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통해 들어서 참 좋은 단어들이 있습니다. ‘은혜, 은사, 평화, 선물, 사랑’이라는 단어 같은 것들인데 우리는 특히 ‘복, 행복’이라는 단어를 참으로 좋아합니다. 복을 싫어하고 행복해지기를 마다 할 사람은 없을 것이지만 지나치게 복 복, 행복 행복하면 속물 같아 보일 것 같고, 지나친 행복 추구 역시 비 기독교적일 것 같아서 우리에게 끊임 없이 가치 혼돈을 가져다 주는 것이 복이나 행복입니다.
오늘은 행복이라는 주제에 대해 묵상하는 가운데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행복을 말하려면 먼저 세상이 말하는 행복이 무엇인지부터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래야 행복이라는 파랑새를 찾으러 다니다 평생을 다 허비해 버리는 안타까운 생을 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행복이란 무엇입니까? 행복은 특정한 시기에 느끼는 긍정적인 삶의 감정입니다. 행복의 정의를 이렇게 말하면 만족, 쾌락, 즐거움, 긍지, 자아실현, 지복 등과 같은 것도 결국은 행복이라는 말과 별반 다르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의 행복은 물질이나 요행으로 얻어지는 것이라고 해도 상관이 없고, 심지어는 상대가 무너져야 내가 이기는 것과 같이 타인의 불행을 전제로 하는 것이라고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정의로 말하는 행복은 과거와 현재와의 비교, 나와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서 찾을 수 있는 행복이라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연봉이 20만불인데 나 혼자만 15만불을 받는 직장과 다른 사람은 다 8만불을 연봉으로 받는데 나 혼자만 10만불의 연봉을 받을 수 있는 직장이 있다면 우리는 어떤 직장을 선택해야 합니까? 결정이 쉽지 않습니다. 계산상으로는 모든 사람이 15만불의 연봉을 받을 수 있는 곳을 선택할 것 같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자들가운데 가난한 사람으로 남느니 차라리 5만달러를 포기하는 길을 택함으로써 만족스러운 삶, 행복한 삶을 살고 싶어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심리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껏 열댓 평 아파트에서 소형차를 겨우 면한 승용차를 타며 알콩 달콩 행복한 삶을 살던 가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앞 동 50평 아파트에 대형 승용차를 타는, 고등학교 때 나보다 훨씬 못했던 친구가 이사를 왔습니다. 그 때부터 내 남편이 한심해 보이고, 그 때부터 그 집안에 부부싸움이 심심치 않게 되었다는 우스개아닌 우스개 소리가 있습니다. 이게 바로 욕구가 만족되어 부족함이나 불안감을 느끼지 않고 편안해 하는 심리상태를 행복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세상에서 찾는 행복이라는 것이 대부분 일시적인 것들입니다. 모든 것을 다 가졌던 솔로몬이 인생의 마지막 때에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인생의 회한은 바로 세상이 주는 행복은 일시적인 행복, 그래서 작은 행복인 것을 바로 알라는 교훈입니다. 세상이 주는 작은 행복이란 갈증을 풀어주는 시원한 물 한잔, 유쾌한 자리에서 먹는 맛있는 식사 한끼, 기대하지 않던 반가운 친구와의 해후, 즐거움, 기쁨, 쾌활함, 유쾌함 같은 것들 입니다. 그 때는 대단했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면 바로 덤덤해 지는 것, 그런 행복이 바로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작은 행복입니다. 조금 크다고 해 보아야 도취, 열광, 환희, 지복, 충일, 승리, 감격, 황홀, 몰아 이런 것들입니다.
요즘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온갖 중독에 빠져 삽니까? 그것은 사람들이 세상이 주는 작은 행복 찾기에 모든 인생을 다 걸기 때문입니다. 집에서 젖먹이가 굶어 죽는 줄 도 모르고 밖에서 컴퓨터 게임에 몰두 했던 비정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찾던 행복이 바로 세상이 주는 짜릿한 작은 행복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도박장을 찾고, 로또 놀이에 혈안이 되어 갑니까? 그것은 잃어 보아야 별것 아닌 것 같고, 따기만 따면 대박이라는 이루어지지 않을 황홀감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세상에서 찾는 행복은 소유에 있습니다. 패션모델인 동시에 가수인 힐튼가의 상속녀 패리스 힐튼이 끊이지 않고 구설수에 오르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자가용 비행기를 자랑하더니 또 자가용 요트를 자랑하는 모습이 매스콤에 실리면서 구설수에 올랐습니다.
패리스가 구설수에 오르거나 말거나 가끔은 ‘웬 복에!’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이게 대부분의 솔직한 심정이 아닙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자꾸만 더 많이 가지려고 애씁니다. 미국에서 비지니스 하나가지고 열심히 살면 그냥 저냥 살만 합니다. 그런데 비지니스 한 개 더하면 규모의 경제라고 좀 더 남을 것 같아서, 그러면 좀 더 나은 삶, 행복한 삶을 살 것 같아서 무리해서 한 개 더 벌렸다가 낭패보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봅니다. ‘네가 하니까 그런 거지, 내가 하면 잘 할 것’같은 그 욕심을 떨쳐 버리지 못해 빼도 박도 못하는 무리수의 삶을 사는 인생이 제 주변에도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살펴 본 세가지의 행복의 특장에서 보게 되는 행복은 큰 행복, 긴 행복, 참 행복이 아닙니다. 음식에 넣는 양념과 같아서 살면서 가끔은, 조금씩은 있어야 될 것들이지만 그것 때문에 우리의 모든 인생을 걸만한 행복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한글 성경을 기준으로 보면 ‘복’이라는 단어는 성경 전체에 574번이나 나오는데 ‘행복’이라는 단어는 구약 신명기에 두 번, 오늘 읽은 로마서에 두 번, 이렇게 네 번만 나오는 것을 보면 복받기는 쉬워도 행복해지기는 그만큼 어려운 것입니다. 모든 행복한 사람이나 가정이 다 고만 고만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반해 불행한 사람이나 불행한 가정의 원인이 되는 죄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오늘 본문은 우리의 온갖 죄, 우리 가정의 온갖 죄에도 불구하고 행복해 지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확실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실 사울 왕과 다윗을 비교해서 보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지 인간 다윗을 개인적으로 놓고 보면 다윗만큼 파란 만장한 인생을 산 사람도 드믑니다. 사무엘이 이새의 집안을 찾았을 때만 해도 다윗은 집안의 말째로 들판에서 양떼나 돌보던 집안의 천덕꾸러기 였고, 사울에 의해 부름을 받았을 때 잠깐 좋은 시절을 제외하고는 ‘천천 만만’사건 이후로 광야에서 방황하는 오랜 망명의 시절을 겪어야 했고, 왕이 되어서도 자신의 권위를 위협하는 수 많은 무리들 때문에 수도 예루살렘에는 들어오지도 못하고 헤브론 땅에서 7년이나 와신상담해야 했으며, 이후에는 정략적으로 혼인한 수많은 여성들 사이에서 생 고생하는 인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남의 떡이’어떻다고 공연히 저녁 나절에 이웃집 여자 밧세바를 넘보았다가 그 충직한 부하 우리아를 죽게 만들어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었으며, 일찌기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생긴 자식을 잃어 버리더니 늙으막에는 자식 압살롬의 반역으로 씻을 수 없는 치욕의 삶을 산 것도 모자라 못된 자식도 자식이어늘 압살롬, 그 자식을 앞서 보내는 비통함을 겪는 등 정말 복잡하고 고단한 인생을 산 사람이 다윗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오늘 로마서에서 다윗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바울이 다윗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한 것은 지금 우리가 세상에서 얻어 가지고자 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다만 이 격랑과도 같은 인생의 삶속에서 자신이 지었던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그래서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은 축복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행복은 돈과 권력과 승리와 쾌락과 명에에 있지만 다윗은 그것이 참 행복을 주는 근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처절한 삶 가운데에서 저질렀던 수 많은 죄를 통해 깨달았던 진리였습니다. 사람의 행복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땅에서는 지옥의 아픔을 겪는 삶을 살아도 그를 통해서 내 죄를 깨닫고, 그래서 예수를 만나고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다는 것 이상의 복은 없으며, 그 복을 깨달아 누리고 사는 사람은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인 것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지위로는 가까이 할 수 없는 분이 나와 함께 해주시는 교제를 누리며, 무엇이든 하실 수 있고 주실 수 있는 분이 아무 대가 없이 내 죄를 사하시고, 수없이 짓는 자범죄의 허물을 덮어 주시고,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삶을 사는 인생 이상으로 행복한 사람은 없습니다. 다윗은 바로 이 행복을 깨달았고, 이 행복을 누리면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예배하는 우리 모두가 다윗과 똑같은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행복은 소유에 있지 않습니다. 행복은 주신 복을 누리는 삶에 있습니다. 얼마전 월드컵 축구가 끝났습니다. 축구 경기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대리 만족을 누릴 수 있었고, 그래서 삶의 스트레스도 얼마간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월드컵 참가국 선수들의 기술과 기량이 참으로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선수들의 기술이 아무리 훌륭해도 상대가 있는 한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선수 한 사람이 공을 드리볼 할 수 있는 시간은 고작 몇 초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 말은 혼자 공을 잘 다룬다고 해서 경기에서 승리하기는 어렵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제공권을 장악하고 지상의 공간을 잘 활용하는 팀이 승리의 확률이 높은 팀입니다. ‘드리볼’하는 재주는 공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간을 활용하는 재주는 공을 즐기고 누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행복은 더 많이 소유하는데 있지 않고 소유한 복을 누리는 데 있습니다.
세상이 대박 대박한다고 우리 믿는 이들도 대박 대박해서는 안됩니다. 대박의 은혜도 때를 따라서는 필요할 터이지만 그 보다는 먼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 온 인생들에게 주시는 나날의 작은 은혜를 새록 새록 느끼면서 주신 복, 가진 복을 누리고 사는 사람이 오히려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크고 긴 참 행복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회개하고 구원받은 삶을 사는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일상의 삶에서 범하는 수 없는 자범죄의 허물을 덮음 받는 삶을 사는 우리는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날마다 주시는 작은 은혜에도 감사하며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귀한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닫는 우리 모두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라는 말씀이 이 아침에는 ‘복 타령 좀 그만하거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립니다. 돌아보면 광야 길 40년을 먹이고 입히신 하나님이신 것을 알겠건만 앞을 볼 때면 그저 깜깜하기만 우리의 믿음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앞 못보는 사람이 눈을 뜨고, 죽을 병에서 일어나 앉았는 것을 기적이요, 은혜요, 하나님과 함께하는 행복이라 생각케 마시고 내 힘으로 숨쉬며 하루하루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이 내게 베푸신 일용의 은혜인 것을 알게 하시고, 그것을 누리며 사는 것이 행복인 것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하옵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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