는 전통적인 인과 응보의 신학이 바로 우리가 익숙한 신학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욥의 지식이요 생각인 동시에 바로 우리들의 지식이요 생각일 뿐입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단적으로 말씀하십니다. ‘ 내 생각과 너희 생각은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사55:8) 이 말씀은 욥이나 우리 인간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과 하나님이 우리를 알고 있는 지식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욥은 인간의 이성적 지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까닭도 없는 극심한 고난을 통하여 인간적 이성과 지성의 한계 너머에 계시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지식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말합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이처럼 인간이 자기 지식의 한계, 자기의 부족함을 깨닫는 길은 바로 무한광대한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네가 아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받을 때입니다.
사실 욥은 사회적으로 힘있는 자들의 강탈과 억압으로 인하여 가난과 질병에 허덕이고 있는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사회에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살아 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욥은 말합니다. ‘나는 소경의 눈도 되고 빈궁하는 자의 아비도 되며 불의한 자의 어금니를 꺽고 그 잇사이에서 겁탈한 물건을 빼어 내었었느니라’(욥27:15-17) 그러나 이제 욥이 하나님 앞에 홀로 서있는 때에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물으십니다. 인간적 삶에 있어서 세상만사의 모든 문제 해결의 근원은 궁극적으로 악의 문제 해결, 즉 죄로부터의 구원에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세상의 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나대던 욥에게 ‘ 소같이 풀을 먹는 하마를 볼찌어다. 그것이 정신 차리고 있을 때에 누가 능히 잡을 수 있겠느냐?’는 물음으로 책망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더 나아가 ‘모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낮추며 악인을 그 처소에서 밟아서 그들을 함게 진토에 묻고 어둑한 곳에 둘찌니라 그리하면 네 오른 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내가 인정하리라’(욥40:9-14)고 하십니다. ‘네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질문은 바로 ‘네가 하나님이냐’는 질문의 연장선에서 하나님의 방식을 욥과 우리가 얼마나 이해할 수 있느냐?를 물으시는 질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거칠고 메마른 광야에 있는 생물들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무상의 은혜를 통하여 그들의 삶을 풍성하게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전혀 살지 않는 광야는 인간의 눈에는 별 것 아닌 것 같아 보여도 광야에도 동물들과 식물들의 다양한 생명체가 살고 있는 삶을 터전 입니다. 그곳에 조차 무상으로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님의 방식을 깨닫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모든 것은 내가 하는 것이다’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욥은 더 이상 하나님에 대항 할 수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일 뿐이었습니다.
바벨탑을 쌓던 성경초기 역사의 때처럼 사람들은 더 높이, 더 빨리, 더 멀리, 더 깊게를 외쳐 댑니다. 나라들마다 초 고층 건물들을 쌓아 올려 내가 최고임을 자랑하기에 혈안입니다. 만들때는 모릅니다. 그러나 공든 탑이 일순간에 흔들려 무너 질때는 압니다. 태풍 곤파스가 남한 땅을, 태풍 얼이 미국 동북부를 쓸고 지나갔습니다. 기억되는 몇 년전 카트리나 참사로부터 시작하여 요 몇년 사이에 천재지변이 그 정도를 더해 갑니다. 홍수로, 가뭄으로, 태풍으로, 기근으로, 여기에 인재성이 더해진 재해까지 더해져 아프리카에서도, 파키스탄에서도, 중국에서도 중남미에서도, 온 땅의 삶이 혼란에 혼란을 더 해갑니다. 이 천재지변들 앞에서 우리가 아는 것이 없고, 가진 것이 없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영화에 불과한 것이지만 ‘해운대’같은 천재지변이 발생하면, ‘지구멸망2012’와 같은 마지막이 현실로 우리에게 닥쳐 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진정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바라 볼 뿐입니다.
지금은 변화가 필요한 때입니다. 그러나 그 변화는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며,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존재’이며.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에서부터 시작 되어야 합니다. 죄만 지으면서 살아 왔다는 ‘나’라는 존재에 대한 회개로부터 시작되는 변화가 올바른 변화의 시작입니다. 나를 제외한 변화는 헛일입니다.
오늘 모든 것을 받아 들인 욥에게 하나님께서는 갑절의 은혜를 부어주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욥은 아들과 손자 사대를 보면서 나이 들어 기한이 차서 죽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똑같은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부어지기 시작 하는 귀한 아침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