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예전에는 요리연구가라고 하면 맛있는 음식, 귀한 음식을 원전대로 만들어 내면 그것으로 족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음식 본연의 맛을 그대로 표현해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음식을 어떤 그릇에 어떤 모습으로 담아내느냐하는 문제는 음식의 미학을 더해주는 또 하나의 창작 분야가 되어서 이들 새로운 직종을 담당하는 전문가를 푸드 스타일리스트(food stylist)라고 부릅니다.
오늘날과 같은 무한경쟁의 시대에서, 특별히 경기의 침체로 인하여 청년실업이 증가하는 때에는 ‘나’라는 존재를 어떻게 표현해 PR하느냐의 문제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로 직결됩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물론이고 요즘세대 30%나 되는 남자들이 취업만 된다면 기꺼이 성형 수술도 받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라는 존재를 전략적, 전술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전문 학원에 등록하여 이력서를 쓰고,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는 방법을 배우고, 취업 면접에 대처하는 훈련을 하는 것이 하나의 추세가 된 것은 또 하나의 포장기술을 위한 노력입니다.
2,000년전 바울은 어떻게 자기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까? 오늘은 바울의 자기소개를 통해서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사도행전을 읽으면 바울이 세번째 전도여행 도중에 고린도라는 도시에 잠깐 머물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때는 겨울이었는데 바울이 고린도에서 여행을 멈춘 것은 단순히 휴식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여행보다 더 중요한 일 중의 하나로 로마 교회에 편지를 쓰는 일 때문이었습니다. 잘 아는 것처럼 바울은 로마교회에 무척 가보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길이 자꾸만 막혀 갈 수 없었습니다. 자꾸만 로마가 눈에 밟혔던 바울이 침침해진 눈 때문에 개인 비서 더디오를 옆에 두고 구술로 작성한 편지, 그리고 집사 뵈뵈의 손에 들려 로마에 있는 교회에 전해 주도록 한 편지가 바로 복음서 중의 복음서 로마서입니다.
로마서가 당시 환락의 도시, 음란의 도시 고린도에서 쓰여진 복음서, 그리고 이미 교회가 세워진 로마교회에 보내기 위해 쓰여진 복음의 편지라는 것은 물질과 쾌락 만능의 시대에 어떻게든 자신을 더 드러내 보여 세상적 성공을 쟁취하려는 이 세대에, 그리고 온 천지에 교회가 편만한 이 세대에 큰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포함해서 로마서 1장의 처음 일곱 절은 고대 라틴에서 편지를 쓸 때 사용하는 서론 같은 부분이지만 특히 로마서에서 편지를 보내는 사람, 즉 바울 자신에 대한 정체가 바울의 다른 편지보다 자세하게 되어 있는 것은 빠른 시일 안에 로마교회를 방문하기 원했던 바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소개하는 일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먼저 바울은 아직 한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는 로마 교인들에게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 즉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편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나를 올려 놓지 못해 안달인 세상입니다. 어차피 자신을 내세우지 못할 바에야 중간이나 하자고 가만히 있을 것이지 나를 ‘종’ 곧, 세상에서 ’졸’인 사람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덜 된 사람이 세상 천지에 어디 있을 것입니까? 그런데 바울이 지금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스스로도, 그리고 세상으로부터도 그렇게 허접하게 대접 받아야 할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빌립보서에서 스스로를 말한 것처럼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빌3:5)인 바울은 당대의 석학이면서 어떻게든 가져 보려고 사람들이 애썼던 로마 시민권을 나면서부터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했던 첫마디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인 것입니다.
종이란 바로 노예를 뜻합니다. 2,000년전의 노예는 과거 우리나라의 노비나 백정 같은 천민이 받았던 대접보다 훨씬 더 비참했습니다. 과거 천민 중의 천민이라고 하던 갓바치들은 그래도 자신의 식솔들을 일구어 살 수 있었지만 로마시대의 노예는 이름도 없고, 생각도 없고, 꿈도 가질 수 없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특히 오늘 바울이 자신을 말한 종, 둘로스(doulos)는 생사여탈권이 주인에게 주어져 있는 존재로 영화 벤허에서 보았던 것처럼 배 밑창에서 노나 저으면서 바같 세상을 마음대로 볼 수 조차없는, 그 가치가 새 한마리 값도 안되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종이란 것이 그런 존재인 것을 아는 바울이 왜 자신을 종이라고 불렀습니까? 우리는 ‘종’ 앞의 ‘그리스도’라는 말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종, 곧 노예였으되 고관 대작의 노예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노예였습니다. 바울은 노예보다 더 비참한 존재가 영원히 죄에 매여 종노릇을 하는 존재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죄에서 나를 자유하게 하신 분이 예수라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았기 때문에 스스로 예수님의 소유가 되기로 한 것입니다. 또 바울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한 것은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는 바울의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을 나타내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의 오랜 희망의 성취인 것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하므로써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야 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내 주인이신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므로 나도 십자가를 지고 따르겠다는 삶의 결단입니다. 나의 생사여탈권을 하나님이신 예수님에게 맡기고 예수님의 종으로 살되 죽든지 살든지 예수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삶을 살겠다는 고백이 바로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바울은 자신을 ‘작은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사울이었던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뒤로 바울이 되었다고 말하지만 야곱이 얍복강에서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 싸워 이긴 뒤로 이스라엘이 된 것과는 경우가 다릅니다. 우리 한국의 유명한 패션가 앙드레 김의 본명은 김봉남입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김봉남’이란 이름보다 ‘ 앙드레 김’이란 이름 쓰기를 더 좋아합니다. 바울도 그렇습니다. ‘사울이라 하는 바울’이라 했습니다. 사울이나 바울이나 다 한 사람의 이름입니다. 사울이라 불러도 되고 바울이라 불러도 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만나고부터는 사울이라는 이름보다 바울이란 이름 쓰기를 더 좋아한 것입니다. ‘사울’과 ‘바울’은 어떻게 다릅니까? ‘사울’은 ‘희망으로 하나님께 구한다’는 뜻의 큰 이름입니다. 어려서부터 똑똑했던 바울은 베냐민 지파의 희망이었으며, 그 집안 전체의 희망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에 합당한 대접을 받으면서 자랐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로마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었던 히브리 민족 중에서 로마의 시민권을 갖게 된 대단한 사람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랬던 그가 이제는 스스로 ‘희망’을 나타내는 큰 이름 대신 ‘작은 자’라는 이름인 바울(Paulos)로 불려지기를 좋아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 빼 놓고는 자신이 자신을 제일 잘 압니다. 사울이 그렇게 자타가 인정하는 출세한 인물로서 했던 일이 무엇입니가? 그것은 스데반을 돌로 쳐죽여 순교자로 만든 것, 목적이 잘못된 까닭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의 뒤를 좇아 다니며 못살게 군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강권하심으로 예수님이 사울을 만나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사울은 그 이름이 ‘못난 자, ‘작은 자’라는 뜻의 ‘바울’로 불려지기를 좋아 했습니다. 바울이 사울의 때에 잘못된 인생을 산 것을 깨달았고, 그 인생이 헛된 것임을 깨달았기에 ‘포기한다’는 뜻을 가진 단어에서 온 ‘파울로스’(paulos), 바울이 되기를 선택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가말리엘의 문하생, 다소 출신, 로마의 시민권자, 유대인이라는 모든 기득권을 배설물로 여기고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했던 자신을 가장 잘 알았기에 스스로를 작은 자로 부르기로 했던 것입니다.
세번째로 작은 자로서 바울은 감당할 수 없는 은혜로 예수 그리스 종으로 붙들림을 받아 사도로 세움 받은 자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부르심을 받은 자,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당시에는 크고 작은 전쟁이 이런 저런 이유로 일어나곤 했습니다. 전쟁이 나면 전면전에 앞서서 대표, 곧 사도를 적진에 보내 분쟁의 원인을 알아 보게 하고 타협하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로 보내진 대표의 수완이 좋으면 전쟁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승리의 소식,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좋은 소식, 유앙겔리온을 전해 주는 사람이 바로 사도입니다. 타협이 안되면 적군의 사도는 죽을 수 밖에 없었고, 그리고 나면 전쟁을 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전쟁에서 사도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반드시 있어야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 일을 위해 그렇게 세워진 또 하나의 존재가 바로 자신인 것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 첫머리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 ‘보냄을 받은 자’, ‘사도’(apostolos)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로마 교회의 뿌리가 바울 자신의 개인적 능력이나 지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사명에 있다는 것을 로마 교회가 바로 보도록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의 믿는 이들은 모두가 만인 제사장, 만인 사도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이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지혜를 갖췄고,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들 각자에게 은사를 허락하시고, 그 은사를 사용하시기 위하여 우리들 각자를 불러 세우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스스로를 사도라고 말하고 있는 이유인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본문에서 종, 작은 자, 사도 이 세가지가 바울이 말한 자기 소개의 모든 것입니다. 바울은 스스로를 종으로 인정하는 가운데 자신이 작은 자임을 받아 들이게 되었고, 종으로 낮아지므로 사도로 세움 받았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세상은 나를 크게 드러내려고 안달이고, 나를 과대 포장하려고 혈안이고, 그것이 나를 소개하는 ‘자기 소개서’의 핵심이지만 바울은 스스로를 낮춰 가장 허접한 존재가 되어 가장 작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붙들려 쓰임 받는 사도의 존재가 되었기에 오늘까지 믿는 자들에 의해 귀하게 입에 오르 내리는 존재가 된 것이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받을 교훈입니다.
특별히 종으로, 작은 자로, 사도로 억지로가 아니라 저절로 저절로 가는 것이 바로 복음의 길, 부흥의 길인 것임을 다시한번 깨닫는 귀한 우리 모두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어두움 가운데 있기를 한사코 고집하는 우리를 따로 떼어 두셨다가 때가 이름에 불러내셔셔 빛가운데 들어가도록 밀어 넣어 구원하신 주님 감사합니다. 모두를 왕같은 제사장으로 삼아 주시고 합당한 은사를 허락하셔서 하나님 나라 건설과 확장에 필요한 사역과 직분들을 감당하게 하시니 이 또한 감사합니다. 원하고 바라옵기는 이 모든 일들이 오로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임하신 까닭임을 깨닫게 하시어 저희들이 겸손함으로 허락하신 일들을 감당케 하여 주시옵소서.
어떤 상황에 처하든 예수의 사랑 안에서 화평함으로 평안을 누리는 삶을 살게하여 주시옵소서. 영적으로 육적으로 괴로운 가운데 있는 형제, 자매들 주님의 손으로 덮어 회복시켜 주시옵기를 소원합니다. 이루어 질 줄 믿습니다.
믿사옵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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