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인가가 채워지지 않은 상태를 ‘허전함’이라고 말합니다. 한 끼 식사를 거르면 허전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정도는 다르지만 모두 허전함 속에서 삽니다. 부모와 자식 지간이, 아내와 남편지간이. 선생과 학생지간이 허전합니다. 심지어는 교회생활에서 조차 허전함을 느낍니다.
배속이 허전하면 음식을 먹으면 될 일이지만 마음이 허전하면 무엇으로 채울 수 있습니까? 마음의 허전함이 오래 계속되면 살아 온 인생이 억울하고 그래서 인생이 허무해 집니다. 반대로 곽 채워진 상태는 어떠합니까? 배고픈 갓난아이가 제 양껏 젖먹고 트름하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대견합니까? 보는 부모가 대견할진데 본인이야 얼마나 충만하겠습니까?
부족하면 허전함을 느끼게 되고 사람들은 그 허전함을 다른 무엇으로 채우려고 듭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 만큼 열심히 일에 몰두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 허전함을 술로, 마약으로, 도박으로 채우려 듭니다. 사람이 무엇인가에 집착하게 된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마음에 구멍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이도 저도 안되 자살로 인생을 마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연전에 탤런트 최진실이 자살로 세상을 떳고, 며칠 전에는 그 동생 진영이 자살로 세상을 떳습니다.
원문성경에서 폭포수가 쏟아져 내리듯 ‘찬송하리로다’라는 말을 시작으로 사도바울이 한문장으로 쏟아 부은 본문이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오늘은 바울이 찬양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로 본문을 묵상하는 가운데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엡1:3) 사도 바울이 이렇게 찬송으로 감사 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늘 아버지께서 신령한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영혼 구석 구석을 신령한 복이 주는 충만함으로 채우고 있음을 순간 순간마다 확인하며 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모든 신령한 복’을 다 받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모든’은 모든 종류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있는 모든 종류의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다 주셨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 원하는 복은 하늘의 신령한 복이라는 사실입니다. 성도가 받는 신령한 복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께 속한 복을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입니다.
하늘의 신령한 복은 이 땅에서 사는데 필요한 물질적인 축복은 좀 부족해도 나로 하여금 평안가운데 풍성하게 살게 하는 복입니다. 하늘의 신령한 복은 고픈 배를 라면 한 그릇으로 때울 수 있는 것과 같은 말초적인 복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은 구체적으로 어떤 복입니까? 사도 바울은 그 복을 4절로 14절에서 길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선택의 축복입니다. 그것은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신’것입니다.(엡1:4a)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의 모든 것을 아시는 지식과 판단으로 ‘나’와 ‘여러분’모두를 개별적으로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일방적으로 저와 여러분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부정하고 악한 우리를 택하시고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흠없는 존재로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몸으로 마음으로 알았으므로 그 받은 복에 감격하면서 ‘찬송하리로다’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은 양자됨의 축복입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성도가 받은 두번째의 복은 바로 수양의 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로 입양되었다는 것은 본래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음이 전제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신분의 존재였습니까? 우리는 본래 불순종의 아들이었으며,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하시려는 계획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실현하셨고,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누리시는 아들의 권리를 똑 같이 받아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어느날 갑자기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 오셔서 죄의 종된 신분에서 우리를 불러 내셔서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 주신 복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 나기도 전에 우리의 부족함을 아시고 그것을 보셨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미리 작정하시고, 때가 되어 태어 나게 하시고, 또 때가 됨에 그 누군가를 통해 목음을 들어 받아 들이게 하시므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바울은 이 복을 인하여 하나님께 찬송하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세번째 신령한 복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주신 ‘구속’과 ‘죄사함’의 복입니다.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 그리고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음을 아는 사람은 죄사함을 받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가를 알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다윗의 시편을 인용하면서 죄사함 받은 사람의 행복을 노래합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는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롬4:7-8, 시32:1-2) 그리고 바울은 본문 7절의 말씀을 통해 죄사함 받은 감격을 밝히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성자 예수님에 의한 구속과 죄사함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이루어 졌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에 압도 당한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네번째 신령한 복은 하나님께서 하늘의 비밀을 성도인 우리에게 알려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비밀을 알려 줄 시기와 방법을 신중히 결정하셨고, 알려 줄만한 대상을 지혜롭게 선택하셨는데 그 대상이 성도의 무리이고, 그 무리 가운데 저와 여러분이 포함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려 주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특별한 존재로 대우하시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에게는 큰 복이 되는 것입니다.
12절로 14절을 보면 ‘우리’와 ‘너희’ 그리고 또다시 ‘우리’가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2절의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소망을 가진 우리’에서 ‘우리’는 이방인들보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유대인 성도들 입니다. 13절의 ‘그 안에서 너희도’의 ‘너희’는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유대인 백성과 동일하게 구원받은 이방인들입니다. 13절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려는 것은 유대인 성도들과 이방인 성도들이 함께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 되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과거 내가 어떤 신분의 사람이었든지. 가진 자든지 못가진 자이든지. 배운 자이든지 못 배운 자이든지 하나님에 의해 택함을 받아 성도의 무리 가운데 들어 가게 된 것, 같은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 믿음의 공동체에 속함으로 이루어 진 것, 이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이처럼 믿음 때문에 생겨진 공동체입니다.
14절에서 바울은 ‘우리의 기업’을 말합니다. 바울은 기업이라는 말을 통해서 하늘의 신령한 복을 다시 한번 정리하고 있습니다. ‘우리 기업’은 유대인 성도들과 이방인 성도들이 동일하게 받아 누리게 될 기업입니다. 그리고 기업은 바로 신령한 복입니다. 베드로는 벧전 1:3-4에서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이처럼 기업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 하신 것으로 모든 신령한 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인치심을 통해서 백성들이 자기 소유임을 주장하시고 앞으로 천국에서 누릴 영광스러운 생명과 모든 복들이 머리 속에서나 그려보는 환상이 아니라 실재적인 것임을 보증하시고, 또 성령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지금 이 땅에서 하늘에 속한 영광스러운 생명과 복을 미리 맛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이 모든 것을 하니님이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힘을 주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땅의 삶이 갈수록 힘이 듭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 본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보물의 가치, 신령한 복의 가치를 깨닫게 되면 이 세상의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의 육적인 삶이 우리를 둘러싼 환경과 조건 속에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어도 신령한 복들로 인해 사도 바울처럼 찬송하며, 감격하며 소망을 가지고 살아 갈 수 있을 줄을 믿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소원이십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부활절이 뒤에 맞는 첫 아침, 하나님이 주신 신령한 복의 의미를 다시 한번 깨닫는 귀한 은혜가 있으시기를 소원합니다 누군가 꾀꼬리의 울음 소리는 귀로 들어도 뻐꾸기의 울음소리는 가슴으로 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소리는 귀로 들어도 하나님이 주시는 영혼을 살리는 복음의 소리는 가슴으로 들을 수 있어야 은혜가 됩니다. 그래서 지난 날의 아련한 은혜 때문이 아니라 하늘의 신령한 복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하신 이 아침의 은혜 때문에 가슴이 벅차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며 사는 우리 모두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마치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배속이 허전하면 음식을 먹으면 될 일이지만 마음이 허전하면 무엇으로 채울 수 있습니까? 마음의 허전함이 오래 계속되면 살아 온 인생이 억울하고 그래서 인생이 허무해 집니다. 반대로 곽 채워진 상태는 어떠합니까? 배고픈 갓난아이가 제 양껏 젖먹고 트름하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대견합니까? 보는 부모가 대견할진데 본인이야 얼마나 충만하겠습니까?
부족하면 허전함을 느끼게 되고 사람들은 그 허전함을 다른 무엇으로 채우려고 듭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 만큼 열심히 일에 몰두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 허전함을 술로, 마약으로, 도박으로 채우려 듭니다. 사람이 무엇인가에 집착하게 된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마음에 구멍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이도 저도 안되 자살로 인생을 마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연전에 탤런트 최진실이 자살로 세상을 떳고, 며칠 전에는 그 동생 진영이 자살로 세상을 떳습니다.
원문성경에서 폭포수가 쏟아져 내리듯 ‘찬송하리로다’라는 말을 시작으로 사도바울이 한문장으로 쏟아 부은 본문이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오늘은 바울이 찬양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로 본문을 묵상하는 가운데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엡1:3) 사도 바울이 이렇게 찬송으로 감사 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늘 아버지께서 신령한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영혼 구석 구석을 신령한 복이 주는 충만함으로 채우고 있음을 순간 순간마다 확인하며 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모든 신령한 복’을 다 받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모든’은 모든 종류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있는 모든 종류의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다 주셨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 원하는 복은 하늘의 신령한 복이라는 사실입니다. 성도가 받는 신령한 복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께 속한 복을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입니다.
하늘의 신령한 복은 이 땅에서 사는데 필요한 물질적인 축복은 좀 부족해도 나로 하여금 평안가운데 풍성하게 살게 하는 복입니다. 하늘의 신령한 복은 고픈 배를 라면 한 그릇으로 때울 수 있는 것과 같은 말초적인 복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은 구체적으로 어떤 복입니까? 사도 바울은 그 복을 4절로 14절에서 길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선택의 축복입니다. 그것은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신’것입니다.(엡1:4a)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의 모든 것을 아시는 지식과 판단으로 ‘나’와 ‘여러분’모두를 개별적으로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일방적으로 저와 여러분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부정하고 악한 우리를 택하시고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흠없는 존재로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몸으로 마음으로 알았으므로 그 받은 복에 감격하면서 ‘찬송하리로다’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은 양자됨의 축복입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성도가 받은 두번째의 복은 바로 수양의 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로 입양되었다는 것은 본래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음이 전제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신분의 존재였습니까? 우리는 본래 불순종의 아들이었으며,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하시려는 계획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실현하셨고,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누리시는 아들의 권리를 똑 같이 받아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어느날 갑자기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 오셔서 죄의 종된 신분에서 우리를 불러 내셔서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 주신 복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 나기도 전에 우리의 부족함을 아시고 그것을 보셨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미리 작정하시고, 때가 되어 태어 나게 하시고, 또 때가 됨에 그 누군가를 통해 목음을 들어 받아 들이게 하시므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바울은 이 복을 인하여 하나님께 찬송하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세번째 신령한 복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주신 ‘구속’과 ‘죄사함’의 복입니다.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 그리고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음을 아는 사람은 죄사함을 받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가를 알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다윗의 시편을 인용하면서 죄사함 받은 사람의 행복을 노래합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는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롬4:7-8, 시32:1-2) 그리고 바울은 본문 7절의 말씀을 통해 죄사함 받은 감격을 밝히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성자 예수님에 의한 구속과 죄사함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이루어 졌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에 압도 당한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네번째 신령한 복은 하나님께서 하늘의 비밀을 성도인 우리에게 알려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비밀을 알려 줄 시기와 방법을 신중히 결정하셨고, 알려 줄만한 대상을 지혜롭게 선택하셨는데 그 대상이 성도의 무리이고, 그 무리 가운데 저와 여러분이 포함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려 주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특별한 존재로 대우하시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에게는 큰 복이 되는 것입니다.
12절로 14절을 보면 ‘우리’와 ‘너희’ 그리고 또다시 ‘우리’가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2절의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소망을 가진 우리’에서 ‘우리’는 이방인들보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유대인 성도들 입니다. 13절의 ‘그 안에서 너희도’의 ‘너희’는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유대인 백성과 동일하게 구원받은 이방인들입니다. 13절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려는 것은 유대인 성도들과 이방인 성도들이 함께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 되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과거 내가 어떤 신분의 사람이었든지. 가진 자든지 못가진 자이든지. 배운 자이든지 못 배운 자이든지 하나님에 의해 택함을 받아 성도의 무리 가운데 들어 가게 된 것, 같은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 믿음의 공동체에 속함으로 이루어 진 것, 이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이처럼 믿음 때문에 생겨진 공동체입니다.
14절에서 바울은 ‘우리의 기업’을 말합니다. 바울은 기업이라는 말을 통해서 하늘의 신령한 복을 다시 한번 정리하고 있습니다. ‘우리 기업’은 유대인 성도들과 이방인 성도들이 동일하게 받아 누리게 될 기업입니다. 그리고 기업은 바로 신령한 복입니다. 베드로는 벧전 1:3-4에서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이처럼 기업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 하신 것으로 모든 신령한 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인치심을 통해서 백성들이 자기 소유임을 주장하시고 앞으로 천국에서 누릴 영광스러운 생명과 모든 복들이 머리 속에서나 그려보는 환상이 아니라 실재적인 것임을 보증하시고, 또 성령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지금 이 땅에서 하늘에 속한 영광스러운 생명과 복을 미리 맛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이 모든 것을 하니님이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힘을 주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땅의 삶이 갈수록 힘이 듭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 본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보물의 가치, 신령한 복의 가치를 깨닫게 되면 이 세상의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의 육적인 삶이 우리를 둘러싼 환경과 조건 속에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어도 신령한 복들로 인해 사도 바울처럼 찬송하며, 감격하며 소망을 가지고 살아 갈 수 있을 줄을 믿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소원이십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부활절이 뒤에 맞는 첫 아침, 하나님이 주신 신령한 복의 의미를 다시 한번 깨닫는 귀한 은혜가 있으시기를 소원합니다 누군가 꾀꼬리의 울음 소리는 귀로 들어도 뻐꾸기의 울음소리는 가슴으로 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소리는 귀로 들어도 하나님이 주시는 영혼을 살리는 복음의 소리는 가슴으로 들을 수 있어야 은혜가 됩니다. 그래서 지난 날의 아련한 은혜 때문이 아니라 하늘의 신령한 복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하신 이 아침의 은혜 때문에 가슴이 벅차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며 사는 우리 모두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마치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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