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들이 떠난 숲은 적막하다고 했습니다. 언젠가는 어차피 독립함으로 헤어져야 할 아이들이지만 지난 20년을 넘게 키운 정이, 한 식구로 같이 살아 온 정이 아이들의 얼굴을 문득 떠 올리게 하고, 또 곁에 두고 부대끼고 싶은 생각이 들게 합니다. 흔히들 이웃사촌이 먼 식구보다는 낫다고들 하는데 정말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기관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교회와 가정입니다. 특히 가정은 하나님이 만드신 작품인 동시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귀한 선물로 모든 행복의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가정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오늘은 가정을 이루게 하는 가족을 생각해 보는 가운데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들의 삶 가운데 계시한 것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으면 다양한 사람들과의 관계로 인한 수많은 일들을 볼 수 있는데 그 가운데는 이웃이기 때문에 벌어질 수 밖에 없는 일들도 있고, 또 가족이기 때문에 생기는 일들도 있습니다.
먼저 이웃이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출애굽기 3장, 호렙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고 40년동안 출애굽 이스라엘 백성을 이끈 모세의 눈물겨운 역할은 우리 모두에게 새삼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수많은 비방과 모반사건을 겪었던 모세, 백성을 위해 중보했던 모세에게 믿음없는 백성들이 던진 돌에 맞아 죽을 뻔한 일이 발생합니다. 이 원망과 반역의 사건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진멸하려고 하셨으나 모세는 다시 하나님께 중보하여 그들의 진멸을 막게 되었지만백성들은 그 죄의 결과로 광야 길을 40년 동안이나 방황하게 되었습니다. 민13:1-14:10의 이야기입니다.
12지파를 대표한 12명의 정탐꾼 가운데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10명의 정탐꾼들이 가나안 땅에서 본 신장이 장대한 네피림의 후손 아낙 자손을 거론하며 가나안 땅을 악평하자 백성들이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울며 불며 난리 치며 모세를 돌로 치려하였습니다. 지금 가나안 초입에 당도하기까지 백성들은 바로에게 내렸던10가지 재앙, 홍해사건, 마라의 쓴 물 사건, 만나와 메추라기 사건 등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보이신 기적, 그리고 백성을 위한 모세의 눈물어린 수없는 중보를 보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정탐꾼들의 보고를 듣자 마자 앞의 일들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모세를 돌로 쳐죽이겠다고 저 난리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웃입니다.
다윗은 또 어떻습니까?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 다윗만큼 회자되는 인물도 없습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백성들의 이 노래 하나 때문에 장인인 사울에게 쫓겨 원치않는 광야를 헤매게 된 다윗이 아둘람 굴에 있을 때 그 소문을 듣고 한 사람 두사람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4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여 들어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소위 아둘람공동체라 말합니다.
‘환난 당한 모든 자 ,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삼상22:2) 다윗은 자연스럽게 우두머리가 되었으며, 그 400명은 위대한 다윗 왕국을 이루어 내는 일등 공신들이 되었습니다. 쫓기고 원통한 일 당한 사람들 중에서 군대 장관이 나오고 대제사장이 나왔습니다. 다윗의 충신들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왕국을 이룬 일군들이 다 아둘람 공동체에서 나온 것입니다. 아둘람공동체는 비참한 광야의 삶을 살았지만 비전을 가진 공동체로 언급되고 있는데 이 공동체를 이끌던 다윗도 사람들에게 돌에 맞아 죽을 뻔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전투에 참가했다가 블레셋 방백들에 의해 배척을 받은 다윗과 다윗의 용사가 그들의 거처 시글락으로 돌아오니 시글락은 아말렉의 침공으로 이미 불탔고, 다윗 용사들의 아내와 자녀들은 사로잡혀갔습니다. 이에 다윗과 백성들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 높여 울었는데 이 때 백성들이 마음의 슬픔을 억제하지 못해 다윗을 돌로 치려 하였습니다. 얼마나 처지가 급하고 한심했는지 다윗이 군급했다고 했습니다.
모세가 누구고, 다윗이 누굽니까? 백성들을 위해 울고, 백성들을 위해 몸바쳤고,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께 밤낮으로 기도한 우리들의 영웅이지만 지금 벌어지는 일이 지난 일을 새까맣게 잊게 합니다. 아무리 상황이 어렵다고한들 어떻게 돌로 쳐 죽이려 합니까? 이게 이웃의 한계입니다. 지난 일은 관계 없습니다. 지금 벌어진 일만 가지고 판단하고 대접하는 것이 바로 세상인심입니다.
이번에는 가족이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일들을 보려고 합니다. 그돌라오멜왕과 그 동맹이 소돔과 고모라땅을 침략했습니다. 이 때 롯의 재물이 빼앗기고 롯의 일가가 사로잡혀 갔습니다. 롯이 누구입니까? 롯은 하란의 아들로 데라의 손자이자 아브람, 곧 아브라함의 조카였습니다. 롯과 아브라함의 소유가 많아져 함께 할 수 없게 되자 아브라함이 동이건 서이건 ‘네 좋은대로 땅을 택해 떠나라’고 하자 아직 여호와의 동산같고 애굽 땅 같던 소돔과 고모라 땅이 들어 있던 요단 들을 보고는 한마디도 작은 아버지인 아브람의 생각은 물어 보지도 않은 채 냉큼 그 쪽으로 식솔들을 몰아 떠나 갔습니다. 참으로 싹수없는 위인이었습니다.
그랬던 롯이 그돌라오멜왕과 그 동맹군이 소돔과 고모라 땅을 침략했을 때 모든 재물을 빼앗기고 그의 식솔 모두가 사로잡혀 갔습니다. (창14:11-12) 이 소식을 들은 아브람은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자 318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단숨에 쫓아갔고, 밤을 타서 그들을 쳐서 물리치고는 빼았겼던 재물과 조카 롯과 가솔들을 다 찾아 왔습니다.
무엇이 아브람을 움직였습니까? 바로 피붙이의 정입니다. 아브람인들 조카 롯에 대해 괘씸한 마음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그 괘씸한 마음이 문제가 될 수 없었습니다. 피붙이인 조카, 그 식솔들을 구하는 것이 제일 급한 일이었습니다. 그 일이 조카 롯에 대한 모든 감정을 덮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가족이고, 가족의 정입이다.
유다 땅에 심한 기근이 들자 인근 이방 땅 모압으로 잠시 피난하여 집을 떠났던 엘리멜렉 일가가 패가 직전에 이르렀습니다.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그 두 아들마저 이방 땅에서 죽어버렸습니다. 이에 시어미 나오미가 두 자부에게 각각 본가로 돌아가라 권고했습니다.(룻1:7) 룻의 동서인 오르바는 시어미의 말대로 본가로 갔지만 룻은 자신의 결심을 말합니다.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라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룻1:16-17) 왜 그랬습니까? 잠시나마 부부로 산 그 정때문에, 그 남편을 낳고 기른 시어미에 대한 가족으로서의 정때문에 그렇게 했습니다. 다행인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나오미 가정에 있었기에 보아스를 만났고 그 가계를 통해서 예수가 탄생되는 영광이 그 가문에 있었습니다.
육신의 옷을 입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오셨던 예수는 이 사실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데 있어서는 모든 일꾼들이 ‘이웃’으로는 부족하고 그 대신 ‘가족’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는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이적과 표적을 보이셨는데 그 처음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든 사건입니다. 혼인잔치가 무엇입니까? 혼인잔치는 서로 남남이었던 남녀를 한 몸으로 이루게 하고, 한 가정을 이루게 하는 예식입니다. 예수와 성도가 부부가 되어야 하는 것을 보여 줍니다. 신랑은 예수요, 성도는 바로 신부입니다. 이후에도 예수는 여러차례 믿는 자들의 관계가 가족의 관계가 되어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모친과 동생이 당신께 말하려고 왔다’고 했을 때(마12:49) 예수는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마12:50)고 하셨습니다. 울타리가 짓는 한계를 뛰어 넘는 말씀이었습니다.
육신으로 맺어진 가족의 한계를 넘어 보편적 범주로 가족의 한계를 더욱 확장시킨 말씀은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신 채 하신 말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요19:26-27) 제자들은 어머니를 극진히 모셨을 것이고, 어머니 또한 제자들을 배 아파 낳은 자식 이상으로 지극한 정성으로 사랑하셨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는 믿는 이들의 관계를 끊임없이 가정 속으로, 그리고 가족의 관계 속으로 몰아 가고 계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우리가 성찬 예식에 자주 듣고 보는 말씀입니다. ‘ 이것은 내 살이요 이 잔은 내 피라' 살과 피는 바로 가족을 가족되게 하고, 그 가족들로 하여금 가정으로 머물게 하는 근본이고 힘입니다. 예수의 살을 나누고, 예수의 피를 나눈 믿는 이들은 비록 육적으로는 남남이지만 영적으로는 가족으로, 가정으로 살아야 하는 존재들임을 눈으로 보게 하시며 주신 말씀이 바로 오늘의 말씀입니다.
마지막 고것 하나 때문에 손가락질하고 정죄하는 이웃이 아니라 마지막 고것 하나 때문에 지나간 모든 것이 잊혀지고 덮어지는 가족으로 살아야 합니다. 서로가 너무나 가까운 존재여서 나도 모르게 문득 문득 생각나는 존재들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너와 나 사이에 쌓은 미운정, 고운정이 그렇게 만듭니다.
사랑은 외모로 말로 몸짓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지만 정은 조용히 저 깊은 땅이 지닌 열처럼 나도 모르게 마음의 맨 밑바닥에서 타오르는 것입니다. 백년해로하는 부부는 깝작거리는 사랑이 아니라 겉으로는 얼음장같지만 그 밑으로는 언제나 영상 4도의 물이 흐르는 것처럼 미지근하고도 은근한 정으로 사는 것입니다.
가정의 달을 맞아 다시한번 우리의 가정을 돌아보고 가족으로서의 우리 교회를 더듬어 보는 귀한 시간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감사합니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시고 우리를 동물처럼 떼로 살지 않고 가족으로 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사람마다 가정을 일구고 가정을 통해서 행복을 꿈꾸지만 많은 가정들이, 그리고 교회를 포함하여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공동체는 어느 것이건 조금 부족한 2%때문에 고통하고 갈등합니다.
원하고 바라옵기는 우리의 가정이, 우리의 공동체가 더 큰 사랑과 정으로 조금 부족한 2%가 채워 지게 하시고, 조금 부족한 것 때문에 생기는 모든 고통과 갈등이 덮어지게 하시고 녹아지게 하시옵소서. 사랑의 계절 5월에 우리의 가정을 다시 한번 생각하고, 우리의 교회를 다시한번 돌아보는 귀한 시간들을 허락하시옵소서.
믿사옵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기관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교회와 가정입니다. 특히 가정은 하나님이 만드신 작품인 동시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귀한 선물로 모든 행복의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가정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오늘은 가정을 이루게 하는 가족을 생각해 보는 가운데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들의 삶 가운데 계시한 것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으면 다양한 사람들과의 관계로 인한 수많은 일들을 볼 수 있는데 그 가운데는 이웃이기 때문에 벌어질 수 밖에 없는 일들도 있고, 또 가족이기 때문에 생기는 일들도 있습니다.
먼저 이웃이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출애굽기 3장, 호렙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고 40년동안 출애굽 이스라엘 백성을 이끈 모세의 눈물겨운 역할은 우리 모두에게 새삼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수많은 비방과 모반사건을 겪었던 모세, 백성을 위해 중보했던 모세에게 믿음없는 백성들이 던진 돌에 맞아 죽을 뻔한 일이 발생합니다. 이 원망과 반역의 사건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진멸하려고 하셨으나 모세는 다시 하나님께 중보하여 그들의 진멸을 막게 되었지만백성들은 그 죄의 결과로 광야 길을 40년 동안이나 방황하게 되었습니다. 민13:1-14:10의 이야기입니다.
12지파를 대표한 12명의 정탐꾼 가운데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10명의 정탐꾼들이 가나안 땅에서 본 신장이 장대한 네피림의 후손 아낙 자손을 거론하며 가나안 땅을 악평하자 백성들이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울며 불며 난리 치며 모세를 돌로 치려하였습니다. 지금 가나안 초입에 당도하기까지 백성들은 바로에게 내렸던10가지 재앙, 홍해사건, 마라의 쓴 물 사건, 만나와 메추라기 사건 등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보이신 기적, 그리고 백성을 위한 모세의 눈물어린 수없는 중보를 보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정탐꾼들의 보고를 듣자 마자 앞의 일들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모세를 돌로 쳐죽이겠다고 저 난리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웃입니다.
다윗은 또 어떻습니까?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 다윗만큼 회자되는 인물도 없습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백성들의 이 노래 하나 때문에 장인인 사울에게 쫓겨 원치않는 광야를 헤매게 된 다윗이 아둘람 굴에 있을 때 그 소문을 듣고 한 사람 두사람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4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여 들어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소위 아둘람공동체라 말합니다.
‘환난 당한 모든 자 ,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삼상22:2) 다윗은 자연스럽게 우두머리가 되었으며, 그 400명은 위대한 다윗 왕국을 이루어 내는 일등 공신들이 되었습니다. 쫓기고 원통한 일 당한 사람들 중에서 군대 장관이 나오고 대제사장이 나왔습니다. 다윗의 충신들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왕국을 이룬 일군들이 다 아둘람 공동체에서 나온 것입니다. 아둘람공동체는 비참한 광야의 삶을 살았지만 비전을 가진 공동체로 언급되고 있는데 이 공동체를 이끌던 다윗도 사람들에게 돌에 맞아 죽을 뻔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전투에 참가했다가 블레셋 방백들에 의해 배척을 받은 다윗과 다윗의 용사가 그들의 거처 시글락으로 돌아오니 시글락은 아말렉의 침공으로 이미 불탔고, 다윗 용사들의 아내와 자녀들은 사로잡혀갔습니다. 이에 다윗과 백성들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 높여 울었는데 이 때 백성들이 마음의 슬픔을 억제하지 못해 다윗을 돌로 치려 하였습니다. 얼마나 처지가 급하고 한심했는지 다윗이 군급했다고 했습니다.
모세가 누구고, 다윗이 누굽니까? 백성들을 위해 울고, 백성들을 위해 몸바쳤고,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께 밤낮으로 기도한 우리들의 영웅이지만 지금 벌어지는 일이 지난 일을 새까맣게 잊게 합니다. 아무리 상황이 어렵다고한들 어떻게 돌로 쳐 죽이려 합니까? 이게 이웃의 한계입니다. 지난 일은 관계 없습니다. 지금 벌어진 일만 가지고 판단하고 대접하는 것이 바로 세상인심입니다.
이번에는 가족이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일들을 보려고 합니다. 그돌라오멜왕과 그 동맹이 소돔과 고모라땅을 침략했습니다. 이 때 롯의 재물이 빼앗기고 롯의 일가가 사로잡혀 갔습니다. 롯이 누구입니까? 롯은 하란의 아들로 데라의 손자이자 아브람, 곧 아브라함의 조카였습니다. 롯과 아브라함의 소유가 많아져 함께 할 수 없게 되자 아브라함이 동이건 서이건 ‘네 좋은대로 땅을 택해 떠나라’고 하자 아직 여호와의 동산같고 애굽 땅 같던 소돔과 고모라 땅이 들어 있던 요단 들을 보고는 한마디도 작은 아버지인 아브람의 생각은 물어 보지도 않은 채 냉큼 그 쪽으로 식솔들을 몰아 떠나 갔습니다. 참으로 싹수없는 위인이었습니다.
그랬던 롯이 그돌라오멜왕과 그 동맹군이 소돔과 고모라 땅을 침략했을 때 모든 재물을 빼앗기고 그의 식솔 모두가 사로잡혀 갔습니다. (창14:11-12) 이 소식을 들은 아브람은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자 318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단숨에 쫓아갔고, 밤을 타서 그들을 쳐서 물리치고는 빼았겼던 재물과 조카 롯과 가솔들을 다 찾아 왔습니다.
무엇이 아브람을 움직였습니까? 바로 피붙이의 정입니다. 아브람인들 조카 롯에 대해 괘씸한 마음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그 괘씸한 마음이 문제가 될 수 없었습니다. 피붙이인 조카, 그 식솔들을 구하는 것이 제일 급한 일이었습니다. 그 일이 조카 롯에 대한 모든 감정을 덮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가족이고, 가족의 정입이다.
유다 땅에 심한 기근이 들자 인근 이방 땅 모압으로 잠시 피난하여 집을 떠났던 엘리멜렉 일가가 패가 직전에 이르렀습니다.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그 두 아들마저 이방 땅에서 죽어버렸습니다. 이에 시어미 나오미가 두 자부에게 각각 본가로 돌아가라 권고했습니다.(룻1:7) 룻의 동서인 오르바는 시어미의 말대로 본가로 갔지만 룻은 자신의 결심을 말합니다.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라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룻1:16-17) 왜 그랬습니까? 잠시나마 부부로 산 그 정때문에, 그 남편을 낳고 기른 시어미에 대한 가족으로서의 정때문에 그렇게 했습니다. 다행인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나오미 가정에 있었기에 보아스를 만났고 그 가계를 통해서 예수가 탄생되는 영광이 그 가문에 있었습니다.
육신의 옷을 입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오셨던 예수는 이 사실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데 있어서는 모든 일꾼들이 ‘이웃’으로는 부족하고 그 대신 ‘가족’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는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이적과 표적을 보이셨는데 그 처음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든 사건입니다. 혼인잔치가 무엇입니까? 혼인잔치는 서로 남남이었던 남녀를 한 몸으로 이루게 하고, 한 가정을 이루게 하는 예식입니다. 예수와 성도가 부부가 되어야 하는 것을 보여 줍니다. 신랑은 예수요, 성도는 바로 신부입니다. 이후에도 예수는 여러차례 믿는 자들의 관계가 가족의 관계가 되어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모친과 동생이 당신께 말하려고 왔다’고 했을 때(마12:49) 예수는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마12:50)고 하셨습니다. 울타리가 짓는 한계를 뛰어 넘는 말씀이었습니다.
육신으로 맺어진 가족의 한계를 넘어 보편적 범주로 가족의 한계를 더욱 확장시킨 말씀은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신 채 하신 말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요19:26-27) 제자들은 어머니를 극진히 모셨을 것이고, 어머니 또한 제자들을 배 아파 낳은 자식 이상으로 지극한 정성으로 사랑하셨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는 믿는 이들의 관계를 끊임없이 가정 속으로, 그리고 가족의 관계 속으로 몰아 가고 계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우리가 성찬 예식에 자주 듣고 보는 말씀입니다. ‘ 이것은 내 살이요 이 잔은 내 피라' 살과 피는 바로 가족을 가족되게 하고, 그 가족들로 하여금 가정으로 머물게 하는 근본이고 힘입니다. 예수의 살을 나누고, 예수의 피를 나눈 믿는 이들은 비록 육적으로는 남남이지만 영적으로는 가족으로, 가정으로 살아야 하는 존재들임을 눈으로 보게 하시며 주신 말씀이 바로 오늘의 말씀입니다.
마지막 고것 하나 때문에 손가락질하고 정죄하는 이웃이 아니라 마지막 고것 하나 때문에 지나간 모든 것이 잊혀지고 덮어지는 가족으로 살아야 합니다. 서로가 너무나 가까운 존재여서 나도 모르게 문득 문득 생각나는 존재들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너와 나 사이에 쌓은 미운정, 고운정이 그렇게 만듭니다.
사랑은 외모로 말로 몸짓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지만 정은 조용히 저 깊은 땅이 지닌 열처럼 나도 모르게 마음의 맨 밑바닥에서 타오르는 것입니다. 백년해로하는 부부는 깝작거리는 사랑이 아니라 겉으로는 얼음장같지만 그 밑으로는 언제나 영상 4도의 물이 흐르는 것처럼 미지근하고도 은근한 정으로 사는 것입니다.
가정의 달을 맞아 다시한번 우리의 가정을 돌아보고 가족으로서의 우리 교회를 더듬어 보는 귀한 시간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감사합니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시고 우리를 동물처럼 떼로 살지 않고 가족으로 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사람마다 가정을 일구고 가정을 통해서 행복을 꿈꾸지만 많은 가정들이, 그리고 교회를 포함하여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공동체는 어느 것이건 조금 부족한 2%때문에 고통하고 갈등합니다.
원하고 바라옵기는 우리의 가정이, 우리의 공동체가 더 큰 사랑과 정으로 조금 부족한 2%가 채워 지게 하시고, 조금 부족한 것 때문에 생기는 모든 고통과 갈등이 덮어지게 하시고 녹아지게 하시옵소서. 사랑의 계절 5월에 우리의 가정을 다시 한번 생각하고, 우리의 교회를 다시한번 돌아보는 귀한 시간들을 허락하시옵소서.
믿사옵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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