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June 28, 2010

나이듦에 대하여(고후 4:16-18)



‘맥도날드에서 Senior Coffee를 청했다’고 했더니 나이드신 권사님 한 분이 ‘너무 좋아하지 말라’ 했습니다. ‘그 만큼 나이가 든 것’이고, ‘그 곳에 갈 날이 가까워 오고 있음’을 잊지 말라는 당부의 뜻이 숨은 줄압니다.

오늘은 어떻게 나이드는 것이 성경적으로 나이 드는 것인지 잠시 묵상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이후 예수가 탄생할 때까지 지구를 살다 간 인류는 기껏해야 2억 5000만~3억명 가량 일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제국 시대로부터 1800년 경 까지 인간의 평균 수명은 30세도 되지 못하던 것이 과학기술문명의 혁명과 더불어 어지간한 나라라면 남자는 평균나이 75세, 여자는 평균나이 82-3세가 넘어 20세기 중반에 두차려의 세계 대전을 겪고도2000년대에는 이미 60억명을 넘어선 까닭에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면 어디나 사람으로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은 바로 나이가 든다는 것입니다. 달릴 때는 몰랐는데 멈추고 돌아 보면 아주 먼 길을 지나 온 것처럼 나와 관계없이 언제나 내 밖에 있는 것이라 생각되던 것이 어느날 갑자기 내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을 깨달아 맥빠지게 하는 것이 바로 나이입니다. ‘나도 이젠 나이가 드는가보다’라는 스스로의 인정과 ‘다 늙어도 나는 안 늙어’라는 묘한 자만심이 서로 싸우게 하고, 스스로는 ‘나이가 들었다’고 인정하는 때에도 남으로부터는 ‘무슨 말씀? 아직도 젊으신데!’라는 말을 듣는 것이 훨씬 좋은 것이 바로 나이입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여자나 남자나 꼭 같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싫어도 누구나 나이를 먹습니다. 그리고 나이듦은 바로 늙어감을 뜻합니다.

그동안 사회의 각 기관들에서 노인계층은 한편으로는 생산에서는 제외되어 무언가를 써 없애기만하는 소비계층으로 보아 왔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돌봄을 받아야 사는 아무런 능력도 없는 계층으로 인식해 왔습니다. 지금까지 노인 세대는 전통적인 윤리의식 속에서 우리 국가와 사회의 발전에 고귀한 경험을 만들어 낸 세대로 대접받고 싶어하고 또 대접하려고 노력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현대 다원주의 산업사회와 그 사회가 중요시하는 배금주의는 노인들과 관련하여 많은 문제를 불러 오고 있습니다. 앞으로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노인과 관련한 사회문제는 세대간 단절로 인해 더욱 심해질 터인데 그렇기 때문에 적어도 우리 믿는이들은 성경적으로 노인을 생각하고 노인들의 문제를 이해하고 풀어 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먼저 성경은 나이가 든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성경은 노인을 나이가 많은 이를 지칭하여 청년 또는 젊은이의 반대어로 말하고, 부모 공경과 같은 맥락에서 노인을 공경의 대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각 지역의 지도자들은 대부분 노인들이었습니다. 구약 성경 전체에 걸쳐 70인 장로들(민11:6)이나 재판장들(신21:2)은 중요한 특권을 가지고 있었고,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레19:32)는 말씀은 구약시대에 있어서 나이 든 어른에 대한 백성들의 태도를 엿볼 수 있게 합니다.
또 ‘젊은 자의 영화는 그 힘이요 늙은 자의 아름다운 것은 백발이니라’(잠20:29)라고 한 것같이 노년은 지혜와 명예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중요한 문제를 결정할 때나 어려운 일이 생길 때 노인들은 의논하고 조언을 구할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나이 든 사람에 대한 구약의 생각은 신약에도 그대로 이어 지고 있어서 바울은 딤전5:1-2에서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비에게 하듯하며 늙은 여자를 어미에게 하듯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노인의 슬기와 지혜를 말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대인이라고 지혜로운 것이 아니요 노인이라고 공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고(욥32:9)하여 노인의 무지와 불완전함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단지 나이가 많다는 선배의식만으로는 더 이상 참 접대를 받기에 부족함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막10:13-16에서 예수님께 축복받으러 나오는 어린아이들을 꾸짖는 제자들에게 화를 내시면서 ‘하나님 나라가 바로 이런 자들의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은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들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나이들어 늙어 가는 것 때문에 오히려 우리 마음이 순수하지 못하고, 그래서 하나님을 순수하게 믿고 신뢰하는 마음이 낡아지고 약해 지는 것을 경계하고 하신 말씀입니다.
또 장로를 택하는데 대한 바울의 가르침(딤전3:1-7)이나 참과부 존대에 대한 권면(딤전 5:3-10)을 보면 청년 곧, 젊은이들이 노인을 어떻게 대접할 것인가도 중요하지만 노인들 스스로 어떻게 나이들어 가야 하는가?의 문제 또한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성경적으로 나이가 들기 위해서 깨달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먼저 겉사람은 반드시 늙는다는 것을 바로 깨닫는 것입니다. 나이드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나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때가 되면 늙어야 하고, 그래서 겉사람은 초라해져야 하는 것이 복입니다. 아무리 화장하고, 변장하고, 포장해도 세월이 갈수록 겉사람은 노쇠하고 무능력해 집니다. 겉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냄새맡고 맛보는 것, 만져 보는 것 등 현실적인 감각과 체험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겉사람은 나이가 들면 후패해지기 마련입니다. 이 사실을 바로 알고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인정하지 않으면 내 안의 ‘나’가 괴로워 할 뿐입니다.
그대신 나이가 들어 가면 겉사람이 아니라 속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속사람은 육신이 주는 감각적인 느낌으로 살지 않고 말씀으로 사는 것입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가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가 안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이 없어도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믿음으로 붙들고 살아가는 삶이 속사람이 사는 방법입니다.

겉사람은 후패해도 여호와를 앙망하는 삶을 사는 속사람은 피곤하거나 곤비치 않으며 언제나 하늘을 차고 오르는 독수리처럼 새 힘이 넘쳐 납니다. 이 힘은 나이와 관계가 없습니다. 속사람이 힘을 얻고 젊어지는 것은 나이와 관계가 없다는 말입니다. 욜2:8을 보면 속사람이 강건한 사람들은 ‘자녀들이나 젊은이나 늙은이가 모두 장래 일을 보고, 이상을 보고 꿈을 꿀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나이가 젊어도 속사람이 늙은 젊은이가 있는가 하면 나이는 들었어도 속사람은 여전히 젊어지는 늙은이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나이가 젊어도 하나님이 ‘오라’ 하시면 꼼짝없이 붙들려 갈 수 밖에 없는 것이 겉사람의 삶 입니다. 그리고 아파트 내 옆 집도 모자라서 동네 아파트 모든 집의 숫가락이 몇 개인지 젖가락이 몇 개인지 세는 삶은 겉사람이 사는 삶입니다. 동네사람 사돈의 팔촌이 뭐 해 먹고 사는지 미주알 고주알 따지는 재미로 사는 삶은 바로 겉사람이 사는 삶입니다. 그 대신 아직 힘이 있을 때 말씀 한 구절이라고도 더 듣고, 말씀 한 줄이라도 더 보려고 애쓰는 삶이 바로 속사람이 젊어지는 삶입니다.

둘째로 성격적으로 나이가 드는 삶은 노년기에 주어진 사명을 올바로 해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학생은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젊은이들은 아직 젊었을 때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나이들어 늙어가는 사람들은 어떤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야 합니까? 노인들의 사명은 바로 ‘타인과 화해’하는 삶입니다. 마음이 아팠던 일들,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과 화해하는 가운데 나이가 들어 가야 합니다. 살아 오면서 마음 속에 쌓였던 부정적인 감정들과 화해하고 용서하여 모든 것과 통합하는 관계 속에서 늙어 가야 합니다. 나이들어 가는 삶들의 진정한 힘은 축복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항상 건성이 아닌 진심으로 축복하고, 무슨 일이든 축복하는 일, 그 일이 나이들어 늙어 가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힘들어 지친 사람들의 도피성이 되어주고 피난처가 되어 줄 수 있는 나이든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어차피 제한적일 수 밖에 없는 인간관계인 것인데 교회 안에서 조차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얽매이다가 그만 발 목을 잡혀 상처 받는 삶은 이제 그만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사는 재미를 찾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사는 재미를 찾으며 사는 것이 성경적으로 나이든 사람의 사는 방식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날을 계수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가인의 자손들은 세월과 관계없이 일에만 몰두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일을 다 마쳤다고 생각했을 때 세월은 그들을 삼켜버렸습니다. 그러나 셋의 자손들은 일에만 몰두하는 대신 날을 계수하는 지혜를 발휘하며 살았습니다. 날을 계수한다는 것은 인생에 끝 날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끝 날이 이르기 전에 자신의 존재와 생명을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의탁하는 삶을 사는 지혜로운 인생입니다.
그 옛날 중국의 양자는 ‘사람이 1 백살을 산다고 해도 거기서 어린시절과 노인시절, 잠자는 시간과 깨어 있어도 헛되이 보내는 시간, 아프고, 슬프고, 괴롭고, 근심하고, 두려워 하는 시간을 빼고 나면 만족하며 보낸 날은 한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탄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나이드는 삶은 환상적인 삶입니다. 비로소 내면의 가치를 깨닫고 그 남은 삶을 영원한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의탁할 수 있는 삶의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나이가 들면 시간은 더욱 빠르게 흘러갑니다. 나이가 들수록 반복되는 일들만 하게 되고, 단조로운 생활이 호기심과 긴장감을 떨어 뜨리기 때문에 시간은 더욱 빠르게 흘러 가는 법입니다. 그리고는 그렇게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 때문에 덧없어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적으로 나이든 삶입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가도 남은 시간을 계수하며 지금이 바로 은혜받을 만한 때임을 깨달으며 한순간, 한순간을 겸손함으로 열심히 사는 것은 바로 성경적으로 나이들어 사는 삶입니다.

금년도 벌써 절반이 흘러갑니다. 아쉽습니다. 그러나 아쉬운 생각이 드는 이 때에 아픈 과거만을 기억하는 삶이 아니라 앞으로 내게 허락될 삶의 시간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가운데 영적으로는 오히려 더욱 충만해지는 삶을 살 수 있는 우리 모두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한해의 마지막 때에나 하던 ‘다사다난’이라는 말이 한 해의 절반을 산 지금 말한다 해도 하나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세상적으로 어려운 때를 살지만 오늘 여기까지 도우시고 인도하신 주님을 감사합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날로 후패하여 가지만 원하고 바라옵기는 우리의 영은 날로 새로워 지고 건강하여 지기를 소원합니다.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지금껏 수십년을 살아온 인생들의 그 마지막이 허접하게 마감되지 않게 하여 주시고, 건강한 몸으로 아름다운 영성을 지닌채 새하늘 새땅으로 이적해 갈 수 있는 영광된 인생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육체적으로 건강하지 못하고, 정신적으로 영적으로도 건강하지 못하여 고통하는 성도들 많사오니 이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어 권능과 치유의 손으로 덮어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믿사옵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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