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June 2, 2010

다니엘의 믿음처럼(단1:8-17)

금년은 일제 식민 조국의 원통함을 달래기 위해 만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의사의 순국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안의사의 독립운동과 항일 계몽운동, 그리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았던 그의 생애는 100년이 지난 세월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에 빠져 버린 이스라엘은 남 유다가 기원전 586년에 완전히 멸망을 당하여 백성들이 70년간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게 된 것으로 끝이 나게 되지만 사실 유다의 운명은 이보다 10년쯤 전인 605년 느부갓네살의 유다 침략으로 이미 결정이 나버렸습니다. 느부갓네살 군대는 예루살렘을 짓밟고, 예루살렘 성전의 기구들을 약탈해 갔습니다. 이로써 유다 백성들의 신앙적 자부심은 말 할 수 없이 짓밟혔는데 이 때 다니엘과 세친구들이 많은 유다 백성들과 함께 적국인 바벨론 땅으로 끌려 갔습니다.
당시의 암울한 상황에 대해 시편기자는 후일에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로 시작하는 시편 137편으로 노래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다른 유다 백성들과는 조금 다른 상황의 포로였는데 오늘은 이들을 통해서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예루살렘을 침공한 느부갓네살은 유대 왕족과 귀족인 청년들을 포로로 잡아 갔는데 이들 중에 오늘의 주인공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이들은 육체적으로 흠이 없고, 지식적으로도 이미 탁월한 역량을 갖추었고, 유대인들이었던 만큼 히브리인의 가치관과 신앙교육을 제대로 받은 젊은이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패전국의 볼모 신분으로 승전국의 나라 살림에 도움을 주기 위해 끌려 간 것입니다. 그래서 포로이면서도 승전국의 특별한 대우를 받는 포로였습니다. 이들은 함께 끌려가서 고된 노역을 해야하는 다른 포로들의 부러움을 살만큼 일종의 특권을 가진 포로였지만 거꾸로 이들은 율법대로 살지 못하는 포로 생활에서 오는 말할 수 없는 영적 고통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이들은 유대민족으로서의 삶과 지배국인 바벨론에서의 삶이라는 이중성 속에서 정체성이 혼돈되는 삶을 살아야 하는 다시말하면 몸은 바벨론에 있어도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빌3:20)’는 육신과 영의 삶이 전혀 다른 이중의 삶을 살아야 하는 고통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정체성을 뒤흔들어 놓은 지배국 바벨론의 식민지 동화 정책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그것은 먼저 그들이 이름을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한자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의 이름에는 특별한 뜻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주신 육신을 귀하게 여긴 것처럼 부모가 지은 이름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히브리인들도 한국사람들 이상으로 이름에 대한 애착이 강합니다. 그런데 일본사람들이 내선일치 식민지 정책으로 우리 나라사람들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강압적으로 바꾸게 했던 것처럼, 다니엘과 그 세친구들의 이름도 바벨론 식으로 바꾸게 했습니다. 원래 그들의 이름은 어떤 뜻을 지녔습니까? 이들의 이름은 모두 하나님을 뜻하는 ‘엘’과 ‘야’를 가지고 있어서 ‘다니엘은 ‘하나님은 나의 심판자이시다’, ‘하나냐’는 ‘여호와는 인자하시다’이며 ‘미사엘’은 ‘하나님과 같은 이가 누구신가?’ ‘아사랴’는 ‘여호와는 나의 구원이시다’라는 뜻을 가겼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이름이 식민지 바벨론의 강압으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대신 바벨론의 신앙이 반영된 이름으로 개명되어 다니엘은 ‘바벨론의 만신 벨이 가장 아끼는 왕’인’ 벨드사살’, 하나냐는 ‘악의 권세인 달신’을 가르키는 ‘사드락’으로, 미사엘은 ‘악신과 같은 이가 누구인가’?라는 뜻의 ‘메삭’, 그리고 아사랴는 ‘신들의 종인 느보’, ‘아벳느고’로 바꿔 버렸습니다. 이들의 바뀐 이름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을 조롱하는 패러디인 것을 당장에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창씨개명으로 다니엘과 그 친구들은 당연히 심각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그 혼란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다니엘과 그 친구들이 겪었던 두번째의 정체성의 위기는 바벨론식 교육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교육은 단기적으로는 별반 힘이 없어 보여도 장기적으로는 큰 힘을 작용하는 국가적 요소입니다. 일제 36년 동안 식민지 교육의 효과가 그 얼마나 큰 것이었습니까? 한국의 시골 초등학교 모습이나 일본의 시골 초등학교 모습이나 똑 같습니다. 왜 입니까? 일본 식민지 밑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이 지금의 지식과학부인 문교부의 중요한 자리를 모두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뿐만아니라 일제 36년의 영향이 얼마나 컸던지 광복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국 사회 구석구석에 일제의 잔재가 남아 있습니다.
다니엘과 그 친구들도 바벨론식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3년 과정으로 갈대아 사람들의 학문을 배웠습니다. 아람어 대신 생소한 수메르어와 아카드어를 배웠고, 이런 문자를 배워 바벨론 종교와 관련된 비문을 해석하고 연구했을 것이며, 당시의 중요한 학문이었지만 비 기독교적인 점성술과 주술, 마술 등을 공부하고. 바벨론식 철학을 공부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흠없이 빼어난 유대인이었던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바벨론 왕실이 요구하는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바벨론 학문을 열심히 공부해야 했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고, 율법을 따라 살아야 했던 유대인들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모든 이교의 학문적 과업을 잘 감당해 낼 수 밖에 없었고, 또 어찌보면 그것은 나라가 망하고 적국의 포로가 된 상황에서 그들이 겪어 내야만 하는 일들 이기도 했습니다.

오늘의 교훈은 여기서 시작됩니다. 다니엘의 상황이 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과 비슷합니다. 세상 속에 살아가면서도, 하나님과 자꾸만 멀어지는 철학을 가진 육의 사회를 살아 가면서도,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이나 믿는 사람이나 똑 같은 일을 하고, 믿지않는 사람들과 어깨를 부대끼며 살아가야 하면서도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믿는 이로서의 ‘나’를 지키기로 결심한 이야기가 지금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바벨론식으로 이름도 바꿨습니다. 그리고 이교적 학문도 받아 들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가지 식민지 바벨론의 시도를 점잖게 거부하면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라히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8절의 말씀입니다. 다니엘은 왕이 하사하는 특별한 음식과 포도주가 자신을 더럽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 바벨론은 신의 은총인 곡식이나 풀을 먹고 자란 짐승을 먹을 수 있게 되는 것도 신의 은총이라는 생각 때문에 신에게 제사지내고 난 음식을 먹었고, 또 유대인의 정결법에 어긋나는 돼지고기나 말고기 같은 짐승의 음식를 먹었는데 이를 점잖게 그러나 분명하게 거부한 것이 었습니다.
모름지기 음식 문화는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민족적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이루어지는 생활 문화입니다. 더우기 종교적 차이가 끼친 음식 문화의 이질성으로 유대인으로서 받아 들일 수 없는 바벨론 음식 문제 만큼은 그냥 넘어 갈 수 없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입니다. 바벨론식 음식문화를 받아 들인다는 것은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뿌리부터 뒤흔드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음식을 통해 하나님을 믿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내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사실 아무리 똑똑한 청년들이라지만 지배국에 볼모로 끌려 온 이상 지배국의 명령을 거부하는, 특히 왕이 하사한 음식을 거부한다는 것은 지배국 바벨론의 미움을 받을 수도 있는 당돌한 결정이었음에도 그들은 당당하게 음식을 거부했습니다.

오늘의 교훈은 이렇습니다. 즉, 누구나 신앙생활을 하면서 웬만한 것은 다 양보합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다를 것이지만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는데 결정적으로 필요한 한 두가지 양보해서는 안되는 것까지도 육의 세상에 양보함으로써 더 큰 믿음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더 큰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중요하고 대단해 보여도 그것이 ‘나’와 관련된 일이라면 내려 놓고 버려도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단순해 보여도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의 시작이고, 하나님 나라 일에 방해가 되는 일이라면 양보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나’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다니엘과 그 친구들은 용기를 가지고 내린 결심으로 받은 축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먼저 이방 바벨론 왕궁 고관들에게 다니엘과 그 친구들이 하나님을 대강 믿는 청년들이 아닌 것을 확실히 알게 한 것이고, 하나님은 이들에게 지식을 더하시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셨으며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게 하신 것입니다. 무엇보다 값있는 축복은 하나님이 평가하시는 신앙기준에 합격 도장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 일을 확인하는데 얼마나 긴 시간이 걸렸습니까? 겨우 열흘이었습니다.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있듯이 결정하고 작심한 믿음의 생활을 열흘을 견디지 못해 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우리의 믿음생활을 흔히 보게 됩니다. 그러나 열흘만 견디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안중근의사가 그를 죽게 한 일본사람들에게서 조차 존경받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대의를 위해 목숨까지도 초계같이 버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육의 세상에서 우리 믿는 이들이 지켜야 내야 할 대의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윤리와 가치입니다. 이 시간, 다니엘과 그 친구들처럼 신앙생활에서 내가 버려야 하는 것들은 무엇인지, 또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하나님 보시기에 칭찬받는 믿음을 위하여 지키기로 작정하고 열흘을 견뎌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귀한 시간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충만한 축복을 받는 귀한 우리 모두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오늘도 말씀으로 기도로 하루를 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원하고 바라옵기는 하나님나라의 삶을 위해서 내가 버려야 할 것을 과감히 버리게 하시고, 또 내가 지켜야 할 것은 죽기 살기로 지켜 낼 수있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특별히 버릴 것과 지킬 것이 혼돈되어 뒤바뀌지 않게 성령님 함께하여 주시고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 모두 올바른 믿음의 생활, 하나님 나라를 향한 신앙의 생활로 나아 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믿사옵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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