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April 20, 2010

제비가 돌아 왔습니다



문득 끝머리에 꽈리 깨무는 새소리가 들린다 싶어 고개를 들어 보니 제비가 돌아 와서 전기줄에 앉아 울고 있었습니다. 반가웠습니다. 제비가 반가운 것은 제비가 해충을 잡아 먹는 익조로 알려져있기도 하거니와 또한 흥부놀부의 정서가 우리 몸에 배인 탓이겠지요.

‘이상기후로 겨울이 덥다, 비가 예년보다 많이 온다. 꽃샘추위가 왔다 ‘ 어쩐다 하여 말들이 많았지만 이처럼 제비는 돌아 올 때가 되어 돌아 온 것입니다.
길 바닥이 온통 고추씨를 흩어 놓은 것 같길래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피니 역시 모르는 사이에 감람나무들이 온통 눈을 맞은 듯 하얗게 새봄의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흔히들 시간을 크로노스의 시간과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나누어 말합니다. 단순히 현재의 시간만을 말해 주는 보다 덜 의미있는 시간을 크로노스의 시간이라 말하고, 정해진 인생의 어디 쯤에 있는가?와 같이 조금더 의미가 있는 때를 카이로스의 때라고 말합니다.
날씨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들을 많이 하지만 세상은 하나님이 정하신 그 때에 맞춰 돌아 가고 있음을 금년에도 어김없이 때가 되어 돌아 온 제비를 통해서, 그리고 또 때가 되어 하얗게 꽃을 피운 감람나무를 통해서 알 수 있었습니다. 제비나 감람나무나 사람들이나 금년 한해도 또 하나님이 정하신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가 계신 것일까?라고 불신앙의 생각을 가끔은 하게도 되지만 세상이 아무리 어수선해도, 그래서 사는 것이 버거워도 하나님은 이미 내 마음 깊숙히 들어 와 계심을 우리가 깨닫지 못할 뿐인 것입니다.
내 안에 이미 들어와 계신 하나님을 깨달을 때 우리는 좀 더 가벼워진 어깨로 살 수 있을 줄 압니다.

Monday, April 19, 2010

어느 쪽이 맞을까!


오래된 화재비상벨을 감싼 그물망 안에 작은 새가 둥지를 틀었다. 이 둥지는 그물망 안에 갇힌 것일까? 아니면 안전하게 그물망의 보호를 받고 있는 것일까?

Friday, April 16, 2010

밤이 맟도록 수고하였으나 (눅5:3-10)


모든 일에는 언제나 출발점이 있는 것처럼 진리 탐구에도 출발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진리 탐구에서는 시간이 출발점이 되기도 하고, 내놓을 만한 가정이 출발점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은 진리탐구의 시작점으로부터 성숙되어 가는 과정을 묵상하는 가운데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신약성경에는 열두사도들의 명단이 네군데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10장, 마가복음 3장, 누가복음 6장, 그리고 사도행전 1장입니다. 이곳에 나오는 사도들의 명단들에서 맨처음 등장하는 이름은 언제나 베드로이고, 베드로는 열두제자 무리의 리더이면서 대변인 격으로 두드러진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시몬 베드로의 직업은 원래 어부였습니다. 형제인 안드레와 함께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한 어업을 가업으로 물려 받았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베드로인 시몬이 예수님의 공식적인 제자가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상황입니다. 사실 오늘 이전에도 시몬은 예수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대화한 적도 있었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말을 들은 적도 있었습니다.(마4:18-22, 막1:16-20) 예수님이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는 것도 보았고, 심지어 시몬의 가족이 예수님의 자비와 권능으로 혜택을 입은 적도 있었습니다.(4:38-41) 그런데도 지금까지 시몬이 보고 들은 예수님의 모든 것들은 나와는 별반 상관이 없는 일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날은 상황이 달랐습니다. 고기잡이로 잔뼈가 굵은 이 노련한 어부인 시몬이 고기를 한마리도 잡지 못한 때가 그 날이 처음은 아니 었을 텐데도 그날처럼 밤이 맟도록 수고하고, 빈 그물로 돌아 와 그물을 씻고 이제 빈 손으로 집에 돌아가야 하는 마당에 느끼게 되는 허전한 마음이 아마도 그 날 만큼은 특별하게 새로웠나 봅니다. 그래서 시몬은 말합니다.’밤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수고하여 이미 잡은 고기가 많았는데도 예수의 말씀을 듣고 그물을 내렸겠습니까? 그 빈 그물이 앞으로 시몬을 베드로로 변화하게 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면 누구나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삽니다. 그러나 수고하며 애쓰는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다는 지금의 자기 인식이 바로 신앙의 삶을 향한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애쓰며 살았고, 그 결과 이만큼 지니고 살게 되었다는 자신감이 내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내 목에 힘이 들어 가 사람들을 내려다 보는 한 아직도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기에는 이릅니다. 한시라도 빨리 “밤이 맟도록 수고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다”고 올바르게 내 자신의 현실을 인식해야 합니다.그리고 그것은 바로 축복의 시작점이 됩니다.

고기잡는 일과는 관계가 멀었던 예수님의 말대로 물에 씻어 정리했던 그물을 깊은데로 다시 내린 시몬은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에운 그물을 다른 어부들의 힘을 빌어 겨우 끌어 올릴 수 있었습니다. 눅5:5에서 예수를 “선생”으로 불렀던 시몬이 5:8에서는 예수를 “주”라고 부르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환상을 보았을 때 그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6:5)라고 한 것처럼 시몬은 지금 자신의 죄와 무가치성을 깨닫데 되었습니다. 시몬은 지금껏 사람들이 병에서 고침을 받는 것을 직접 목격하기도 하였고, 예수의 가르침을 들은 적도 있었지만 그것들은 모두 아직은 강건너 김첨지네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그날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고기를 잡게 하신 그 사건을 통해서 시몬은 예수에 대한 환상을 보는 것도 아니고, 예수에 대한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아니고,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시몬은 무릎 꿇고 엎드려 말합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예수님의 정체성과 그로 인해 그 분 안에 계시는 거룩함을 깨달았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곧바로 회개하는 일입니다.. 회개는 무엇입니까? 회개는 생각이 변화하는 경험입니다. 지금까지의 나에 대한 생각이 바뀌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나는 대단한 존재인듯 살아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존재에 대한 정체성을 깨닫는 순간 나는 죄인일 뿐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깨닫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시몬의 회개의 마음을 보신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눅5:1)) 그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좇게 되었고, 시몬도 공식적인 예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올바른 자기 인식이 마라톤의 출발점에 서는 일이라면 회개는 바로 마라톤의 첫발을 내어 딛는것, 올바른 신앙생활의 시작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의 활동을 선지자의 활동이나 엘리야가 와서 활동하는 것으로 오해했습니다. 이 때 예수가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사람들이 내게 대해서 이러구러 말하는 것은 접어두고)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16:13)) 이 질문에 단연 성질급한 베드로가 예수의 존재성에 대해 명답 중의 명답을 말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되 예수를 무엇으로 알고 믿느냐는 것은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앞서 말한대로 내 자신의 현실을 바로 인식하는 때가 진리탐구에 있어서 시간적 출발점이 된다면 이제 예수를 그리스도로,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는 것은 진리탐구를 위한 올바른 가정과 전제의 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인것을 입술로 고백한 자는 새로운 존재로 거듭납니다. 이를 두고 바울은 고후5:17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 거듭난 새로운 존재입니다. 그리스도와 영적인 교제를 갖게 되므로 인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창조행위가 일어나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육의 몸을 입고 동일한 육의 세계를 살므로 언제나 육체의 욕망과 죄에 굴복당 할 가능성을 안고 살아도 지금까지와는 달리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 세계에 대하여 새로운 관계 속에서 살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그리스도를 핍박하였으나 이제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고, 과거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를 인정했으나 지금은 오직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만이 있다고 생각하는 삶을 살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존재가 나아가야 할 곳이 어디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엡4:13이 말씀하십니다. “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믿는 이들의 최종 목적지는 예수그리스도를 온전히 닮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유년기를 벗어나 영적으로 성숙한 인간으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안에, 그리고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과 능력을 채워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무것도 아니었던 한 인간, 고기잡이 베드로가 예수를 믿고, 그의 제자가 되어 그의 믿음을 완성시켜 나아갔던 길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바로 우리들이 지금 걸어 가고 있고, 또 앞으로도 걸어 가야 할 길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모두 다 밤이 맟도록 수고하고 이 자리에 있습니다. 모두 다 우리의 손을 들여다 보십시다. 그 손으로 지금껏 무엇을 이루었습니까? 밤이 맟도록, 이 나이가 들도록 수고하고 애썼는데 무엇이 우리 손 안에 남아있습니까? 허망할 뿐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세상 인생이 헛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에겐 희망이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새로운 피조물로 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우리가 밤이 맟도록 수고한 우리 손에 아무 것도 남겨주지 않아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충만을 약속하십니다. 이 땅에서도 충만된 삶을 살게 하시고, 저 세상에서는 더욱 확실하게 만물이 통일된 세상을 살게 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 증표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날마다 성령님을 바라보고 살고 말씀을 붙들고 살 수 있으니 그저 감사 할 뿐입니다. 다만 지금 나의 존재론적 현실을 올바로 깨닫는 그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때입니다.
다시한번 나를 올바로 깨닫는 귀한 은혜가 이 아침에 있으시기를 소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오늘도 먼저 예배드리는 시간으로 하루를 시작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지금껏 내 손으로 무언가를 이루며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이룬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빈마음이 바로 나로 하여금 은혜 받기에 합당한 시간이 되는 줄을 믿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사는 것이 참으로 버겁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여 주심으로 인하여 큰 힘을 얻어 승리하는 삶을 사는 오늘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믿사옵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Monday, April 12, 2010

잡초에게 배우는 교훈


White clover. Plantain, Chickweed, Spruge. Dandelion, etc. 제초제를 담은 포장부대에 인쇄되어 있는 잡초의 이름들이다. 입맛을 돋구어 준다해서 마켙에서 한 묶음에 1,50$이 넘는 가격에 팔리는 민들레도 잔디를 키우는데는 영락없이 잔디로 취급되어 제초의 대상이 된다.
간만에 작년 년말에 비가 많이 왔고, 금년들어서도 심심치 않게 내려주는 비때문에 가뭄에는 큰 도음이 되고 있지만 잔디를 가꾸고 키우는 일에는 잔디와 더불어 맹렬하게 자라는 잡초 때문에 부가적인 일이 만만치가 않다.

그러나 사실 사람들의 눈에 잡초이지 하나님께서 다 이유가 있어서 자라게 하신 잡초의 입장에서 보면 제초제를 맞고 죽어가야 하는 잡초 처지는 그만 처절할 뿐이다. 잡초의 생태를 바라보노라면 신앙의 길을 걷는 개인이나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생각해 볼 만한 교훈이 있어 함께 나누고자 한다.
첫째, 끼리끼리 모여서 산다. 민들레는 민들레끼리 클로버는 클로버끼리 모여서 산다. 아마도 종족번식의 방법이 더 용이해서 그런지 몰라도 끼리 끼리 모여서 번성하는 것을 본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끼리, 내 수준에 맞는 사람들 끼리만 가까워지는 것이 교회에는 없는지! 그래서 교회 안에서 오히려 더 외로운 존재는 없는지 … 반면에 주변의 좋은 신앙의 모델 그룹에 섞이면 올바르게 신앙의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을런지를 생각해 보기도 한다.

둘째, 비가 오고 난 후를 보면 잔디가 자라는 속도보다 잡초가 자라는 속도가 훨씬 빠르다. 뽑히기도 잘하고, 쓰러지기도 잘하지만 그 자라는 속도는 참으로 빠르다. 그래서 조금만 마음으로 놓으면 천지가 잡초로 변해 속수 무책이 된다. 그래서 잡초는 매일 조금씩 뽑아야 한다.

셋째, 죽기 살기로 자란다. 분재는 살기 힘든 토양에 더하여 물주기등을 식물이 살기 어렵게 만들어 인위적으로 자람을 더디게 만들어 즐기는 식물가꾸기이다. 잡초도 자꾸 깎으면 분재같은 현상이 발생한다. 식물이란 나름대로 뿌리를 내려 자라고 열매를 맺고 씨를 맺어야 할 터인데 자꾸 깎아 주다 보면 분재처럼 키가 한없이 작은데도 꽃을 피우고 씨를 맺는다. 한마디로 죽기 살기로 자란다.

두번째와 세번째 잡초의 특성을 보면서 신앙의 삶이란 늘 깨어 경성해야 하는 것임을 배운다.
흔히들 인생을 잡초에 비유한다. 당연히 교회 내에도 잡초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다만 많고 적음의 차이만 있을 뿐… 이들 잡초를 다 뽑아내고 난 후의 교회는 어떤 모습일까? 뽑는다고 다 뽑을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잡초가 다 뽑힌 교회만이 정말 에덴 동산처럼 아름다운 모습일까? 내 안에서 끊임없이 자라오르는 신앙의 잡초는 또 어찌해야 하는가? 생각이 복잡해 진다.
밖에 자라는 잡초는 호미로 솎아내고 제초제로 그 생명을 끊어 없애도 내 안에 자라는 잡초는 어찌하지 못해 늘 답답할 뿐이다.

종족보존과 확산을 위해 식탁에 올리는 곡물도 옛날에는 잡초의 하나였는데 인간이 그 중 쓸모있는 점만 택해 개발한 것이 작물이자 곡물이고, 인간의 관리에서 벗어나 버려진 듯 막 자란 것이 잡초이듯 잡초같은 인생이라도 하나님의 관리의 손길 안에만 들면 쓰임받는 존재로 일순간에 바뀔수 있는 것이 지금의 잡초같은 나의 인생이 아닐런지!

하나님께서는 잡초나 잔디나 똑같이 사랑하신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Monday, April 5, 2010

내 영혼아 내 주를 찬양하라! (엡1:3-14)

무엇인가가 채워지지 않은 상태를 ‘허전함’이라고 말합니다. 한 끼 식사를 거르면 허전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정도는 다르지만 모두 허전함 속에서 삽니다. 부모와 자식 지간이, 아내와 남편지간이. 선생과 학생지간이 허전합니다. 심지어는 교회생활에서 조차 허전함을 느낍니다.
배속이 허전하면 음식을 먹으면 될 일이지만 마음이 허전하면 무엇으로 채울 수 있습니까? 마음의 허전함이 오래 계속되면 살아 온 인생이 억울하고 그래서 인생이 허무해 집니다. 반대로 곽 채워진 상태는 어떠합니까? 배고픈 갓난아이가 제 양껏 젖먹고 트름하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대견합니까? 보는 부모가 대견할진데 본인이야 얼마나 충만하겠습니까?

부족하면 허전함을 느끼게 되고 사람들은 그 허전함을 다른 무엇으로 채우려고 듭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 만큼 열심히 일에 몰두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 허전함을 술로, 마약으로, 도박으로 채우려 듭니다. 사람이 무엇인가에 집착하게 된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마음에 구멍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이도 저도 안되 자살로 인생을 마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연전에 탤런트 최진실이 자살로 세상을 떳고, 며칠 전에는 그 동생 진영이 자살로 세상을 떳습니다.
원문성경에서 폭포수가 쏟아져 내리듯 ‘찬송하리로다’라는 말을 시작으로 사도바울이 한문장으로 쏟아 부은 본문이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오늘은 바울이 찬양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로 본문을 묵상하는 가운데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엡1:3) 사도 바울이 이렇게 찬송으로 감사 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늘 아버지께서 신령한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영혼 구석 구석을 신령한 복이 주는 충만함으로 채우고 있음을 순간 순간마다 확인하며 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모든 신령한 복’을 다 받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모든’은 모든 종류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있는 모든 종류의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다 주셨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 원하는 복은 하늘의 신령한 복이라는 사실입니다. 성도가 받는 신령한 복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께 속한 복을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입니다.
하늘의 신령한 복은 이 땅에서 사는데 필요한 물질적인 축복은 좀 부족해도 나로 하여금 평안가운데 풍성하게 살게 하는 복입니다. 하늘의 신령한 복은 고픈 배를 라면 한 그릇으로 때울 수 있는 것과 같은 말초적인 복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은 구체적으로 어떤 복입니까? 사도 바울은 그 복을 4절로 14절에서 길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선택의 축복입니다. 그것은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신’것입니다.(엡1:4a)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의 모든 것을 아시는 지식과 판단으로 ‘나’와 ‘여러분’모두를 개별적으로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일방적으로 저와 여러분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부정하고 악한 우리를 택하시고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흠없는 존재로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몸으로 마음으로 알았으므로 그 받은 복에 감격하면서 ‘찬송하리로다’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은 양자됨의 축복입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성도가 받은 두번째의 복은 바로 수양의 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로 입양되었다는 것은 본래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음이 전제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신분의 존재였습니까? 우리는 본래 불순종의 아들이었으며,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하시려는 계획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실현하셨고,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누리시는 아들의 권리를 똑 같이 받아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어느날 갑자기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 오셔서 죄의 종된 신분에서 우리를 불러 내셔서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 주신 복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 나기도 전에 우리의 부족함을 아시고 그것을 보셨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미리 작정하시고, 때가 되어 태어 나게 하시고, 또 때가 됨에 그 누군가를 통해 목음을 들어 받아 들이게 하시므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바울은 이 복을 인하여 하나님께 찬송하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세번째 신령한 복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주신 ‘구속’과 ‘죄사함’의 복입니다.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 그리고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음을 아는 사람은 죄사함을 받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가를 알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다윗의 시편을 인용하면서 죄사함 받은 사람의 행복을 노래합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는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롬4:7-8, 시32:1-2) 그리고 바울은 본문 7절의 말씀을 통해 죄사함 받은 감격을 밝히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성자 예수님에 의한 구속과 죄사함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이루어 졌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에 압도 당한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네번째 신령한 복은 하나님께서 하늘의 비밀을 성도인 우리에게 알려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비밀을 알려 줄 시기와 방법을 신중히 결정하셨고, 알려 줄만한 대상을 지혜롭게 선택하셨는데 그 대상이 성도의 무리이고, 그 무리 가운데 저와 여러분이 포함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려 주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특별한 존재로 대우하시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에게는 큰 복이 되는 것입니다.
12절로 14절을 보면 ‘우리’와 ‘너희’ 그리고 또다시 ‘우리’가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2절의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소망을 가진 우리’에서 ‘우리’는 이방인들보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유대인 성도들 입니다. 13절의 ‘그 안에서 너희도’의 ‘너희’는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유대인 백성과 동일하게 구원받은 이방인들입니다. 13절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려는 것은 유대인 성도들과 이방인 성도들이 함께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 되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과거 내가 어떤 신분의 사람이었든지. 가진 자든지 못가진 자이든지. 배운 자이든지 못 배운 자이든지 하나님에 의해 택함을 받아 성도의 무리 가운데 들어 가게 된 것, 같은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 믿음의 공동체에 속함으로 이루어 진 것, 이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이처럼 믿음 때문에 생겨진 공동체입니다.

14절에서 바울은 ‘우리의 기업’을 말합니다. 바울은 기업이라는 말을 통해서 하늘의 신령한 복을 다시 한번 정리하고 있습니다. ‘우리 기업’은 유대인 성도들과 이방인 성도들이 동일하게 받아 누리게 될 기업입니다. 그리고 기업은 바로 신령한 복입니다. 베드로는 벧전 1:3-4에서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이처럼 기업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 하신 것으로 모든 신령한 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인치심을 통해서 백성들이 자기 소유임을 주장하시고 앞으로 천국에서 누릴 영광스러운 생명과 모든 복들이 머리 속에서나 그려보는 환상이 아니라 실재적인 것임을 보증하시고, 또 성령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지금 이 땅에서 하늘에 속한 영광스러운 생명과 복을 미리 맛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이 모든 것을 하니님이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힘을 주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땅의 삶이 갈수록 힘이 듭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 본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보물의 가치, 신령한 복의 가치를 깨닫게 되면 이 세상의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의 육적인 삶이 우리를 둘러싼 환경과 조건 속에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어도 신령한 복들로 인해 사도 바울처럼 찬송하며, 감격하며 소망을 가지고 살아 갈 수 있을 줄을 믿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소원이십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부활절이 뒤에 맞는 첫 아침, 하나님이 주신 신령한 복의 의미를 다시 한번 깨닫는 귀한 은혜가 있으시기를 소원합니다 누군가 꾀꼬리의 울음 소리는 귀로 들어도 뻐꾸기의 울음소리는 가슴으로 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소리는 귀로 들어도 하나님이 주시는 영혼을 살리는 복음의 소리는 가슴으로 들을 수 있어야 은혜가 됩니다. 그래서 지난 날의 아련한 은혜 때문이 아니라 하늘의 신령한 복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하신 이 아침의 은혜 때문에 가슴이 벅차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며 사는 우리 모두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마치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Thursday, April 1, 2010

비둘기 수난


그 여인의 힘이 어린 양에 미치지 못하거든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새끼 둘을 가져다가 하나는 번제물로 하나는 속죄 제물로 삼을 것이요…(레12:8)
이처럼 비둘기는 없는 사람들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켜 줄 수 있는 희생제물감으로 손색이 없었습니다.

굳이 성경을 말하지 않아도 바둘기는 역사적으로 쓸모가 많았습니다. 어린 비둘기의 고기는 인기가 있어서 기원전 3천년 전부터 애용되어 왔고, 배설물은 비료와 화약의 원료로 요긴하게 쓰여 유럽에서는 정부에서 주기적으로 수거해 가기도 했습니다. 건물에 원통형 비둘기 집을 설치하는 것은 유럽 상류층의 상징으로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강한 귀소 본능으로 전쟁시에는 전령 비둘기들이 이름과 군번까지 부여 받아 맹활약을 해서 2차 대전 때만해도 미군 비둘기 부대에 5만 4천마리의 비둘기가 150명의 군인과 함께 복무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던 비둘기가 수난의 시대를 맞고 있습니다. 비둘기가 유해 조류로 지정이 되고 정부가 직접나서서 서식을 억제하고 관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조치는 이미 구미각국에서도 실시되고 있는 조치이기도 합니다. 실로 기구한 운명을 맞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원인은 인간이 만든 환경 변화에 놀랍게 적응한 결과입니다.

닭둘기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도시에 서식하면서 스레기통이나 공원 등에서 먹이를 마구 먹어 닭처럼 피둥 피둥하고 잘 날지도 못하는 비둘기를 뜻하는 신조어입니다. 닭둘기는 이둘기라고도 불리는데 이것은 비둘기에 이나 진드기 등 기생충이 많이 붙어 서식하고 있음을 빗댄 말입니다. 한 때 평화의 상징이었던 비둘기가 비둘기에 대한 신조어가 말해 주는 것처럼 세계 각국에서 오늘날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유해조류가 되어 천더구러기가 된 것입니다.

사회 조직에서도 까딱하면 사람들도 닭둘기, 이둘기처럼 천덕구러기가 됩니다. 예로부터 사람, 곧 인재를 세부류로 나누었습니다. 첫번째 인재 (人災) 는 있으면 오히려 해가 되는 사람이고, 두번째 인재(人在 )는 있나 마나한 사람이며, 세번째 인재(人才) 가 바로 사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처음에는 세번째 인재, 곧 사회가 필요로 하고 인정하는 그런 사람이었더라도 사는 동안에 삶의 무게에 짓눌리는 가운데 전통적인 삶의 방식에 고착화되어 매너리즘에 빠져 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닭둘기 같은 존재가 되어 천덕구러기가 됩니다.

나이먹어 뒷전으로 물러날 수 밖에 없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삶의 이치라해도 그냥 저냥 살다가 닭둘기 신세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날마다 새로운 환경에 관심을 갖고, 새로운 것을 습득하고, 알아 들으려고 , 적응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조금이나마 닭둘기 같은 신세로 내몰리는 시간을 연장해야 합니다. 이것은 구차스럽게 생명을 연장하려는 삶이 아니라 말 그대로 명퇴를 원하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내 나이가 얼마이건 그냥 늙어버려서는 안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