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September 13, 2010

네가 하나님이냐? (욥38:25-27)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다’(욥5:7)고 말하는 데만 사람의 말처럼 사람들은 고난으로부터 자유롭기가 어렵습니다. 사람들이란 제눈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봅니다. 그래서 고난에 처한 사람들을 위로한다는 말이 상한 마음을 가라 앉히기 보다는 오히려 그 상한 속을 더 끓어 오르게 만드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오늘 고난에 처한 욥과 세친구와 엘리후와의 논쟁이 그렇습니다. 그 끓어 오르는 속마음을 일시에 정리하시는 장면이 바로 하나님이 욥을 만나 주시는 장면입니다.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가운데로서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욥38:1), 호렙산에서 세미한 소리를 통해서 엘리아를 만나주셨던 하나님(왕상19:12)이 오늘은 욥을 폭풍가운데서 만나 주십니다. 고난 가운데 혼돈에 싸인 욥을 위해 위엄과 권능으로 나타나시고, 동시에 하나님의 중대한 자기 표현을 위해서 폭풍가운데 나타 나셨습니다. 세미한 소리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만나든, 푹풍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만나든 하나님을 만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만나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위로자가 되어 주기 위해서 찾아 왔던 친구들과의 설전에 오히려 피로만 더한 채 이제 하나님 앞에 홀로 서게 된 욥에게 하나님께서는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욥38:4, 40:7) 다시 말해서 단단히 정신차리고 하나님의 질문에 대답할 준비를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고난의 이유를 몰라 당황하는 욥과 우리 모두를 향하여 소나기처럼 난데없이 질문을 퍼부어 대십니다. 창조세계와 창조질서에 대한 하나님의 질문들은 지금까지 나를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게 한 그 편협하고 협소한 지금까지의 사고방식을 깨뜨리기 위해서 폭풍가운데 나타 나셔서 정신없이 퍼부으신 질문들입니다.
38장에서부터 41장까지 이어지는 긴 문장 속의 질문들을 정리하면 먼저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눈 곳간에 들어 갔었느냐 우박 창고를 보았느냐?’,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누가 그 도량을 정하였는지 네가 아느냐?’, ‘까마귀 새끼가 먹을 것이 없어서 오락가락 할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을 것을 예비하는 자가 누구냐?,’ 그리고 마지막으로 ’네가 능히 낚시로 악어를 낚을 수 있겠느냐?’ 입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질문들은 ‘ 누구냐?, 네가 아는 것이 무엇이냐?, 네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로 다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이 세가지 질문들을 묵상하는 가운데 교훈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38장 41절의 ‘까마귀 새끼가 먹을 것을 예비하는 자가 누구냐?’, 이 질문은 신앙을 지닌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상식적인 질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욥에게 지금 하시는 이 질문은 천지 만물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가르치기 위한 상식적인 질문이 아니라 까마귀 새끼 한마리의 먹을 양식까지도 챙겨 주시는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가?를 묻는 질문,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의 존재와 정체성에 대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신 것과 같은 종류 질문, 모양만 다른 질문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지난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이 행하신 온갖 기적과 이적을 보고 경험했던 베드로는 거침없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사정이 다릅니다. 극심한 고난에 허덕이면서 그 고난의 궁극적인 원인조차 하나님에게 돌리고 싶은 때에 ‘하나님이 누구인신가?’라는 질문에 베드로처럼 거침없이 숨도 안 쉬고 올바로 대답할 수 있습니까?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다만 하나님이 스스로 보여 주시는 계시의 도움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고,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일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까닭없이, 이유없이’ 당하는 고난의 문제 또한 하나님의 자유행위에 포함되는 것임을 39장에서 산 염소의 출산의 고통을 예로 들어 말씀하십니다. 욥과 같이 우리가 지금 겪는 고난은 바로 하나님께서 성숙한 인격체 창조를 위한 하나님의 자유로운 창조 활동인 것을 출산의 고통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창조 질서에 속해 있는 모든 것들이 출산의 고통을 통하여 새 생명을 낳는 것처럼 욥이 당하는 고통, 즉 자식들의 죽음, 질병으로 인한 견딜 수 없는 육체적 고통,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당하고 있다는 영적 고통, 소외감 등 온갖 실존적 극한의 고난들은 오히려 욥 자신의 성숙한 인격체 창조라는 하나님의 재 창조 사역인 것을 깨달아 온전히 받아 들일 것을 바라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냐?’라는 질문은 바로 지금까지 자신을 위해 항변했던 욥에게 ‘ 네가 하나님이냐?’고 물으시는 말씀인 것이고, 극한 곤경에 욥과 우리를 빠뜨리게 하신 하나님, 그 가운데서도 소망과 의지가 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바로 알아 평안 속에서도 고난을 허락하시고, 고난 속에서도 희망과 평안을 주시는 다양한 하나님의 모습을 납득하므로 내가 지금 겪는 이해 할 수 없는 고난의 문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물음인 것입니다.
두번 째로 하나님께서는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누가 그 도량을 놓았는지 네가 아느냐?’(욥39:1-2)고 물으십니다. 하나님의 이 질문은 욥이나 우리가 편협한 지식의 잣대를 가지고 세상 돌아가는 이치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측량하려고 했던 어리석음에 대한 질타의 목소리입니다. 욥이 안다고 하는 지식은 자기 중심적인 주관적 지식일 뿐입니다. 고난에 처한 자신의 처지로 인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불평하고 항변하는 근거는 바로 욥자신, 바로 우리 자신의 도덕적 충실성입니다. 욥은 말합니다.’ 내가 언제 가난한 자의 소망을 막았던가… 내가 언제 나의 미워하는 자의 멸망을 기뻐하였으며 그의 재앙 만남을 인하여 기운을 뽐내었던가… 나그네로 거리에서 자게 하니지 아니하고,…’(욥31:16, 29)

욥은 도덕적으로 충실한 인생을 살아 왔습니다. 그러나 이 도덕적으로 충실한 삶을 살았다는 것이 때로는 오히려 하나님을 올바르게 아는데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욥의 지식이란 더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명과 도덕적 규범에 충실한 자에게 하나님은 재난과 형벌과 같은 고난의 멍에를 지우지 않을 것이라는 전통적인 인과 응보의 신학이 바로 우리가 익숙한 신학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욥의 지식이요 생각인 동시에 바로 우리들의 지식이요 생각일 뿐입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단적으로 말씀하십니다. ‘ 내 생각과 너희 생각은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사55:8) 이 말씀은 욥이나 우리 인간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과 하나님이 우리를 알고 있는 지식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욥은 인간의 이성적 지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까닭도 없는 극심한 고난을 통하여 인간적 이성과 지성의 한계 너머에 계시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지식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말합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이처럼 인간이 자기 지식의 한계, 자기의 부족함을 깨닫는 길은 바로 무한광대한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네가 아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받을 때입니다.
사실 욥은 사회적으로 힘있는 자들의 강탈과 억압으로 인하여 가난과 질병에 허덕이고 있는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사회에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살아 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욥은 말합니다. ‘나는 소경의 눈도 되고 빈궁하는 자의 아비도 되며 불의한 자의 어금니를 꺽고 그 잇사이에서 겁탈한 물건을 빼어 내었었느니라’(욥27:15-17) 그러나 이제 욥이 하나님 앞에 홀로 서있는 때에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물으십니다. 인간적 삶에 있어서 세상만사의 모든 문제 해결의 근원은 궁극적으로 악의 문제 해결, 즉 죄로부터의 구원에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세상의 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나대던 욥에게 ‘ 소같이 풀을 먹는 하마를 볼찌어다. 그것이 정신 차리고 있을 때에 누가 능히 잡을 수 있겠느냐?’는 물음으로 책망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더 나아가 ‘모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낮추며 악인을 그 처소에서 밟아서 그들을 함게 진토에 묻고 어둑한 곳에 둘찌니라 그리하면 네 오른 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내가 인정하리라’(욥40:9-14)고 하십니다. ‘네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질문은 바로 ‘네가 하나님이냐’는 질문의 연장선에서 하나님의 방식을 욥과 우리가 얼마나 이해할 수 있느냐?를 물으시는 질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거칠고 메마른 광야에 있는 생물들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무상의 은혜를 통하여 그들의 삶을 풍성하게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전혀 살지 않는 광야는 인간의 눈에는 별 것 아닌 것 같아 보여도 광야에도 동물들과 식물들의 다양한 생명체가 살고 있는 삶을 터전 입니다. 그곳에 조차 무상으로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님의 방식을 깨닫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모든 것은 내가 하는 것이다’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욥은 더 이상 하나님에 대항 할 수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일 뿐이었습니다.
바벨탑을 쌓던 성경초기 역사의 때처럼 사람들은 더 높이, 더 빨리, 더 멀리, 더 깊게를 외쳐 댑니다. 나라들마다 초 고층 건물들을 쌓아 올려 내가 최고임을 자랑하기에 혈안입니다. 만들때는 모릅니다. 그러나 공든 탑이 일순간에 흔들려 무너 질때는 압니다. 태풍 곤파스가 남한 땅을, 태풍 얼이 미국 동북부를 쓸고 지나갔습니다. 기억되는 몇 년전 카트리나 참사로부터 시작하여 요 몇년 사이에 천재지변이 그 정도를 더해 갑니다. 홍수로, 가뭄으로, 태풍으로, 기근으로, 여기에 인재성이 더해진 재해까지 더해져 아프리카에서도, 파키스탄에서도, 중국에서도 중남미에서도, 온 땅의 삶이 혼란에 혼란을 더 해갑니다. 이 천재지변들 앞에서 우리가 아는 것이 없고, 가진 것이 없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영화에 불과한 것이지만 ‘해운대’같은 천재지변이 발생하면, ‘지구멸망2012’와 같은 마지막이 현실로 우리에게 닥쳐 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진정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바라 볼 뿐입니다.
지금은 변화가 필요한 때입니다. 그러나 그 변화는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며,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존재’이며.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에서부터 시작 되어야 합니다. 죄만 지으면서 살아 왔다는 ‘나’라는 존재에 대한 회개로부터 시작되는 변화가 올바른 변화의 시작입니다. 나를 제외한 변화는 헛일입니다.
오늘 모든 것을 받아 들인 욥에게 하나님께서는 갑절의 은혜를 부어주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욥은 아들과 손자 사대를 보면서 나이 들어 기한이 차서 죽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똑같은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부어지기 시작 하는 귀한 아침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Thursday, August 26, 2010

나를 따르라(막1:15-17)

소대장과 사이가 안 좋았던 부대원들이 소대장을 골탕먹일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부대 지휘관들이 배석한 가운데 벌어진 도강훈련의 때였습니다. 소대장이 권총을 빼어 들고 목소리도 우렁차게 ‘돌격 앞으로!’를 외쳤습니다. 때는 ‘지금이다’고 생각했던 부대원들이 일시에 ‘뒤로 돌아 앞으로 가’했습니다.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이었습니다. 그날 그 소대장과 소대원들 모두 남한산성에서 특별근무를 명 받았다던 그 옛날 한심한 일화가 있습니다.

동해에서 미국과 함께 벌였던 해상합동훈련에 이어 서해에서 벌이고 있는 을지포커스 가디언 훈련을 두고 북한이 연일 신경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적군과 대치하고 있는 군은 언제나 정병강군으로 육성되어 유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정병강군의 기본은 군인의 기강이 확립되어야 하는 것이고, 군대 기강의 기본 요소는 바로 지휘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군사된 자들입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명령의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이 맡기신 일, 곧 소명을 감당하며 살아 갈 방법을 본문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1:15에서 먼저 ‘회개하라’ 말씀하십니다. 이는 성경중심의 가치관과 세계관으로 돌아가 올바른 크리스쳔의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역시 1:15에서 ‘믿으라’ 말씀하시는데 이는 교회의 본질적인 모습을 믿으라, 곧 예수님을 인격적이고 관계적으로 믿으라는 것을 말합니다.
세번 째로 예수님은 1:17에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머리 속으로, 관념적으로만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대로 행동으로 순종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에서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25번이나 말씀하셨는데 오늘 본문이나 막8:34, 그리고 요21:18-19에서 ‘나를 따르라’고 하신 말씀의 때와 장소를 볼 때 참으로 믿는 자로서 우리 성도들이 깊이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할 말씀인 것을 알게 됩니다.

마가복음을 예수님의 제자훈련이라는 관점에서 살펴 볼 때 예수님이 제자로 삼으려는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말하신 명령의 말씀은 바로 ‘나를 따르라’라는 말씀이셨고, 마가복음의 본래의 본문이 16장 8절에서 끝이나는 것이라고 할 때 마지막 명령은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들 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고 천사의 입을 빌려서 하신 것으로 이 말씀도 역시 그곳으로’ 나를 따라 오라’는 말씀입니다.

‘따른다’는 것은 제자됨의 기본요소인 동시에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때가 찼다,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라, 복음을 믿으라’는 하나님 나라의 대 전제를 선포하시면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동역자로 부르셨습니다. 그 처음으로 시몬과 안드레를 보시고 ‘나를 따라 오너라’하셨고, 다음으로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시므로 그들도 예수를 따라 나섰습니다.(막1:16-20) 여기서 네 명의 제자가 예수를 따라 갔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예수의 선포를 받아 들이고 그 일에 동참하겠다는 뜻입니다.
이때부터 예수께서는 여러가지 활동을 벌이셨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직까지 예수는 ‘내가 누구인가?를 묻지 않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다만 예수께서는 마음에 두신 사람들을 부르시고, 열두제자를 세우시고,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그들을 보내어 말씀을 전하게 하시면서 그들에게 귀신을 내쫓는 권능을 가지게 하시는 등 예수 제자들과 함께 하심으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동역하셨습니다. 이때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은 예수님의 모본이 되는 행동과 삶을 본받아 사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따라 간다’는 것은 예수와 함께하는 동역의 시작이었습니다.

갈릴리 지방의 사역을 거의 끝마칠 즈음에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를 떠나 가이사야 빌립보로 가셨습니다. 지금까지 제자들은 예수가 하신 일들을 목격하고, 예수가 하시는 일들을 대신해 왔는데 여기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예수 자신의 사역과 인격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알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물으신 질문이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물음(막8:27)이었습니다. 예수가 세례 요한, 엘리야, 선지자 중의 하나라는 입소문을 제자를 통해 들으신 예수께서 드디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질문에 성질 급한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하여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막8:29)라고 고백함으로 100점짜리 대답을 예수께 했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은 사람의 이름, 가족관계 또는 그 사람의 직업이나 신분을 말하는 것과 다른 것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한다는 것은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실현시키는 분이시며,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신 것을 말하는 것이며, 동시에 이것을 고백하는 사람도 지금까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이해가 변화되어 자신의 희망, 삶의 목표, 가치관들이 예수에게 맟추어 새롭게 변화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를 따라가는 사람은 예수가 누구이신지를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질문에 100점짜리 대답을 했던 베드로는 이제 완벽한 제자가 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완벽한 대답이 베드로의 제자됨을 완벽하게 만들었던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의 대답에 뒤이어 예수께서 당할 메시야의 영광스러운 고난, 즉 ‘고난받고,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다시 일어나야 할 일’(막8:31)을 말씀하셨을 때 예수께서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간했던 베드로는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극단적인 말씀으로 혼이 납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말 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이것은 지난 세월 예수를 베드로 자신에게 맞추려 하였지 자신을 메시야이신 예수께 맞추어 스스로를 변화시키기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따름의 도리’를 한차원 높여 말씀하십니다. 바로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막8:34)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를 따라 간다는 것은 자기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고난을 각오하고 예수를 따라가는 사람인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훈련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삶을 마감해야 할 시점에 이르게 되었을 때 예수는 제자들을 다시 한번 검증하시기 원하셨습니다. 그곳은 바로 골고다 언덕이었으며, 때는 바로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바로 그 시간이었습니다. 여기서 예수께서 제자들이 치루게 하신 시험은 이론적인 물음이 아니라 예수에 대한 실천적 태도를 확인하는 물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제자들은 시험을 포기했고, 모두가 그 시험장소에서 도망질 쳤습니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것은 빌라도가 내린 사형언도의 집행을 지휘하던 이방인 백부장이 예수의 마지막 운명을 지켜보며 고백한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막15:39)

제자들은 모두 도망질 쳤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또 한번의 기회를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천사의 입을 빌어 하신 막16:7의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갈릴리로 예수를 ‘따라 오라’는 말씀이십니다.
제자들은 갈릴리로 예수를 찾아 갔으며, 거기서 예수를 만났는지에 대해 마가복음은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은 채 끝이 납니다. 그러나 이 명령에 대한 답변은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 치라, 먹이라’는 세번의 말씀으로 베드로를 회복시키신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21:18) 고 말씀하시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어떤 죽음을 당할 것인가를 가리킨 말씀이셨습니다. 이처럼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 훈련 과정의 출발점과 중간점 ,그리고 마지막 종착지에서 반복해서 내리신 명령의 말씀이었습니다.
이 이후 베드로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사도행전을 통해 볼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행4:19-20) 사도행전의 막이 오름과 동시에 이미 베드로는 절대적으로 진리이신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따르는 삶을 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정경은 아니지만 베드로 외경을 보면 베드로는 결국 로마에서 사역하다가 체포 당한 후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처형 당하게 됩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의 군사된 자 들입니다.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주되신 예수 를 따르고 있습니까? 갈릴리에서 어부시대 초기 베드로처럼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나선 자들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2-3년 따라 다녔던 베드로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되 아직 내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을 끊임없이 저울질 하면서 세모로 만들까? 네모로 만들까? 갈까? 말까? 줄까? 말까? 뗄까? 붙일까? 온갖 세상적 생각에 번뇌하면서 예수를 따르는 모양만 그럴듯한 하늘나라 군사들입니까?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나의 삶 전체를 요구하시는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으로 이미 예수님과 ‘나’가 총체적으로 하나가 되어 예수와 ‘나’ 사이에 주객 분열을 극복하므로 예수를 따라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오늘도 ‘나를 따르라’ 말씀하십니다. 오늘, 믿는 자로서 나와 예수님과는 실로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확인하면서 예수를 ‘따라 간다’는 것을 깊이 생각해 보는 귀한 시간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내 자신을 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시니 감사합니다. 마음으로는 늘 하나님과 함께하는 길을 생각하면서도 실제의 삶 속에서는 자꾸만 마음 따로 몸따로, 입따로 머리 따로인 삶을 사는 것을 알게 되어 부끄러운 삶을 살게 됨을 회개합니다. 사랑의 주님 아무리 소원해도 겉과 속이 같은 삶이 참으로 어렵사오니 성령님 붙들어 주시고 이끌어 주시어서 예수 보시기에 합당한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것을 드림으로 따라 갈 수 있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믿사옵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Tuesday, August 3, 2010

Monday, July 26, 2010

당신은 행복자입니다.(롬 4:6-8)


성경을 통해 들어서 참 좋은 단어들이 있습니다. ‘은혜, 은사, 평화, 선물, 사랑’이라는 단어 같은 것들인데 우리는 특히 ‘복, 행복’이라는 단어를 참으로 좋아합니다. 복을 싫어하고 행복해지기를 마다 할 사람은 없을 것이지만 지나치게 복 복, 행복 행복하면 속물 같아 보일 것 같고, 지나친 행복 추구 역시 비 기독교적일 것 같아서 우리에게 끊임 없이 가치 혼돈을 가져다 주는 것이 복이나 행복입니다.

오늘은 행복이라는 주제에 대해 묵상하는 가운데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행복을 말하려면 먼저 세상이 말하는 행복이 무엇인지부터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래야 행복이라는 파랑새를 찾으러 다니다 평생을 다 허비해 버리는 안타까운 생을 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행복이란 무엇입니까? 행복은 특정한 시기에 느끼는 긍정적인 삶의 감정입니다. 행복의 정의를 이렇게 말하면 만족, 쾌락, 즐거움, 긍지, 자아실현, 지복 등과 같은 것도 결국은 행복이라는 말과 별반 다르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의 행복은 물질이나 요행으로 얻어지는 것이라고 해도 상관이 없고, 심지어는 상대가 무너져야 내가 이기는 것과 같이 타인의 불행을 전제로 하는 것이라고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정의로 말하는 행복은 과거와 현재와의 비교, 나와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서 찾을 수 있는 행복이라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연봉이 20만불인데 나 혼자만 15만불을 받는 직장과 다른 사람은 다 8만불을 연봉으로 받는데 나 혼자만 10만불의 연봉을 받을 수 있는 직장이 있다면 우리는 어떤 직장을 선택해야 합니까? 결정이 쉽지 않습니다. 계산상으로는 모든 사람이 15만불의 연봉을 받을 수 있는 곳을 선택할 것 같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자들가운데 가난한 사람으로 남느니 차라리 5만달러를 포기하는 길을 택함으로써 만족스러운 삶, 행복한 삶을 살고 싶어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심리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껏 열댓 평 아파트에서 소형차를 겨우 면한 승용차를 타며 알콩 달콩 행복한 삶을 살던 가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앞 동 50평 아파트에 대형 승용차를 타는, 고등학교 때 나보다 훨씬 못했던 친구가 이사를 왔습니다. 그 때부터 내 남편이 한심해 보이고, 그 때부터 그 집안에 부부싸움이 심심치 않게 되었다는 우스개아닌 우스개 소리가 있습니다. 이게 바로 욕구가 만족되어 부족함이나 불안감을 느끼지 않고 편안해 하는 심리상태를 행복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세상에서 찾는 행복이라는 것이 대부분 일시적인 것들입니다. 모든 것을 다 가졌던 솔로몬이 인생의 마지막 때에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인생의 회한은 바로 세상이 주는 행복은 일시적인 행복, 그래서 작은 행복인 것을 바로 알라는 교훈입니다. 세상이 주는 작은 행복이란 갈증을 풀어주는 시원한 물 한잔, 유쾌한 자리에서 먹는 맛있는 식사 한끼, 기대하지 않던 반가운 친구와의 해후, 즐거움, 기쁨, 쾌활함, 유쾌함 같은 것들 입니다. 그 때는 대단했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면 바로 덤덤해 지는 것, 그런 행복이 바로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작은 행복입니다. 조금 크다고 해 보아야 도취, 열광, 환희, 지복, 충일, 승리, 감격, 황홀, 몰아 이런 것들입니다.

요즘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온갖 중독에 빠져 삽니까? 그것은 사람들이 세상이 주는 작은 행복 찾기에 모든 인생을 다 걸기 때문입니다. 집에서 젖먹이가 굶어 죽는 줄 도 모르고 밖에서 컴퓨터 게임에 몰두 했던 비정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찾던 행복이 바로 세상이 주는 짜릿한 작은 행복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도박장을 찾고, 로또 놀이에 혈안이 되어 갑니까? 그것은 잃어 보아야 별것 아닌 것 같고, 따기만 따면 대박이라는 이루어지지 않을 황홀감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세상에서 찾는 행복은 소유에 있습니다. 패션모델인 동시에 가수인 힐튼가의 상속녀 패리스 힐튼이 끊이지 않고 구설수에 오르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자가용 비행기를 자랑하더니 또 자가용 요트를 자랑하는 모습이 매스콤에 실리면서 구설수에 올랐습니다.
패리스가 구설수에 오르거나 말거나 가끔은 ‘웬 복에!’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이게 대부분의 솔직한 심정이 아닙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자꾸만 더 많이 가지려고 애씁니다. 미국에서 비지니스 하나가지고 열심히 살면 그냥 저냥 살만 합니다. 그런데 비지니스 한 개 더하면 규모의 경제라고 좀 더 남을 것 같아서, 그러면 좀 더 나은 삶, 행복한 삶을 살 것 같아서 무리해서 한 개 더 벌렸다가 낭패보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봅니다. ‘네가 하니까 그런 거지, 내가 하면 잘 할 것’같은 그 욕심을 떨쳐 버리지 못해 빼도 박도 못하는 무리수의 삶을 사는 인생이 제 주변에도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살펴 본 세가지의 행복의 특장에서 보게 되는 행복은 큰 행복, 긴 행복, 참 행복이 아닙니다. 음식에 넣는 양념과 같아서 살면서 가끔은, 조금씩은 있어야 될 것들이지만 그것 때문에 우리의 모든 인생을 걸만한 행복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한글 성경을 기준으로 보면 ‘복’이라는 단어는 성경 전체에 574번이나 나오는데 ‘행복’이라는 단어는 구약 신명기에 두 번, 오늘 읽은 로마서에 두 번, 이렇게 네 번만 나오는 것을 보면 복받기는 쉬워도 행복해지기는 그만큼 어려운 것입니다. 모든 행복한 사람이나 가정이 다 고만 고만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반해 불행한 사람이나 불행한 가정의 원인이 되는 죄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오늘 본문은 우리의 온갖 죄, 우리 가정의 온갖 죄에도 불구하고 행복해 지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확실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실 사울 왕과 다윗을 비교해서 보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지 인간 다윗을 개인적으로 놓고 보면 다윗만큼 파란 만장한 인생을 산 사람도 드믑니다. 사무엘이 이새의 집안을 찾았을 때만 해도 다윗은 집안의 말째로 들판에서 양떼나 돌보던 집안의 천덕꾸러기 였고, 사울에 의해 부름을 받았을 때 잠깐 좋은 시절을 제외하고는 ‘천천 만만’사건 이후로 광야에서 방황하는 오랜 망명의 시절을 겪어야 했고, 왕이 되어서도 자신의 권위를 위협하는 수 많은 무리들 때문에 수도 예루살렘에는 들어오지도 못하고 헤브론 땅에서 7년이나 와신상담해야 했으며, 이후에는 정략적으로 혼인한 수많은 여성들 사이에서 생 고생하는 인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남의 떡이’어떻다고 공연히 저녁 나절에 이웃집 여자 밧세바를 넘보았다가 그 충직한 부하 우리아를 죽게 만들어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었으며, 일찌기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생긴 자식을 잃어 버리더니 늙으막에는 자식 압살롬의 반역으로 씻을 수 없는 치욕의 삶을 산 것도 모자라 못된 자식도 자식이어늘 압살롬, 그 자식을 앞서 보내는 비통함을 겪는 등 정말 복잡하고 고단한 인생을 산 사람이 다윗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오늘 로마서에서 다윗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바울이 다윗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한 것은 지금 우리가 세상에서 얻어 가지고자 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다만 이 격랑과도 같은 인생의 삶속에서 자신이 지었던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그래서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은 축복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행복은 돈과 권력과 승리와 쾌락과 명에에 있지만 다윗은 그것이 참 행복을 주는 근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처절한 삶 가운데에서 저질렀던 수 많은 죄를 통해 깨달았던 진리였습니다. 사람의 행복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땅에서는 지옥의 아픔을 겪는 삶을 살아도 그를 통해서 내 죄를 깨닫고, 그래서 예수를 만나고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다는 것 이상의 복은 없으며, 그 복을 깨달아 누리고 사는 사람은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인 것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지위로는 가까이 할 수 없는 분이 나와 함께 해주시는 교제를 누리며, 무엇이든 하실 수 있고 주실 수 있는 분이 아무 대가 없이 내 죄를 사하시고, 수없이 짓는 자범죄의 허물을 덮어 주시고,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삶을 사는 인생 이상으로 행복한 사람은 없습니다. 다윗은 바로 이 행복을 깨달았고, 이 행복을 누리면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예배하는 우리 모두가 다윗과 똑같은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행복은 소유에 있지 않습니다. 행복은 주신 복을 누리는 삶에 있습니다. 얼마전 월드컵 축구가 끝났습니다. 축구 경기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대리 만족을 누릴 수 있었고, 그래서 삶의 스트레스도 얼마간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월드컵 참가국 선수들의 기술과 기량이 참으로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선수들의 기술이 아무리 훌륭해도 상대가 있는 한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선수 한 사람이 공을 드리볼 할 수 있는 시간은 고작 몇 초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 말은 혼자 공을 잘 다룬다고 해서 경기에서 승리하기는 어렵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제공권을 장악하고 지상의 공간을 잘 활용하는 팀이 승리의 확률이 높은 팀입니다. ‘드리볼’하는 재주는 공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간을 활용하는 재주는 공을 즐기고 누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행복은 더 많이 소유하는데 있지 않고 소유한 복을 누리는 데 있습니다.

세상이 대박 대박한다고 우리 믿는 이들도 대박 대박해서는 안됩니다. 대박의 은혜도 때를 따라서는 필요할 터이지만 그 보다는 먼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 온 인생들에게 주시는 나날의 작은 은혜를 새록 새록 느끼면서 주신 복, 가진 복을 누리고 사는 사람이 오히려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크고 긴 참 행복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회개하고 구원받은 삶을 사는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일상의 삶에서 범하는 수 없는 자범죄의 허물을 덮음 받는 삶을 사는 우리는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날마다 주시는 작은 은혜에도 감사하며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귀한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닫는 우리 모두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라는 말씀이 이 아침에는 ‘복 타령 좀 그만하거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립니다. 돌아보면 광야 길 40년을 먹이고 입히신 하나님이신 것을 알겠건만 앞을 볼 때면 그저 깜깜하기만 우리의 믿음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앞 못보는 사람이 눈을 뜨고, 죽을 병에서 일어나 앉았는 것을 기적이요, 은혜요, 하나님과 함께하는 행복이라 생각케 마시고 내 힘으로 숨쉬며 하루하루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이 내게 베푸신 일용의 은혜인 것을 알게 하시고, 그것을 누리며 사는 것이 행복인 것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하옵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Thursday, July 15, 2010

가지에서 잘린 꽃은


이미 죽은 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아직 죽은 꽃은 아니지만 서서히 그러나 완전히 죽게 될 꽃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는 포도나무 비유이야기가 나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내가 저 안에 있으면 과실을 많이 맺을 것이나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치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져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진다고 했습니다.

교회사택에 자두나무가 몇 그루 있습니다. 매년 열매맺는 이 때를 통해서 위의 말씀을 경험합니다.
아무리 뜨거운 여름날, 햋빛이 바로 쪼이는 곳에 매달린 자두과실이라도 나무에 매달린 과실을 베어 먹으면 시원합니다. 강한 생명력이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응달진 그늘이 있어도 가지에서 떨어져 나간 과실은 그저 뜨뜨 미지근할 뿐입니다. 사람은 떨어진 과실이 아까워 괜찮은 것을 골라 보지만 새들은 참 기가차게도 땅에 떨어진 과실은 거들떠도 보지 않습니다. 그걸보면 어떤 때는 미물들이 사람들보다도 ‘존심(!)이 더 강하다’여겨지기도 합니다.

땅에 떨어진 것은 이미 죽은 것입니다. 포도나무가 예수님이심을 다 아는 것이로되 예수님이신 포도나무로부터 시시때때로 자꾸만 멀어져 나가려는 ‘나’또한 위험한 존재임을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Tuesday, July 13, 2010

나는 종이로소이다! (롬1:1)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예전에는 요리연구가라고 하면 맛있는 음식, 귀한 음식을 원전대로 만들어 내면 그것으로 족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음식 본연의 맛을 그대로 표현해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음식을 어떤 그릇에 어떤 모습으로 담아내느냐하는 문제는 음식의 미학을 더해주는 또 하나의 창작 분야가 되어서 이들 새로운 직종을 담당하는 전문가를 푸드 스타일리스트(food stylist)라고 부릅니다.

오늘날과 같은 무한경쟁의 시대에서, 특별히 경기의 침체로 인하여 청년실업이 증가하는 때에는 ‘나’라는 존재를 어떻게 표현해 PR하느냐의 문제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로 직결됩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물론이고 요즘세대 30%나 되는 남자들이 취업만 된다면 기꺼이 성형 수술도 받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라는 존재를 전략적, 전술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전문 학원에 등록하여 이력서를 쓰고,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는 방법을 배우고, 취업 면접에 대처하는 훈련을 하는 것이 하나의 추세가 된 것은 또 하나의 포장기술을 위한 노력입니다.
2,000년전 바울은 어떻게 자기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까? 오늘은 바울의 자기소개를 통해서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사도행전을 읽으면 바울이 세번째 전도여행 도중에 고린도라는 도시에 잠깐 머물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때는 겨울이었는데 바울이 고린도에서 여행을 멈춘 것은 단순히 휴식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여행보다 더 중요한 일 중의 하나로 로마 교회에 편지를 쓰는 일 때문이었습니다. 잘 아는 것처럼 바울은 로마교회에 무척 가보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길이 자꾸만 막혀 갈 수 없었습니다. 자꾸만 로마가 눈에 밟혔던 바울이 침침해진 눈 때문에 개인 비서 더디오를 옆에 두고 구술로 작성한 편지, 그리고 집사 뵈뵈의 손에 들려 로마에 있는 교회에 전해 주도록 한 편지가 바로 복음서 중의 복음서 로마서입니다.
로마서가 당시 환락의 도시, 음란의 도시 고린도에서 쓰여진 복음서, 그리고 이미 교회가 세워진 로마교회에 보내기 위해 쓰여진 복음의 편지라는 것은 물질과 쾌락 만능의 시대에 어떻게든 자신을 더 드러내 보여 세상적 성공을 쟁취하려는 이 세대에, 그리고 온 천지에 교회가 편만한 이 세대에 큰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포함해서 로마서 1장의 처음 일곱 절은 고대 라틴에서 편지를 쓸 때 사용하는 서론 같은 부분이지만 특히 로마서에서 편지를 보내는 사람, 즉 바울 자신에 대한 정체가 바울의 다른 편지보다 자세하게 되어 있는 것은 빠른 시일 안에 로마교회를 방문하기 원했던 바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소개하는 일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먼저 바울은 아직 한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는 로마 교인들에게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 즉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편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나를 올려 놓지 못해 안달인 세상입니다. 어차피 자신을 내세우지 못할 바에야 중간이나 하자고 가만히 있을 것이지 나를 ‘종’ 곧, 세상에서 ’졸’인 사람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덜 된 사람이 세상 천지에 어디 있을 것입니까? 그런데 바울이 지금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스스로도, 그리고 세상으로부터도 그렇게 허접하게 대접 받아야 할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빌립보서에서 스스로를 말한 것처럼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빌3:5)인 바울은 당대의 석학이면서 어떻게든 가져 보려고 사람들이 애썼던 로마 시민권을 나면서부터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했던 첫마디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인 것입니다.
종이란 바로 노예를 뜻합니다. 2,000년전의 노예는 과거 우리나라의 노비나 백정 같은 천민이 받았던 대접보다 훨씬 더 비참했습니다. 과거 천민 중의 천민이라고 하던 갓바치들은 그래도 자신의 식솔들을 일구어 살 수 있었지만 로마시대의 노예는 이름도 없고, 생각도 없고, 꿈도 가질 수 없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특히 오늘 바울이 자신을 말한 종, 둘로스(doulos)는 생사여탈권이 주인에게 주어져 있는 존재로 영화 벤허에서 보았던 것처럼 배 밑창에서 노나 저으면서 바같 세상을 마음대로 볼 수 조차없는, 그 가치가 새 한마리 값도 안되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종이란 것이 그런 존재인 것을 아는 바울이 왜 자신을 종이라고 불렀습니까? 우리는 ‘종’ 앞의 ‘그리스도’라는 말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종, 곧 노예였으되 고관 대작의 노예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노예였습니다. 바울은 노예보다 더 비참한 존재가 영원히 죄에 매여 종노릇을 하는 존재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죄에서 나를 자유하게 하신 분이 예수라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았기 때문에 스스로 예수님의 소유가 되기로 한 것입니다. 또 바울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한 것은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는 바울의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을 나타내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의 오랜 희망의 성취인 것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하므로써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야 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내 주인이신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므로 나도 십자가를 지고 따르겠다는 삶의 결단입니다. 나의 생사여탈권을 하나님이신 예수님에게 맡기고 예수님의 종으로 살되 죽든지 살든지 예수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삶을 살겠다는 고백이 바로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바울은 자신을 ‘작은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사울이었던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뒤로 바울이 되었다고 말하지만 야곱이 얍복강에서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 싸워 이긴 뒤로 이스라엘이 된 것과는 경우가 다릅니다. 우리 한국의 유명한 패션가 앙드레 김의 본명은 김봉남입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김봉남’이란 이름보다 ‘ 앙드레 김’이란 이름 쓰기를 더 좋아합니다. 바울도 그렇습니다. ‘사울이라 하는 바울’이라 했습니다. 사울이나 바울이나 다 한 사람의 이름입니다. 사울이라 불러도 되고 바울이라 불러도 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만나고부터는 사울이라는 이름보다 바울이란 이름 쓰기를 더 좋아한 것입니다. ‘사울’과 ‘바울’은 어떻게 다릅니까? ‘사울’은 ‘희망으로 하나님께 구한다’는 뜻의 큰 이름입니다. 어려서부터 똑똑했던 바울은 베냐민 지파의 희망이었으며, 그 집안 전체의 희망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에 합당한 대접을 받으면서 자랐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로마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었던 히브리 민족 중에서 로마의 시민권을 갖게 된 대단한 사람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랬던 그가 이제는 스스로 ‘희망’을 나타내는 큰 이름 대신 ‘작은 자’라는 이름인 바울(Paulos)로 불려지기를 좋아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 빼 놓고는 자신이 자신을 제일 잘 압니다. 사울이 그렇게 자타가 인정하는 출세한 인물로서 했던 일이 무엇입니가? 그것은 스데반을 돌로 쳐죽여 순교자로 만든 것, 목적이 잘못된 까닭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의 뒤를 좇아 다니며 못살게 군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강권하심으로 예수님이 사울을 만나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사울은 그 이름이 ‘못난 자, ‘작은 자’라는 뜻의 ‘바울’로 불려지기를 좋아 했습니다. 바울이 사울의 때에 잘못된 인생을 산 것을 깨달았고, 그 인생이 헛된 것임을 깨달았기에 ‘포기한다’는 뜻을 가진 단어에서 온 ‘파울로스’(paulos), 바울이 되기를 선택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가말리엘의 문하생, 다소 출신, 로마의 시민권자, 유대인이라는 모든 기득권을 배설물로 여기고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했던 자신을 가장 잘 알았기에 스스로를 작은 자로 부르기로 했던 것입니다.

세번째로 작은 자로서 바울은 감당할 수 없는 은혜로 예수 그리스 종으로 붙들림을 받아 사도로 세움 받은 자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부르심을 받은 자,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당시에는 크고 작은 전쟁이 이런 저런 이유로 일어나곤 했습니다. 전쟁이 나면 전면전에 앞서서 대표, 곧 사도를 적진에 보내 분쟁의 원인을 알아 보게 하고 타협하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로 보내진 대표의 수완이 좋으면 전쟁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승리의 소식,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좋은 소식, 유앙겔리온을 전해 주는 사람이 바로 사도입니다. 타협이 안되면 적군의 사도는 죽을 수 밖에 없었고, 그리고 나면 전쟁을 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전쟁에서 사도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반드시 있어야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 일을 위해 그렇게 세워진 또 하나의 존재가 바로 자신인 것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 첫머리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 ‘보냄을 받은 자’, ‘사도’(apostolos)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로마 교회의 뿌리가 바울 자신의 개인적 능력이나 지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사명에 있다는 것을 로마 교회가 바로 보도록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의 믿는 이들은 모두가 만인 제사장, 만인 사도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이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지혜를 갖췄고,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들 각자에게 은사를 허락하시고, 그 은사를 사용하시기 위하여 우리들 각자를 불러 세우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스스로를 사도라고 말하고 있는 이유인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본문에서 종, 작은 자, 사도 이 세가지가 바울이 말한 자기 소개의 모든 것입니다. 바울은 스스로를 종으로 인정하는 가운데 자신이 작은 자임을 받아 들이게 되었고, 종으로 낮아지므로 사도로 세움 받았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세상은 나를 크게 드러내려고 안달이고, 나를 과대 포장하려고 혈안이고, 그것이 나를 소개하는 ‘자기 소개서’의 핵심이지만 바울은 스스로를 낮춰 가장 허접한 존재가 되어 가장 작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붙들려 쓰임 받는 사도의 존재가 되었기에 오늘까지 믿는 자들에 의해 귀하게 입에 오르 내리는 존재가 된 것이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받을 교훈입니다.
특별히 종으로, 작은 자로, 사도로 억지로가 아니라 저절로 저절로 가는 것이 바로 복음의 길, 부흥의 길인 것임을 다시한번 깨닫는 귀한 우리 모두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어두움 가운데 있기를 한사코 고집하는 우리를 따로 떼어 두셨다가 때가 이름에 불러내셔셔 빛가운데 들어가도록 밀어 넣어 구원하신 주님 감사합니다. 모두를 왕같은 제사장으로 삼아 주시고 합당한 은사를 허락하셔서 하나님 나라 건설과 확장에 필요한 사역과 직분들을 감당하게 하시니 이 또한 감사합니다. 원하고 바라옵기는 이 모든 일들이 오로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임하신 까닭임을 깨닫게 하시어 저희들이 겸손함으로 허락하신 일들을 감당케 하여 주시옵소서.
어떤 상황에 처하든 예수의 사랑 안에서 화평함으로 평안을 누리는 삶을 살게하여 주시옵소서. 영적으로 육적으로 괴로운 가운데 있는 형제, 자매들 주님의 손으로 덮어 회복시켜 주시옵기를 소원합니다. 이루어 질 줄 믿습니다.
믿사옵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Wednesday, June 30, 2010

누군가 날 위하여...

언듯 보는 것과는 달리 사진은 앞서가는 큰 배가 뒤따르는 작은 배를 끌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뒤에 가는 작은 배가 앞서가는 배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훌륭한 장비가 갖춰진 배라도 익숙치 않은 좁은 수로를 지날 때는 파일럿이라 부르는 안내하는 배가 뱃길을 인도해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지나온 과거는 아쉽기만 하고, 우리의 앞 날은 그저 불확실성이 함께 할 뿐이어서 답답할 뿐이지만 지금 우리가 안심할 수 있음은 우리의 뒤에서 때로는 우리의 앞에서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