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May 19, 2010
Monday, May 17, 2010
이것은 내 몸이요 이 잔은 내 피라 (눅22:19-20)
새들이 떠난 숲은 적막하다고 했습니다. 언젠가는 어차피 독립함으로 헤어져야 할 아이들이지만 지난 20년을 넘게 키운 정이, 한 식구로 같이 살아 온 정이 아이들의 얼굴을 문득 떠 올리게 하고, 또 곁에 두고 부대끼고 싶은 생각이 들게 합니다. 흔히들 이웃사촌이 먼 식구보다는 낫다고들 하는데 정말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기관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교회와 가정입니다. 특히 가정은 하나님이 만드신 작품인 동시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귀한 선물로 모든 행복의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가정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오늘은 가정을 이루게 하는 가족을 생각해 보는 가운데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들의 삶 가운데 계시한 것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으면 다양한 사람들과의 관계로 인한 수많은 일들을 볼 수 있는데 그 가운데는 이웃이기 때문에 벌어질 수 밖에 없는 일들도 있고, 또 가족이기 때문에 생기는 일들도 있습니다.
먼저 이웃이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출애굽기 3장, 호렙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고 40년동안 출애굽 이스라엘 백성을 이끈 모세의 눈물겨운 역할은 우리 모두에게 새삼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수많은 비방과 모반사건을 겪었던 모세, 백성을 위해 중보했던 모세에게 믿음없는 백성들이 던진 돌에 맞아 죽을 뻔한 일이 발생합니다. 이 원망과 반역의 사건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진멸하려고 하셨으나 모세는 다시 하나님께 중보하여 그들의 진멸을 막게 되었지만백성들은 그 죄의 결과로 광야 길을 40년 동안이나 방황하게 되었습니다. 민13:1-14:10의 이야기입니다.
12지파를 대표한 12명의 정탐꾼 가운데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10명의 정탐꾼들이 가나안 땅에서 본 신장이 장대한 네피림의 후손 아낙 자손을 거론하며 가나안 땅을 악평하자 백성들이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울며 불며 난리 치며 모세를 돌로 치려하였습니다. 지금 가나안 초입에 당도하기까지 백성들은 바로에게 내렸던10가지 재앙, 홍해사건, 마라의 쓴 물 사건, 만나와 메추라기 사건 등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보이신 기적, 그리고 백성을 위한 모세의 눈물어린 수없는 중보를 보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정탐꾼들의 보고를 듣자 마자 앞의 일들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모세를 돌로 쳐죽이겠다고 저 난리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웃입니다.
다윗은 또 어떻습니까?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 다윗만큼 회자되는 인물도 없습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백성들의 이 노래 하나 때문에 장인인 사울에게 쫓겨 원치않는 광야를 헤매게 된 다윗이 아둘람 굴에 있을 때 그 소문을 듣고 한 사람 두사람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4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여 들어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소위 아둘람공동체라 말합니다.
‘환난 당한 모든 자 ,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삼상22:2) 다윗은 자연스럽게 우두머리가 되었으며, 그 400명은 위대한 다윗 왕국을 이루어 내는 일등 공신들이 되었습니다. 쫓기고 원통한 일 당한 사람들 중에서 군대 장관이 나오고 대제사장이 나왔습니다. 다윗의 충신들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왕국을 이룬 일군들이 다 아둘람 공동체에서 나온 것입니다. 아둘람공동체는 비참한 광야의 삶을 살았지만 비전을 가진 공동체로 언급되고 있는데 이 공동체를 이끌던 다윗도 사람들에게 돌에 맞아 죽을 뻔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전투에 참가했다가 블레셋 방백들에 의해 배척을 받은 다윗과 다윗의 용사가 그들의 거처 시글락으로 돌아오니 시글락은 아말렉의 침공으로 이미 불탔고, 다윗 용사들의 아내와 자녀들은 사로잡혀갔습니다. 이에 다윗과 백성들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 높여 울었는데 이 때 백성들이 마음의 슬픔을 억제하지 못해 다윗을 돌로 치려 하였습니다. 얼마나 처지가 급하고 한심했는지 다윗이 군급했다고 했습니다.
모세가 누구고, 다윗이 누굽니까? 백성들을 위해 울고, 백성들을 위해 몸바쳤고,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께 밤낮으로 기도한 우리들의 영웅이지만 지금 벌어지는 일이 지난 일을 새까맣게 잊게 합니다. 아무리 상황이 어렵다고한들 어떻게 돌로 쳐 죽이려 합니까? 이게 이웃의 한계입니다. 지난 일은 관계 없습니다. 지금 벌어진 일만 가지고 판단하고 대접하는 것이 바로 세상인심입니다.
이번에는 가족이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일들을 보려고 합니다. 그돌라오멜왕과 그 동맹이 소돔과 고모라땅을 침략했습니다. 이 때 롯의 재물이 빼앗기고 롯의 일가가 사로잡혀 갔습니다. 롯이 누구입니까? 롯은 하란의 아들로 데라의 손자이자 아브람, 곧 아브라함의 조카였습니다. 롯과 아브라함의 소유가 많아져 함께 할 수 없게 되자 아브라함이 동이건 서이건 ‘네 좋은대로 땅을 택해 떠나라’고 하자 아직 여호와의 동산같고 애굽 땅 같던 소돔과 고모라 땅이 들어 있던 요단 들을 보고는 한마디도 작은 아버지인 아브람의 생각은 물어 보지도 않은 채 냉큼 그 쪽으로 식솔들을 몰아 떠나 갔습니다. 참으로 싹수없는 위인이었습니다.
그랬던 롯이 그돌라오멜왕과 그 동맹군이 소돔과 고모라 땅을 침략했을 때 모든 재물을 빼앗기고 그의 식솔 모두가 사로잡혀 갔습니다. (창14:11-12) 이 소식을 들은 아브람은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자 318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단숨에 쫓아갔고, 밤을 타서 그들을 쳐서 물리치고는 빼았겼던 재물과 조카 롯과 가솔들을 다 찾아 왔습니다.
무엇이 아브람을 움직였습니까? 바로 피붙이의 정입니다. 아브람인들 조카 롯에 대해 괘씸한 마음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그 괘씸한 마음이 문제가 될 수 없었습니다. 피붙이인 조카, 그 식솔들을 구하는 것이 제일 급한 일이었습니다. 그 일이 조카 롯에 대한 모든 감정을 덮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가족이고, 가족의 정입이다.
유다 땅에 심한 기근이 들자 인근 이방 땅 모압으로 잠시 피난하여 집을 떠났던 엘리멜렉 일가가 패가 직전에 이르렀습니다.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그 두 아들마저 이방 땅에서 죽어버렸습니다. 이에 시어미 나오미가 두 자부에게 각각 본가로 돌아가라 권고했습니다.(룻1:7) 룻의 동서인 오르바는 시어미의 말대로 본가로 갔지만 룻은 자신의 결심을 말합니다.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라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룻1:16-17) 왜 그랬습니까? 잠시나마 부부로 산 그 정때문에, 그 남편을 낳고 기른 시어미에 대한 가족으로서의 정때문에 그렇게 했습니다. 다행인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나오미 가정에 있었기에 보아스를 만났고 그 가계를 통해서 예수가 탄생되는 영광이 그 가문에 있었습니다.
육신의 옷을 입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오셨던 예수는 이 사실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데 있어서는 모든 일꾼들이 ‘이웃’으로는 부족하고 그 대신 ‘가족’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는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이적과 표적을 보이셨는데 그 처음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든 사건입니다. 혼인잔치가 무엇입니까? 혼인잔치는 서로 남남이었던 남녀를 한 몸으로 이루게 하고, 한 가정을 이루게 하는 예식입니다. 예수와 성도가 부부가 되어야 하는 것을 보여 줍니다. 신랑은 예수요, 성도는 바로 신부입니다. 이후에도 예수는 여러차례 믿는 자들의 관계가 가족의 관계가 되어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모친과 동생이 당신께 말하려고 왔다’고 했을 때(마12:49) 예수는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마12:50)고 하셨습니다. 울타리가 짓는 한계를 뛰어 넘는 말씀이었습니다.
육신으로 맺어진 가족의 한계를 넘어 보편적 범주로 가족의 한계를 더욱 확장시킨 말씀은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신 채 하신 말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요19:26-27) 제자들은 어머니를 극진히 모셨을 것이고, 어머니 또한 제자들을 배 아파 낳은 자식 이상으로 지극한 정성으로 사랑하셨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는 믿는 이들의 관계를 끊임없이 가정 속으로, 그리고 가족의 관계 속으로 몰아 가고 계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우리가 성찬 예식에 자주 듣고 보는 말씀입니다. ‘ 이것은 내 살이요 이 잔은 내 피라' 살과 피는 바로 가족을 가족되게 하고, 그 가족들로 하여금 가정으로 머물게 하는 근본이고 힘입니다. 예수의 살을 나누고, 예수의 피를 나눈 믿는 이들은 비록 육적으로는 남남이지만 영적으로는 가족으로, 가정으로 살아야 하는 존재들임을 눈으로 보게 하시며 주신 말씀이 바로 오늘의 말씀입니다.
마지막 고것 하나 때문에 손가락질하고 정죄하는 이웃이 아니라 마지막 고것 하나 때문에 지나간 모든 것이 잊혀지고 덮어지는 가족으로 살아야 합니다. 서로가 너무나 가까운 존재여서 나도 모르게 문득 문득 생각나는 존재들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너와 나 사이에 쌓은 미운정, 고운정이 그렇게 만듭니다.
사랑은 외모로 말로 몸짓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지만 정은 조용히 저 깊은 땅이 지닌 열처럼 나도 모르게 마음의 맨 밑바닥에서 타오르는 것입니다. 백년해로하는 부부는 깝작거리는 사랑이 아니라 겉으로는 얼음장같지만 그 밑으로는 언제나 영상 4도의 물이 흐르는 것처럼 미지근하고도 은근한 정으로 사는 것입니다.
가정의 달을 맞아 다시한번 우리의 가정을 돌아보고 가족으로서의 우리 교회를 더듬어 보는 귀한 시간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감사합니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시고 우리를 동물처럼 떼로 살지 않고 가족으로 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사람마다 가정을 일구고 가정을 통해서 행복을 꿈꾸지만 많은 가정들이, 그리고 교회를 포함하여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공동체는 어느 것이건 조금 부족한 2%때문에 고통하고 갈등합니다.
원하고 바라옵기는 우리의 가정이, 우리의 공동체가 더 큰 사랑과 정으로 조금 부족한 2%가 채워 지게 하시고, 조금 부족한 것 때문에 생기는 모든 고통과 갈등이 덮어지게 하시고 녹아지게 하시옵소서. 사랑의 계절 5월에 우리의 가정을 다시 한번 생각하고, 우리의 교회를 다시한번 돌아보는 귀한 시간들을 허락하시옵소서.
믿사옵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기관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교회와 가정입니다. 특히 가정은 하나님이 만드신 작품인 동시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귀한 선물로 모든 행복의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가정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오늘은 가정을 이루게 하는 가족을 생각해 보는 가운데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들의 삶 가운데 계시한 것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으면 다양한 사람들과의 관계로 인한 수많은 일들을 볼 수 있는데 그 가운데는 이웃이기 때문에 벌어질 수 밖에 없는 일들도 있고, 또 가족이기 때문에 생기는 일들도 있습니다.
먼저 이웃이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출애굽기 3장, 호렙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고 40년동안 출애굽 이스라엘 백성을 이끈 모세의 눈물겨운 역할은 우리 모두에게 새삼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수많은 비방과 모반사건을 겪었던 모세, 백성을 위해 중보했던 모세에게 믿음없는 백성들이 던진 돌에 맞아 죽을 뻔한 일이 발생합니다. 이 원망과 반역의 사건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진멸하려고 하셨으나 모세는 다시 하나님께 중보하여 그들의 진멸을 막게 되었지만백성들은 그 죄의 결과로 광야 길을 40년 동안이나 방황하게 되었습니다. 민13:1-14:10의 이야기입니다.
12지파를 대표한 12명의 정탐꾼 가운데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10명의 정탐꾼들이 가나안 땅에서 본 신장이 장대한 네피림의 후손 아낙 자손을 거론하며 가나안 땅을 악평하자 백성들이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울며 불며 난리 치며 모세를 돌로 치려하였습니다. 지금 가나안 초입에 당도하기까지 백성들은 바로에게 내렸던10가지 재앙, 홍해사건, 마라의 쓴 물 사건, 만나와 메추라기 사건 등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보이신 기적, 그리고 백성을 위한 모세의 눈물어린 수없는 중보를 보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정탐꾼들의 보고를 듣자 마자 앞의 일들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모세를 돌로 쳐죽이겠다고 저 난리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웃입니다.
다윗은 또 어떻습니까?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 다윗만큼 회자되는 인물도 없습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백성들의 이 노래 하나 때문에 장인인 사울에게 쫓겨 원치않는 광야를 헤매게 된 다윗이 아둘람 굴에 있을 때 그 소문을 듣고 한 사람 두사람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4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여 들어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소위 아둘람공동체라 말합니다.
‘환난 당한 모든 자 ,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삼상22:2) 다윗은 자연스럽게 우두머리가 되었으며, 그 400명은 위대한 다윗 왕국을 이루어 내는 일등 공신들이 되었습니다. 쫓기고 원통한 일 당한 사람들 중에서 군대 장관이 나오고 대제사장이 나왔습니다. 다윗의 충신들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왕국을 이룬 일군들이 다 아둘람 공동체에서 나온 것입니다. 아둘람공동체는 비참한 광야의 삶을 살았지만 비전을 가진 공동체로 언급되고 있는데 이 공동체를 이끌던 다윗도 사람들에게 돌에 맞아 죽을 뻔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전투에 참가했다가 블레셋 방백들에 의해 배척을 받은 다윗과 다윗의 용사가 그들의 거처 시글락으로 돌아오니 시글락은 아말렉의 침공으로 이미 불탔고, 다윗 용사들의 아내와 자녀들은 사로잡혀갔습니다. 이에 다윗과 백성들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 높여 울었는데 이 때 백성들이 마음의 슬픔을 억제하지 못해 다윗을 돌로 치려 하였습니다. 얼마나 처지가 급하고 한심했는지 다윗이 군급했다고 했습니다.
모세가 누구고, 다윗이 누굽니까? 백성들을 위해 울고, 백성들을 위해 몸바쳤고,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께 밤낮으로 기도한 우리들의 영웅이지만 지금 벌어지는 일이 지난 일을 새까맣게 잊게 합니다. 아무리 상황이 어렵다고한들 어떻게 돌로 쳐 죽이려 합니까? 이게 이웃의 한계입니다. 지난 일은 관계 없습니다. 지금 벌어진 일만 가지고 판단하고 대접하는 것이 바로 세상인심입니다.
이번에는 가족이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일들을 보려고 합니다. 그돌라오멜왕과 그 동맹이 소돔과 고모라땅을 침략했습니다. 이 때 롯의 재물이 빼앗기고 롯의 일가가 사로잡혀 갔습니다. 롯이 누구입니까? 롯은 하란의 아들로 데라의 손자이자 아브람, 곧 아브라함의 조카였습니다. 롯과 아브라함의 소유가 많아져 함께 할 수 없게 되자 아브라함이 동이건 서이건 ‘네 좋은대로 땅을 택해 떠나라’고 하자 아직 여호와의 동산같고 애굽 땅 같던 소돔과 고모라 땅이 들어 있던 요단 들을 보고는 한마디도 작은 아버지인 아브람의 생각은 물어 보지도 않은 채 냉큼 그 쪽으로 식솔들을 몰아 떠나 갔습니다. 참으로 싹수없는 위인이었습니다.
그랬던 롯이 그돌라오멜왕과 그 동맹군이 소돔과 고모라 땅을 침략했을 때 모든 재물을 빼앗기고 그의 식솔 모두가 사로잡혀 갔습니다. (창14:11-12) 이 소식을 들은 아브람은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자 318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단숨에 쫓아갔고, 밤을 타서 그들을 쳐서 물리치고는 빼았겼던 재물과 조카 롯과 가솔들을 다 찾아 왔습니다.
무엇이 아브람을 움직였습니까? 바로 피붙이의 정입니다. 아브람인들 조카 롯에 대해 괘씸한 마음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그 괘씸한 마음이 문제가 될 수 없었습니다. 피붙이인 조카, 그 식솔들을 구하는 것이 제일 급한 일이었습니다. 그 일이 조카 롯에 대한 모든 감정을 덮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가족이고, 가족의 정입이다.
유다 땅에 심한 기근이 들자 인근 이방 땅 모압으로 잠시 피난하여 집을 떠났던 엘리멜렉 일가가 패가 직전에 이르렀습니다.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그 두 아들마저 이방 땅에서 죽어버렸습니다. 이에 시어미 나오미가 두 자부에게 각각 본가로 돌아가라 권고했습니다.(룻1:7) 룻의 동서인 오르바는 시어미의 말대로 본가로 갔지만 룻은 자신의 결심을 말합니다.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라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룻1:16-17) 왜 그랬습니까? 잠시나마 부부로 산 그 정때문에, 그 남편을 낳고 기른 시어미에 대한 가족으로서의 정때문에 그렇게 했습니다. 다행인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나오미 가정에 있었기에 보아스를 만났고 그 가계를 통해서 예수가 탄생되는 영광이 그 가문에 있었습니다.
육신의 옷을 입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오셨던 예수는 이 사실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데 있어서는 모든 일꾼들이 ‘이웃’으로는 부족하고 그 대신 ‘가족’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는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이적과 표적을 보이셨는데 그 처음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든 사건입니다. 혼인잔치가 무엇입니까? 혼인잔치는 서로 남남이었던 남녀를 한 몸으로 이루게 하고, 한 가정을 이루게 하는 예식입니다. 예수와 성도가 부부가 되어야 하는 것을 보여 줍니다. 신랑은 예수요, 성도는 바로 신부입니다. 이후에도 예수는 여러차례 믿는 자들의 관계가 가족의 관계가 되어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모친과 동생이 당신께 말하려고 왔다’고 했을 때(마12:49) 예수는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마12:50)고 하셨습니다. 울타리가 짓는 한계를 뛰어 넘는 말씀이었습니다.
육신으로 맺어진 가족의 한계를 넘어 보편적 범주로 가족의 한계를 더욱 확장시킨 말씀은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신 채 하신 말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요19:26-27) 제자들은 어머니를 극진히 모셨을 것이고, 어머니 또한 제자들을 배 아파 낳은 자식 이상으로 지극한 정성으로 사랑하셨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는 믿는 이들의 관계를 끊임없이 가정 속으로, 그리고 가족의 관계 속으로 몰아 가고 계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우리가 성찬 예식에 자주 듣고 보는 말씀입니다. ‘ 이것은 내 살이요 이 잔은 내 피라' 살과 피는 바로 가족을 가족되게 하고, 그 가족들로 하여금 가정으로 머물게 하는 근본이고 힘입니다. 예수의 살을 나누고, 예수의 피를 나눈 믿는 이들은 비록 육적으로는 남남이지만 영적으로는 가족으로, 가정으로 살아야 하는 존재들임을 눈으로 보게 하시며 주신 말씀이 바로 오늘의 말씀입니다.
마지막 고것 하나 때문에 손가락질하고 정죄하는 이웃이 아니라 마지막 고것 하나 때문에 지나간 모든 것이 잊혀지고 덮어지는 가족으로 살아야 합니다. 서로가 너무나 가까운 존재여서 나도 모르게 문득 문득 생각나는 존재들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너와 나 사이에 쌓은 미운정, 고운정이 그렇게 만듭니다.
사랑은 외모로 말로 몸짓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지만 정은 조용히 저 깊은 땅이 지닌 열처럼 나도 모르게 마음의 맨 밑바닥에서 타오르는 것입니다. 백년해로하는 부부는 깝작거리는 사랑이 아니라 겉으로는 얼음장같지만 그 밑으로는 언제나 영상 4도의 물이 흐르는 것처럼 미지근하고도 은근한 정으로 사는 것입니다.
가정의 달을 맞아 다시한번 우리의 가정을 돌아보고 가족으로서의 우리 교회를 더듬어 보는 귀한 시간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감사합니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시고 우리를 동물처럼 떼로 살지 않고 가족으로 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사람마다 가정을 일구고 가정을 통해서 행복을 꿈꾸지만 많은 가정들이, 그리고 교회를 포함하여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공동체는 어느 것이건 조금 부족한 2%때문에 고통하고 갈등합니다.
원하고 바라옵기는 우리의 가정이, 우리의 공동체가 더 큰 사랑과 정으로 조금 부족한 2%가 채워 지게 하시고, 조금 부족한 것 때문에 생기는 모든 고통과 갈등이 덮어지게 하시고 녹아지게 하시옵소서. 사랑의 계절 5월에 우리의 가정을 다시 한번 생각하고, 우리의 교회를 다시한번 돌아보는 귀한 시간들을 허락하시옵소서.
믿사옵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Friday, May 14, 2010
Tuesday, May 4, 2010
네 자신을 확증하라 (고후13:4-5)
한국의 한 여성이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기도했는데 수면제가 가짜라서 죽지 않고 살아 났다는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를 일이고,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일입니다.
친구 포레스터 부인의 가짜 진주목걸이를 빌렸다 잃어버려 그것을 되갚느라 10년을 죽을 고생한 로와젤 부인의 이야기를 아십니까? 모파상의 목걸이라는 단편소설이야기입니다.
그래도 그 때는 애교가 있었습니다. 자존심이 상하기는 해도 있는 사람에게 가서 처지를 말하고 빌려서 치장하는 애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빌릴 필요가 없습니다. 눈 딱깜고 하나 사면 됩니다. 짝퉁하나면 아쉬운대로 ok입니다. 남은 몰라도 나는 안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입니다. 짝퉁이 있다는 것은 어딘가에 진품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마음 속에서 조용히 화가 나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인 것입니다.
짝퉁이란 말은 2004년부터 국어사전에 올라 갈 만큼 우리 사회에 일반화되었고, 보편화 된 용어가 되었습니다. 어찌되었거나 짝퉁이란 말은 사이비, 곧 진짜처럼 보이는 가짜란 말입니다. 사이비(似而非)란 말은 맹자의 진심장구 하편(盡心章句 下篇)에 나오는데 이곳에서 공자가 향원이라는 사람을 싫어했고, 그 이유가 향원이 사이비 학자였다는 것에서 그 출처를 찾을 수 있습니다.
짝퉁이 있다는 말은 진짜 명품이 있다는 말로 기술이 하도 좋아 진짜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잘 만들었거니와 명품인 진짜의 값이 너무도 비싸기 때문에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찾게 되는 것이 짝퉁입니다. ‘사이비’라는 단어나 ‘가짜’라는 단어보다는 법률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덜 문제가 되는듯 보여 쉽게 사용되는 용어이기도 한 것입니다.
짝퉁의 심리학은 어디까지나 욕심에 있다고 진단 합니다. 모자라면 모자라는 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하면 그 자체로서 극상품은 아닐지라도 가짜는 아닌 진짜인 법인데 욕심으로 그것을 꾸미고 변조하려는 마음을 먹는 순간부터 뱁새가 황새 쫓아가려다 가랑이 찢어지는 비극이 시작되는 것이라는 지적인 것입니다. 성경은 욕심 때문에 짝퉁 찾다가 빠지는 비극을 간단히 경고합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는다’ 약1:5의 말씀인데 짝퉁은 물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논문, 학력, 경력, 각종 집회, 설교, 인격에 이르기까지 온통 짝퉁이 곳곳에 드러나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어서 짝퉁의 천국 중국 상하이 시장은 ‘사람빼고 모두다 짝퉁이있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오늘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한 말은 고린도 교인들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인하라는 말, 다시말하면 그들이 진품인지 아니면 짝퉁인지를 확인하라는 뼈아픈 충고의 지적입니다. 당시 거짓 사도들로 인하여 여거 가지 어려운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데 대하여 바울은 조만간 고린도 교회룰 방문하게 되는 때에 교회의 지도자로서 그 불미스러운 일들을 짚고 넘어갈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을 자신을 사적 감정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 안에 있는 두세 사람의 증인들과 함께 처리할 것임을 말하면서 고린도 교회 안에 벌어지고 있는 모든 문제들이 너나 할 것 없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죄악으로 벌어진 불미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오늘의 현실을 두고 누가 누구를 손가락질하며 파당을 지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돌아 보아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올바로 확인할 것을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본문 속에서 고린도 교회가 처한 문제의 해결점을 다른 데서 찾을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찾을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신 삶이기 때문에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행한 것과 똑 같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자가 온전히 하나님이신 예수 안에 있을 때 본인 뿐만 아니라 공동체로서 교회를 둘러싼 모든 문제를 풀어가기 위한 해결점을 찾을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모든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능력을 온전히 믿는 믿음, 예수 안에서 경험하는 체험의 신앙을 가진 성도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가지고 있는가를 먼저 확인하라는 말입니다.
앞서 공자가 향원이라는 짝퉁 학자를 싫어했던 것처럼 예수님도 짝퉁을 싫어하셨습니다. 예수는 마13:24-30에서 가라지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추수 때에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성경에서 보는 짝퉁의 원조는 사탄, 곧 마귀입니다. 사탄이 짝퉁인 것은 사탄이 거짓의 아비로서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기 때문인데(고후11:14, 요8:44), 예수가 이땅에 오신 목적은 바로 이 짝퉁 사탄의 일을 멸하러 오신 것이기도 합니다. (요일3:8)
성경을 보면 여러가지 짝퉁이 등장합니다. 요일 4:1에는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라고 하여 거짓 선지자, 고후 11:13에는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거짓 사도’, 마7:15에는 ‘노략질하는 거짓 예언자’, 벧후2:1에는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거짓 선생’이 나옵니다. 또 마24:24에는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게하는 거짓 메시야’가 그리고 갈 2:4에는 ‘가만히 들어와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하는 거짓 형제들’이 나옵니다.
오늘날과 같은 마지막 시대 끝자락의 때에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은사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영분별의 은사입니다. 오늘의 시대는 구약의 사사시대와 같은 혼란의 시대, 무질서의 시대, 불신과 배신과 반목의 시대, 곳곳에 거짓이 판을 치는 시대, 마구잡이가 범람하는 시대입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조차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분별하기가 무척 어려운 시대가 바로 오늘의 시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믿는 성삼위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따라 대장되시는 예수님을 따라 마귀를 대적하는 길에 모두 함께 나서야 합니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4:7)고 성경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선진국이라고 해서 짝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도를 넘거나 사회문제가 될 만큼 심한것이 아닙니다. 온통 짝퉁이 난무하는 현상은 대체로 후진국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입니다. 진정한 명품은 사물자체가 자기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가치이자 실질적인 사용가치를 웃도는 아우라를 지닌 물건을 일컫는 말입니다. 오래 숙성된 브랜드의 이념 속에서 세대를 뛰어 넘어 자신만의 향기와 가치를 일관되게 갖는 물건입니다. 값만 비싸서 명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대물림 할 수 있는 질이 보증되고, 쓰면 쓸수록 빛를 발하는 것, 그리고 쓰는 사람에 의해서 만든 사람의 마음이 이해되는 하나의 예술품, 그것이 바로 명품입니다. 이것이 명품에 대한 정의라고 할 때 예수님은 제자인 동시에 성도인 우리가 이 땅의 명품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당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너희 빛을 사람앞에 비취게 하여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5:16말씀입니다.
믿음의 공동체를 살다 보면 조용히 자신의 자리에서 드러나지 않게 헌신하며, 믿음의 형제들을 굳게 세우며, 자신의 이름대신 하늘의 소망을 쌓아가는 명품 성도를 가끔 만날 수 있어서 험한 세상에서 큰 위로와 힘을 얻을 때가 있는 반며 저마다 큰 목소리로 세리의 기를 죽이던 바리새인이나 서기관과 같은 이중인격을 지닌 짝퉁성도들 때문에 마음으로 한없이 낙담되어 속으로 한없이 되새김의 소리를 지르곤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개인적으로 고난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개인적으로 부흥을 사모하여 간구합니까? 그 때 우리는 자신을 조용히 돌아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쫓는 믿음 안에서 굳게 서 있는지 자신을 확증해 보아야 합니다. 공동체로서 교회가 부흥하기르 소원한다면 교회가 명품 공동체로서 믿지 않는 이들에게 빛을 발하는 사명을 감당하며 살고 있는지 확증해 보여야 합니다.
명품을 요란스럽게 광고하지 않습니다. 명품의 상표는 되도록 작게 표시해서 잘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명품 그리스도인은 나대지 않습니다. 조용합니다. 그래도 아는 사람은 다 압니다. ‘반짝이는 것은이 다 금이 아니듯’ 예수 믿는다고 다 명품 그리스도인이 아닌 현실 속에서 ‘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주기도문의 마지막 구절로 말씀을 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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