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June 30, 2010

누군가 날 위하여...

언듯 보는 것과는 달리 사진은 앞서가는 큰 배가 뒤따르는 작은 배를 끌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뒤에 가는 작은 배가 앞서가는 배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훌륭한 장비가 갖춰진 배라도 익숙치 않은 좁은 수로를 지날 때는 파일럿이라 부르는 안내하는 배가 뱃길을 인도해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지나온 과거는 아쉽기만 하고, 우리의 앞 날은 그저 불확실성이 함께 할 뿐이어서 답답할 뿐이지만 지금 우리가 안심할 수 있음은 우리의 뒤에서 때로는 우리의 앞에서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Monday, June 28, 2010

나이듦에 대하여(고후 4:16-18)



‘맥도날드에서 Senior Coffee를 청했다’고 했더니 나이드신 권사님 한 분이 ‘너무 좋아하지 말라’ 했습니다. ‘그 만큼 나이가 든 것’이고, ‘그 곳에 갈 날이 가까워 오고 있음’을 잊지 말라는 당부의 뜻이 숨은 줄압니다.

오늘은 어떻게 나이드는 것이 성경적으로 나이 드는 것인지 잠시 묵상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이후 예수가 탄생할 때까지 지구를 살다 간 인류는 기껏해야 2억 5000만~3억명 가량 일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제국 시대로부터 1800년 경 까지 인간의 평균 수명은 30세도 되지 못하던 것이 과학기술문명의 혁명과 더불어 어지간한 나라라면 남자는 평균나이 75세, 여자는 평균나이 82-3세가 넘어 20세기 중반에 두차려의 세계 대전을 겪고도2000년대에는 이미 60억명을 넘어선 까닭에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면 어디나 사람으로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은 바로 나이가 든다는 것입니다. 달릴 때는 몰랐는데 멈추고 돌아 보면 아주 먼 길을 지나 온 것처럼 나와 관계없이 언제나 내 밖에 있는 것이라 생각되던 것이 어느날 갑자기 내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을 깨달아 맥빠지게 하는 것이 바로 나이입니다. ‘나도 이젠 나이가 드는가보다’라는 스스로의 인정과 ‘다 늙어도 나는 안 늙어’라는 묘한 자만심이 서로 싸우게 하고, 스스로는 ‘나이가 들었다’고 인정하는 때에도 남으로부터는 ‘무슨 말씀? 아직도 젊으신데!’라는 말을 듣는 것이 훨씬 좋은 것이 바로 나이입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여자나 남자나 꼭 같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싫어도 누구나 나이를 먹습니다. 그리고 나이듦은 바로 늙어감을 뜻합니다.

그동안 사회의 각 기관들에서 노인계층은 한편으로는 생산에서는 제외되어 무언가를 써 없애기만하는 소비계층으로 보아 왔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돌봄을 받아야 사는 아무런 능력도 없는 계층으로 인식해 왔습니다. 지금까지 노인 세대는 전통적인 윤리의식 속에서 우리 국가와 사회의 발전에 고귀한 경험을 만들어 낸 세대로 대접받고 싶어하고 또 대접하려고 노력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현대 다원주의 산업사회와 그 사회가 중요시하는 배금주의는 노인들과 관련하여 많은 문제를 불러 오고 있습니다. 앞으로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노인과 관련한 사회문제는 세대간 단절로 인해 더욱 심해질 터인데 그렇기 때문에 적어도 우리 믿는이들은 성경적으로 노인을 생각하고 노인들의 문제를 이해하고 풀어 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먼저 성경은 나이가 든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성경은 노인을 나이가 많은 이를 지칭하여 청년 또는 젊은이의 반대어로 말하고, 부모 공경과 같은 맥락에서 노인을 공경의 대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각 지역의 지도자들은 대부분 노인들이었습니다. 구약 성경 전체에 걸쳐 70인 장로들(민11:6)이나 재판장들(신21:2)은 중요한 특권을 가지고 있었고,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레19:32)는 말씀은 구약시대에 있어서 나이 든 어른에 대한 백성들의 태도를 엿볼 수 있게 합니다.
또 ‘젊은 자의 영화는 그 힘이요 늙은 자의 아름다운 것은 백발이니라’(잠20:29)라고 한 것같이 노년은 지혜와 명예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중요한 문제를 결정할 때나 어려운 일이 생길 때 노인들은 의논하고 조언을 구할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나이 든 사람에 대한 구약의 생각은 신약에도 그대로 이어 지고 있어서 바울은 딤전5:1-2에서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비에게 하듯하며 늙은 여자를 어미에게 하듯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노인의 슬기와 지혜를 말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대인이라고 지혜로운 것이 아니요 노인이라고 공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고(욥32:9)하여 노인의 무지와 불완전함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단지 나이가 많다는 선배의식만으로는 더 이상 참 접대를 받기에 부족함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막10:13-16에서 예수님께 축복받으러 나오는 어린아이들을 꾸짖는 제자들에게 화를 내시면서 ‘하나님 나라가 바로 이런 자들의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은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들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나이들어 늙어 가는 것 때문에 오히려 우리 마음이 순수하지 못하고, 그래서 하나님을 순수하게 믿고 신뢰하는 마음이 낡아지고 약해 지는 것을 경계하고 하신 말씀입니다.
또 장로를 택하는데 대한 바울의 가르침(딤전3:1-7)이나 참과부 존대에 대한 권면(딤전 5:3-10)을 보면 청년 곧, 젊은이들이 노인을 어떻게 대접할 것인가도 중요하지만 노인들 스스로 어떻게 나이들어 가야 하는가?의 문제 또한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성경적으로 나이가 들기 위해서 깨달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먼저 겉사람은 반드시 늙는다는 것을 바로 깨닫는 것입니다. 나이드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나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때가 되면 늙어야 하고, 그래서 겉사람은 초라해져야 하는 것이 복입니다. 아무리 화장하고, 변장하고, 포장해도 세월이 갈수록 겉사람은 노쇠하고 무능력해 집니다. 겉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냄새맡고 맛보는 것, 만져 보는 것 등 현실적인 감각과 체험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겉사람은 나이가 들면 후패해지기 마련입니다. 이 사실을 바로 알고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인정하지 않으면 내 안의 ‘나’가 괴로워 할 뿐입니다.
그대신 나이가 들어 가면 겉사람이 아니라 속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속사람은 육신이 주는 감각적인 느낌으로 살지 않고 말씀으로 사는 것입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가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가 안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이 없어도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믿음으로 붙들고 살아가는 삶이 속사람이 사는 방법입니다.

겉사람은 후패해도 여호와를 앙망하는 삶을 사는 속사람은 피곤하거나 곤비치 않으며 언제나 하늘을 차고 오르는 독수리처럼 새 힘이 넘쳐 납니다. 이 힘은 나이와 관계가 없습니다. 속사람이 힘을 얻고 젊어지는 것은 나이와 관계가 없다는 말입니다. 욜2:8을 보면 속사람이 강건한 사람들은 ‘자녀들이나 젊은이나 늙은이가 모두 장래 일을 보고, 이상을 보고 꿈을 꿀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나이가 젊어도 속사람이 늙은 젊은이가 있는가 하면 나이는 들었어도 속사람은 여전히 젊어지는 늙은이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나이가 젊어도 하나님이 ‘오라’ 하시면 꼼짝없이 붙들려 갈 수 밖에 없는 것이 겉사람의 삶 입니다. 그리고 아파트 내 옆 집도 모자라서 동네 아파트 모든 집의 숫가락이 몇 개인지 젖가락이 몇 개인지 세는 삶은 겉사람이 사는 삶입니다. 동네사람 사돈의 팔촌이 뭐 해 먹고 사는지 미주알 고주알 따지는 재미로 사는 삶은 바로 겉사람이 사는 삶입니다. 그 대신 아직 힘이 있을 때 말씀 한 구절이라고도 더 듣고, 말씀 한 줄이라도 더 보려고 애쓰는 삶이 바로 속사람이 젊어지는 삶입니다.

둘째로 성격적으로 나이가 드는 삶은 노년기에 주어진 사명을 올바로 해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학생은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젊은이들은 아직 젊었을 때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나이들어 늙어가는 사람들은 어떤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야 합니까? 노인들의 사명은 바로 ‘타인과 화해’하는 삶입니다. 마음이 아팠던 일들,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과 화해하는 가운데 나이가 들어 가야 합니다. 살아 오면서 마음 속에 쌓였던 부정적인 감정들과 화해하고 용서하여 모든 것과 통합하는 관계 속에서 늙어 가야 합니다. 나이들어 가는 삶들의 진정한 힘은 축복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항상 건성이 아닌 진심으로 축복하고, 무슨 일이든 축복하는 일, 그 일이 나이들어 늙어 가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힘들어 지친 사람들의 도피성이 되어주고 피난처가 되어 줄 수 있는 나이든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어차피 제한적일 수 밖에 없는 인간관계인 것인데 교회 안에서 조차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얽매이다가 그만 발 목을 잡혀 상처 받는 삶은 이제 그만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사는 재미를 찾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사는 재미를 찾으며 사는 것이 성경적으로 나이든 사람의 사는 방식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날을 계수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가인의 자손들은 세월과 관계없이 일에만 몰두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일을 다 마쳤다고 생각했을 때 세월은 그들을 삼켜버렸습니다. 그러나 셋의 자손들은 일에만 몰두하는 대신 날을 계수하는 지혜를 발휘하며 살았습니다. 날을 계수한다는 것은 인생에 끝 날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끝 날이 이르기 전에 자신의 존재와 생명을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의탁하는 삶을 사는 지혜로운 인생입니다.
그 옛날 중국의 양자는 ‘사람이 1 백살을 산다고 해도 거기서 어린시절과 노인시절, 잠자는 시간과 깨어 있어도 헛되이 보내는 시간, 아프고, 슬프고, 괴롭고, 근심하고, 두려워 하는 시간을 빼고 나면 만족하며 보낸 날은 한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탄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나이드는 삶은 환상적인 삶입니다. 비로소 내면의 가치를 깨닫고 그 남은 삶을 영원한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의탁할 수 있는 삶의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나이가 들면 시간은 더욱 빠르게 흘러갑니다. 나이가 들수록 반복되는 일들만 하게 되고, 단조로운 생활이 호기심과 긴장감을 떨어 뜨리기 때문에 시간은 더욱 빠르게 흘러 가는 법입니다. 그리고는 그렇게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 때문에 덧없어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적으로 나이든 삶입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가도 남은 시간을 계수하며 지금이 바로 은혜받을 만한 때임을 깨달으며 한순간, 한순간을 겸손함으로 열심히 사는 것은 바로 성경적으로 나이들어 사는 삶입니다.

금년도 벌써 절반이 흘러갑니다. 아쉽습니다. 그러나 아쉬운 생각이 드는 이 때에 아픈 과거만을 기억하는 삶이 아니라 앞으로 내게 허락될 삶의 시간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가운데 영적으로는 오히려 더욱 충만해지는 삶을 살 수 있는 우리 모두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한해의 마지막 때에나 하던 ‘다사다난’이라는 말이 한 해의 절반을 산 지금 말한다 해도 하나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세상적으로 어려운 때를 살지만 오늘 여기까지 도우시고 인도하신 주님을 감사합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날로 후패하여 가지만 원하고 바라옵기는 우리의 영은 날로 새로워 지고 건강하여 지기를 소원합니다.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지금껏 수십년을 살아온 인생들의 그 마지막이 허접하게 마감되지 않게 하여 주시고, 건강한 몸으로 아름다운 영성을 지닌채 새하늘 새땅으로 이적해 갈 수 있는 영광된 인생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육체적으로 건강하지 못하고, 정신적으로 영적으로도 건강하지 못하여 고통하는 성도들 많사오니 이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어 권능과 치유의 손으로 덮어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믿사옵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Tuesday, June 8, 2010

전체 무게는 140t … 인공위성은 100㎏



지난해 실패한 나로호, 이번에 2차로 발사가 시도됩니다. 그래서인지 관심도 그만큼 높습니다. 알고 보면 더 재미가 있다는 신문기사가 정말 흥미로운 시사점을 던져 주기에 기사를 옮겨 적습니다. 무언가를 채워넣으면 커질 법한 것이 일반적 상식인데 채워 넣으면 오히려 줄어드는 것이 있었고, 바라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때를 기다려야 하고, 원하는 곳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자꾸 써 없애고, 버려야 하는 것이 있음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큰 시사점을 던져 줍니다.
"나로호에 숨겨진 첨단 기술을 알고 발사를 지켜보면 더욱 흥미롭다. 나로호는 하늘로 올라가면서 연료통이며 페어링이며 무엇인가를 자꾸 떼어낸다. 연료탱크에 연료를 주입하고 나면 연료통 자체가 줄어들기도 한다. 독자들의 궁금증을 질의응답(Q&A)으로 풀어본다.

Q. 연료를 태우는 액체산소는 극저온이라는데 나로호 몸체에 영향은 미치지 않나.
A. 나로호 1단의 길이 25.8m 중 14m 정도에 액체 산소 100t이 주입된다. 액체산소의 온도는 섭씨 영하 183도. 이렇게 차가운 액체를 받아들이는 연료통은 수축될 수밖에 없다. 전체적으로 통 지름은 12.7㎜, 길이는 60㎜가 수축된다. 이는 전체의 0.44%에 해당한다.

Q. 나로호를 하루 중 아무 때나 쏠 수 있나
A. 쏠 수는 있지만 거기에 싣고 가는 위성이 문제다. 나로호의 목적은 위성을 우주에 올려 작동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위성이 우주에 올라갔을 때 밤이 되거나 해를 보기 어려운 시간이라면 태양전지가 작동하지 않아 전력을 제대로 공급할 수 없다. 이번처럼 오후 4시30분~6시40분 사이에 쏘는 건 위성이 우주에서 태양빛을 가장 잘 받을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이를 ‘하늘문이 열리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Q.나로호가 제대로 비행하는지 어떻게 아나.
A.나로호 2단 로켓에는 동영상 카메라가 두 대 달려 있다. 하나는 1단 로켓 쪽(지구 쪽)을, 또 하나는 위성 쪽(우주 쪽)을 향한다. 이들이 찍은 영상은 실시간으로 지상 관제소로 전송된다. 또 내비게이션도 달려 있다.

Q. 나로호는 비행하면서 연료통 등 이런저런 부품들을 왜 떼어버리나.
A. 나로호는 2단 로켓 발사체다. 나로호가 발사되면 1단 로켓에 담긴 130t 가까운 연료는 229초 만에 다 타버린다. 발사 232초 후 지상 196㎞에 도달하면 다 쓴 1단 로켓을 떼어 버린다. 발사 453초 뒤에는 2단 로켓마저 다 쓰고 떼어낸다. 목표 궤도에 올라가기까지 불필요한 것을 없애 무게를 줄이기 위해서다.
나로호가 우주에 싣고 가는 위성의 무게는 100㎏에 불과하다. 그러나 연료를 꽉 채운 나로호의 무게는 140t에 이른다. "

Wednesday, June 2, 2010

우리는 다만 그 품 속으로 달려가면 됩니다.

다니엘의 믿음처럼(단1:8-17)

금년은 일제 식민 조국의 원통함을 달래기 위해 만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의사의 순국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안의사의 독립운동과 항일 계몽운동, 그리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았던 그의 생애는 100년이 지난 세월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에 빠져 버린 이스라엘은 남 유다가 기원전 586년에 완전히 멸망을 당하여 백성들이 70년간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게 된 것으로 끝이 나게 되지만 사실 유다의 운명은 이보다 10년쯤 전인 605년 느부갓네살의 유다 침략으로 이미 결정이 나버렸습니다. 느부갓네살 군대는 예루살렘을 짓밟고, 예루살렘 성전의 기구들을 약탈해 갔습니다. 이로써 유다 백성들의 신앙적 자부심은 말 할 수 없이 짓밟혔는데 이 때 다니엘과 세친구들이 많은 유다 백성들과 함께 적국인 바벨론 땅으로 끌려 갔습니다.
당시의 암울한 상황에 대해 시편기자는 후일에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로 시작하는 시편 137편으로 노래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다른 유다 백성들과는 조금 다른 상황의 포로였는데 오늘은 이들을 통해서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예루살렘을 침공한 느부갓네살은 유대 왕족과 귀족인 청년들을 포로로 잡아 갔는데 이들 중에 오늘의 주인공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이들은 육체적으로 흠이 없고, 지식적으로도 이미 탁월한 역량을 갖추었고, 유대인들이었던 만큼 히브리인의 가치관과 신앙교육을 제대로 받은 젊은이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패전국의 볼모 신분으로 승전국의 나라 살림에 도움을 주기 위해 끌려 간 것입니다. 그래서 포로이면서도 승전국의 특별한 대우를 받는 포로였습니다. 이들은 함께 끌려가서 고된 노역을 해야하는 다른 포로들의 부러움을 살만큼 일종의 특권을 가진 포로였지만 거꾸로 이들은 율법대로 살지 못하는 포로 생활에서 오는 말할 수 없는 영적 고통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이들은 유대민족으로서의 삶과 지배국인 바벨론에서의 삶이라는 이중성 속에서 정체성이 혼돈되는 삶을 살아야 하는 다시말하면 몸은 바벨론에 있어도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빌3:20)’는 육신과 영의 삶이 전혀 다른 이중의 삶을 살아야 하는 고통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정체성을 뒤흔들어 놓은 지배국 바벨론의 식민지 동화 정책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그것은 먼저 그들이 이름을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한자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의 이름에는 특별한 뜻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주신 육신을 귀하게 여긴 것처럼 부모가 지은 이름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히브리인들도 한국사람들 이상으로 이름에 대한 애착이 강합니다. 그런데 일본사람들이 내선일치 식민지 정책으로 우리 나라사람들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강압적으로 바꾸게 했던 것처럼, 다니엘과 그 세친구들의 이름도 바벨론 식으로 바꾸게 했습니다. 원래 그들의 이름은 어떤 뜻을 지녔습니까? 이들의 이름은 모두 하나님을 뜻하는 ‘엘’과 ‘야’를 가지고 있어서 ‘다니엘은 ‘하나님은 나의 심판자이시다’, ‘하나냐’는 ‘여호와는 인자하시다’이며 ‘미사엘’은 ‘하나님과 같은 이가 누구신가?’ ‘아사랴’는 ‘여호와는 나의 구원이시다’라는 뜻을 가겼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이름이 식민지 바벨론의 강압으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대신 바벨론의 신앙이 반영된 이름으로 개명되어 다니엘은 ‘바벨론의 만신 벨이 가장 아끼는 왕’인’ 벨드사살’, 하나냐는 ‘악의 권세인 달신’을 가르키는 ‘사드락’으로, 미사엘은 ‘악신과 같은 이가 누구인가’?라는 뜻의 ‘메삭’, 그리고 아사랴는 ‘신들의 종인 느보’, ‘아벳느고’로 바꿔 버렸습니다. 이들의 바뀐 이름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을 조롱하는 패러디인 것을 당장에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창씨개명으로 다니엘과 그 친구들은 당연히 심각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그 혼란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다니엘과 그 친구들이 겪었던 두번째의 정체성의 위기는 바벨론식 교육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교육은 단기적으로는 별반 힘이 없어 보여도 장기적으로는 큰 힘을 작용하는 국가적 요소입니다. 일제 36년 동안 식민지 교육의 효과가 그 얼마나 큰 것이었습니까? 한국의 시골 초등학교 모습이나 일본의 시골 초등학교 모습이나 똑 같습니다. 왜 입니까? 일본 식민지 밑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이 지금의 지식과학부인 문교부의 중요한 자리를 모두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뿐만아니라 일제 36년의 영향이 얼마나 컸던지 광복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국 사회 구석구석에 일제의 잔재가 남아 있습니다.
다니엘과 그 친구들도 바벨론식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3년 과정으로 갈대아 사람들의 학문을 배웠습니다. 아람어 대신 생소한 수메르어와 아카드어를 배웠고, 이런 문자를 배워 바벨론 종교와 관련된 비문을 해석하고 연구했을 것이며, 당시의 중요한 학문이었지만 비 기독교적인 점성술과 주술, 마술 등을 공부하고. 바벨론식 철학을 공부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흠없이 빼어난 유대인이었던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바벨론 왕실이 요구하는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바벨론 학문을 열심히 공부해야 했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고, 율법을 따라 살아야 했던 유대인들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모든 이교의 학문적 과업을 잘 감당해 낼 수 밖에 없었고, 또 어찌보면 그것은 나라가 망하고 적국의 포로가 된 상황에서 그들이 겪어 내야만 하는 일들 이기도 했습니다.

오늘의 교훈은 여기서 시작됩니다. 다니엘의 상황이 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과 비슷합니다. 세상 속에 살아가면서도, 하나님과 자꾸만 멀어지는 철학을 가진 육의 사회를 살아 가면서도,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이나 믿는 사람이나 똑 같은 일을 하고, 믿지않는 사람들과 어깨를 부대끼며 살아가야 하면서도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믿는 이로서의 ‘나’를 지키기로 결심한 이야기가 지금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바벨론식으로 이름도 바꿨습니다. 그리고 이교적 학문도 받아 들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가지 식민지 바벨론의 시도를 점잖게 거부하면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라히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8절의 말씀입니다. 다니엘은 왕이 하사하는 특별한 음식과 포도주가 자신을 더럽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 바벨론은 신의 은총인 곡식이나 풀을 먹고 자란 짐승을 먹을 수 있게 되는 것도 신의 은총이라는 생각 때문에 신에게 제사지내고 난 음식을 먹었고, 또 유대인의 정결법에 어긋나는 돼지고기나 말고기 같은 짐승의 음식를 먹었는데 이를 점잖게 그러나 분명하게 거부한 것이 었습니다.
모름지기 음식 문화는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민족적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이루어지는 생활 문화입니다. 더우기 종교적 차이가 끼친 음식 문화의 이질성으로 유대인으로서 받아 들일 수 없는 바벨론 음식 문제 만큼은 그냥 넘어 갈 수 없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입니다. 바벨론식 음식문화를 받아 들인다는 것은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뿌리부터 뒤흔드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음식을 통해 하나님을 믿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내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사실 아무리 똑똑한 청년들이라지만 지배국에 볼모로 끌려 온 이상 지배국의 명령을 거부하는, 특히 왕이 하사한 음식을 거부한다는 것은 지배국 바벨론의 미움을 받을 수도 있는 당돌한 결정이었음에도 그들은 당당하게 음식을 거부했습니다.

오늘의 교훈은 이렇습니다. 즉, 누구나 신앙생활을 하면서 웬만한 것은 다 양보합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다를 것이지만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는데 결정적으로 필요한 한 두가지 양보해서는 안되는 것까지도 육의 세상에 양보함으로써 더 큰 믿음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더 큰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중요하고 대단해 보여도 그것이 ‘나’와 관련된 일이라면 내려 놓고 버려도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단순해 보여도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의 시작이고, 하나님 나라 일에 방해가 되는 일이라면 양보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나’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다니엘과 그 친구들은 용기를 가지고 내린 결심으로 받은 축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먼저 이방 바벨론 왕궁 고관들에게 다니엘과 그 친구들이 하나님을 대강 믿는 청년들이 아닌 것을 확실히 알게 한 것이고, 하나님은 이들에게 지식을 더하시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셨으며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게 하신 것입니다. 무엇보다 값있는 축복은 하나님이 평가하시는 신앙기준에 합격 도장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 일을 확인하는데 얼마나 긴 시간이 걸렸습니까? 겨우 열흘이었습니다.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있듯이 결정하고 작심한 믿음의 생활을 열흘을 견디지 못해 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우리의 믿음생활을 흔히 보게 됩니다. 그러나 열흘만 견디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안중근의사가 그를 죽게 한 일본사람들에게서 조차 존경받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대의를 위해 목숨까지도 초계같이 버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육의 세상에서 우리 믿는 이들이 지켜야 내야 할 대의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윤리와 가치입니다. 이 시간, 다니엘과 그 친구들처럼 신앙생활에서 내가 버려야 하는 것들은 무엇인지, 또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하나님 보시기에 칭찬받는 믿음을 위하여 지키기로 작정하고 열흘을 견뎌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귀한 시간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충만한 축복을 받는 귀한 우리 모두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오늘도 말씀으로 기도로 하루를 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원하고 바라옵기는 하나님나라의 삶을 위해서 내가 버려야 할 것을 과감히 버리게 하시고, 또 내가 지켜야 할 것은 죽기 살기로 지켜 낼 수있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특별히 버릴 것과 지킬 것이 혼돈되어 뒤바뀌지 않게 성령님 함께하여 주시고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 모두 올바른 믿음의 생활, 하나님 나라를 향한 신앙의 생활로 나아 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믿사옵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