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March 23, 2010

빈들에 마른 풀 같을지라도(사32:15)


한 15년 쯤전에 여행 삼아 미국 땅에 처음 왔을 때의 느낌이란 여유로움 그 자체였습니다. 맥도날드에서 32oz 컵에 담아 주는 얼음 섞인 코카콜라, 평지 골프코스에 품어대는 스프링클러, 이름모를 회사 국기 게양대에 매달려 한가롭게 나부끼는 큼지막한 성조기, 5번 프리웨이, 101번 프리웨이로 한없이 펼쳐지는 벌판, 이들이 주는 느낌이란 바로 미국적 여유로움 그것이었습니다.

산천은 그 산천이었지만 10년전부터 이민의 삶을 사는 동안 내 안에서 바뀌어 버린 환경 때문에 15년 전 그 여유로움은 간데 없이 일종의 자괴감만 남았었습니다. ‘저 넓은 땅에 내 집 지을 땅은 한평도 없구먼!,”, “넌 그 동안 무얼하며 살아왔나!”

이번 휴가를 감사함으로 받아 똑같은 길을 가보았습니다. 도시를 벗어나 곧 펼쳐지는 그 광활한 광야, 벌판을 바라보는 가운데 감동으로 떠 오르게 하신 찬송이 방금 부른 ‘빈 들에 마른 풀같이’였습니다. 그리고 길지 않은 여행 내내 빈들의 의미를 새겨 보았습니다.
광야는 어떤 곳입니까? 광야는 텅 비어 있는 곳입니다. 텅 비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광야는 모든 것을 정화하고 새롭게 만들어 가는 역사의 빈들, 마음의 빈들입니다.

성경은 빈들에 관해서 자주 말합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평화의 왕 예수가 태어났다는 소식도 빈들에서 밤새워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제일 먼저 전해졌고, 하나님의 구원의 소식은 텅 빈 광야의 어둠 속에서 추위에 떨며 밤새워 남의 양떼나 지키던 희망 없는 사람들에게 제일 먼저 전해졌습니다.
목자들이 밤새워 양떼를 지키던 빈들은 홍해의 기적을 체험한 이스라엘이 40년 간 헤매던 그 빈들이었고, 이스라엘이 한때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과 정의와 평화가 넘치는 공동체를 이루기로 순결하게 다짐했던 그 빈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언자 호세아는 부패하고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빈들로 나가자고 호소했습니다. 빈들에서 하나님에 대한 옛 사랑을 되찾고, 정의와 평화의 공동체를 다시 시작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때묻은 삶을 청산하고 광야로 나가서 여호와 하나님과 다시 시작하자는 것입니다
광야는 또 이 세상은 ‘할 수 없는 일이 더 많은 세상’임을 깨닫게 해 주는 장소입니다. 바싹 마른 잡목과 바싹 마른 풀들이 널려 있는 빈들이건 끝없이 모래 사막으로 펼쳐진 광야이건 우리가 그런 곳에 홀로 버려졌을 때 우리에게 드는 느낌은 어떤 것입니까? 황량하고 부족함, 쓸쓸하고 외로움, 고통스러움과 견디기 힘듬, 이런 것들입니다. 왜입니까? 멀리서 바라보면 바싹 마른 풀들조차 황금색의 물결로 아름답게 보이는 곳이기는 해도 잠깐 머무는 곳이 아니라 나 홀로 버려지는 곳이라면 이처럼 부정적인 느낌이 드는 것은 광야, 빈들에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별반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기술 혁명과 전문가 시대는 ‘ 할 수 있다’의 긍정적인 사고의 길로 우리를 자연스럽게 인도해 갔습니다. ‘열심히 돈만 벌어 봐라!’ ‘세상에 뭐가 무섭겠나?’ 그 일이 아무리 무시무시하고, 어려워 보여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인간이 달 나라에 간 것은 이미 그 옛날 일이 되어 버렸고, 그 먼 우주 공간에 우주선을 띄워 보내고, 우리가 사는 지구 바깥을 우주 왕복선을 타고 왔다 갔다 하는 판국에 그 문제에 딱 들어 맞을 전문가들만 있으면, 그들을 고용할 재력만 있으면 해결되지 않을 .일이 없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과거의 경험과 기회, 기술 혁명, 전문가 집단의 존재는 긍정적인 사고의 힘을 무조건 믿게 만드는 요인이 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사실 많은 광야들이 개척되어 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에겐 과거의 기술과 경험, 전문가 집단이 어쩌지 못하는 새로운 광야, 새로운 빈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지금까지는 우리를 둘러 싼 외적 환경을 바꾸기 위해 애써 왔다면 이제부터는 우리 스스의 가능성를 발견하려는 노력, 우리의 인간 내면 자체가 새로운 개척지, 새로운 광야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자기 중심의 탐닉 시대를 만들어 내게 하였습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물질적으로 더 많은 것을 누리며 사는 시대가 되었지만 우리네 인간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진한 허탈감에 빠져 사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난 할 수 있다’는 정신 무장으로 힘껏 노력하고 거기다가 하나님의 은혜까지 더해져 목표했던 것을 이루어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삶은 그곳에서 끝나지 않기에 또 다시 부족한 것이 생기고 마련이고, 게다가 그 부족한 것들 중의 어떤 것들은 살아 생전 결코 이루어 질 수 없는 것들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아무리 일년 열 두달을 하루 같이 긍정적 사고에 젖어 살아도 내 욕구의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는 않는 인생의 한계가 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비애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네 인생들입니다. 이처럼 우리 모두는 이루지 못한 꿈의 아픔을 안고 살아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여기서 광야는 바로 삶의 긴 여정 속에서 우리네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별반 없는 곳임을 깨닫게 해 주는 곳입니다.
특별히 그 문제가 우리의 영적인 문제인 때에, 그 문제가 우리의 죄와 관련된 문제인 때에 광야는 우리로 하여금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곳임을 깨닫게 해 주는데 더 없이 좋은 장소 입니다. 그 옛날 예수도 이 사실을 진작부터 깨달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광야에 나가 시험을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가 시험받은 유대광야는 죽음의 바다인 사해 근처에 있습니다. 요단강은 갈릴리 호수에서 발원하여 사해로 흘러 들어갑니다. 갈릴리 호수는 수량이 풍부하고 물고기가 아주 많은 생명의 호수이지만 사해는 너무 짜서 아무것도 살 수 없는 죽음의 바다입니다. 요단강은 생명의 호수 갈릴리에서 발원하여 죽음의 바다인 사해로 흘러 들어갑니다.

그런데도 예수는 갈릴리 마을들로 들어가기 전에 사해 옆에 있는 유대 광야로 들어가서 시험을 받습니다. 죽음의 바다 길목의 빈들에서 그는 마지막 남은 번뇌의 씨앗을 소탕한 것입니다. 굶주림과 고독 속에서 천국과 지옥 사이를 넘나들며 내면과의 외로운 싸움을 통해 마침내 대 자유를 얻게 된 것입니다.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를 잃는 대신 더 큰 나를 얻는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의 신비 안에 들어 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는 그 빈들에서 문명의 치장이 없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인간의 힘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빈들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생명의 신비 안에 있는 사람으로서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날아오를 수도 있게 되었고, 해와 달과 교감할 수도 있게 되었으며, 새들과 말하고, 벌레들의 소리를 알아 들을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온 우주에 가득 찬 생명의 기운들을 느낄 수 있게 되었고, 상처받은 영들의 탄식과 기쁨의 소리를 들을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뭇 생명과 하나가 되어 함께 울릴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때 비로소 예수는 갈릴리 마을들로 들어가 인류 구원의 역사를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광야는 우리에게도 참으로 소중한 의미를 갖습니다.

긴 인생을 사는 동안 우리는 종종 광야의 삶을 동경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에 배어든 습관화되 기질, 습기(習氣)를 떨어 내고 싶은 마음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빈 곳에 오래 머물러 있고 싶은 사람은 많지 않은 것은 우리의 힘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한계상황에 오랫동안 있는 것 자체가 별로 유쾌한 일이 못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네가 아무리 버텨도 결국에는 갈 수 밖에 없는 곳이 인생살이의 ‘빈 들’입니다. 그 빈들의 이름은 다름아닌 실패, 절망, 고독, 우울, 무기력, 허무 등입니다. 이런 것들이 만들어 내는 한계 상황 속에서 우리 스스로를 찬찬히 돌아 볼 때 빈들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에게 흘러들어오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삶의 빈들은 또 다른 은혜가 됩니다.

지금 인생의 빈들에서 서성이는 우리들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 빈들에는 오직 죽음만이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에도 생명은 살아 있습니다. 지금은 비록 바싹 마른 풀들만이 눈에 보여도 이제 하나님이 철따라 우로를 내려 주시면 그곳에도 초목이 무성하게 되어 생명은 살아 움직일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미 경험으로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망을 갖습니다. 지금 우리가 인생의 빈들을 살아도 하나님의 성령의 빗물이 우리에게 가득 넘쳐 흘러 내리기만 하면 우리의 심령도 새생명으로 가득차게 된다는 그 확신에서 큰 믿음을 갖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말씀하십니다.’필경은 위에서부터 성신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눈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삼림으로 여기게 되리라’

말씀을 정리합니다.
빈들은 황량한 곳이기는 하지만 분주한 현실을 떠나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 영적 정체성을 돌아 볼 수 있는 좋은 곳입니다. 빈들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영적으로 마지막의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일입니다 일상의 숨가쁜 회전 속에서 내가 누구인지?, 왜 사는지?를 잠시 돌아 보는 여유를 가지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꼭 광야로 빈들로 나가야만 되는 일도 아닙니다. 대신 수많은 군중 속에 섞여 사는 힘없는 존재이지만 광야같은 마음, 빈들과 같은 마음으로 우리 자신을 주님 앞에 내어 놓고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으려고 애쓰면서 사는 것이 바로 빈들의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가 회개하라고, 빈 마음이 되라고 선언한 것은 우리의 빈 마음에 예수가 찾아 올 수 있고, 우리의 빈 마음에 그리스도의 새로운 나라가 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오랜 가뭄으로 몸도 마음도 온통 먼지 투성이입니다. 성령의 단비로 후련하게 씻김을 받는 귀한 시간 되기기를 소원합니다. 빈들의 삶을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큰 은총을 경험하는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Monday, March 15, 2010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






이제는 겨울이 다 지나갔는지 벌써 해가 많이 길어졌고 어느덧summer time이 시작 되었습니다.


하루의 일과를 끝내면서 무심코 서쪽 하늘을 바라 보면 가끔 해가 지는 석양 무렵에 햇빛을 한껏 머금은 구름을 볼 때 감탄을 하게 됩니다.
사실 구름은 변화 무쌍한 모습때문에 그간 많은 사진작가들이 선호하는 주제 중의 하나가 되어 왔었습니다. 특히 사진사에서는 근대사진의 개척자로 알려진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 미국, 1864~1946)의 ‘구름’ 사진 시리즈가 유명하고, 한국사진에서는 중견사진가 김광수의 구름사진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스티글리츠의 구름 사진은 은퇴 후 쓸쓸하게 노년을 보내는 작가의 마음을 상징하고 있고, 김광수의 구름 사진은 현대적인 구조물과 연계되어서 현대 문명의 특정한 단면을 반영하거나 강한 컨트라스트의 구름 사진은 언어 밖에 있는 작가의 심리적인 흐름을 표출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미국 땅 태평양을 마주한 캘리포니아에서는 일출의 구름보다는 석양의 구름이 더 보기 쉬울지도 모릅니다. 정말 가끔은 한숨을 자아내리만큼 그 자태가 아름답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그러면서도 섬듯해집니다. 저 모습이 얼마나 오래 갈까? 저 구름에 내 인생을 싣는다면 어찌 될까? 하나님의 심사가 저 구름처럼 변화 무쌍하다면 이 각박하고 어려운 세상 삶속에서 하나님마저 어찌 믿을 수 있을까?

그러나 우매한 나의 마음을 미리 간파하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 분은 신실하고 식언치 않으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라고...

우리는 구름에 달가듯이 하나님의 운행하심에 그저 우리를 내어 맡기면 될 뿐입니다.
그래서 또 한번 감사합니다.

(신 7:9)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민 23:19)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Tuesday, March 9, 2010

꽃샘추위


“많이도 온다.”
우수와 경칩이 지나면 대동강물이 풀린다고 해서 완연한 봄을 느끼게 된다고 하는데 때늦은 함박눈이 얼마나 많이 오는지 서울 종로구 청운동에 내리는 눈 풍경사진을 곁들여 기사를 실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미국 땅에도 금년에는 지역에 따라 비도 많이오고 눈도 많이 내렸습니다.
경칩이지나 추위가 끝나나 싶을 때면 영락없이 소위 꽃샘 추위가 한두번 찾아 옵니다. 한겨울 추위 같으면 미리 맘먹고 대비해서 두꺼운 옷도 미리 입어 보지만 이제 추위는 그만 이다 싶고 한낮의 햇살이 때로는 이마의 땀마저 맺히게 하는 때에 갑자기 찾아 온 추위에는 맥을 못추게 되는 법이지요.
이때의 추위는 그냥 추운게 아니라 때늦은 비를 동반하거나 시속 30-40마일의 강풍과 함께 하는 추위라서 정말 뼈 속까지 추위를 느끼게 마련입니다.
그런데도 이 때늦은 꽃샘 추위를 보면서 이 추위가 가진 의미를 생각해 볼 때 감사함을 느끼게 됩니다.

섬기는 교회에는 큰 나무가 몇그루 있는데 그 가운데 전나무 비슷한 소나무와 속에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고 해서 붙여진 너도 밤나무가 있습니다. 전나무는 사철 푸른나무라고는 하지만 겨우내 여기 저기 나이들거나 병든 잎을 붙이고 있었고, 너도 밤나무는 지난해 늦은 11월 까지 달려 있던 단풍든 잎을 다 떨구고 겨우내 속빈 밤송이 같은 열매를 떨구고 있었습니다. 시커멓게 변색된 그 잘난(!) 열매는 우수와 경칩이 지난 지금 까지도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꽃샘 추위로 찬 비를 맞고, 시속 30-40마일을 강풍을 맞고 나면 사정이 달라지게 됩니다. 끈질기게 붙어 있던 전나무의 고엽도, 너도 밤나무의 열매도 더 이상 가지에 붙어 있을 재간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새 생명을 보게 됩니다. 차가운 비를 맞고, 강한 바람에 뒤흔들린 나무는 이제 졸린 눈을 비비고 땅으로부터 힘차게 물을 빨아 올리고 새생명의 잎을 밀어내어 또 한해를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늦은 꽃샘추위에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지요.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이제는!” 해보지만 아직도 고난과 고통이 남아 있는 것을 느끼며 삽니다. 그러나 그 고난과 고통에도 다 뜻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마음가운데 남아 있는 더 내려놓아야 할 것들, 떼어 버려야 할 것들을 떼어 버리게 하시려는, 그래서 새로운 축복으로 덧입히시려는 하나님의 깊는 뜻이 있으신 줄 압니다.
말처럼 쉽지않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마지막 남은 견딜 수 없는 그 고난과 환란을 오히려 감사해 보십시다. 그 뒤에는 새생명의 축복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Monday, March 8, 2010

거꾸로 사는 삶(눅9:58, 갈6:8)



말태우면 경마잡히고 싶다고 사람의 욕심은 좀, 점잖은 말로 인간의 욕구는 한이 없습니다. 똥차라도 좋으니 내 차 한대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가도 어느새 지나가는 8기통 반짝 반짝 새까만 차를 보면 나도 모르게 눈이 휘둥글 돌아가는게 보통 사람들의 심리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의 마음을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을 만큼 크게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꽤 오래 전에 매슬로우라는 사람이 인간이 지닌 다양한 욕구를 잘 정리 해 놓았습니다. 오늘은 매슬로우가 사람들의 욕구를 저차원 욕구로부터 고차원 욕구로 정리한 것을 예수님의 삶과 비교하는 가운데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무엇때문에 그 힘든 일을 합니까? 사람들에 물으면 별별 소리 다합니다. 어떤 사람은” 일이 좋아서 한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일이 즐거워서 한다’고 폼잡으며 말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먹고 살만 하니까 그런 소리가 나오는 법입니다. 사람들이 그 힘든 일을 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먹고 살기 위해서, 내 가족, 내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입니다. 이처럼 먹고 사는 일과 자손 번식의 욕구를 생리적 욕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런 생리적 욕구는 말 못하는 동물들에게도 있는 욕구이기도 한 것인데 한 나라가 온통 맛있는 음식 찾아 먹기에 눈이 충혈되어 있는 것 같은 한국의 ‘맛자랑 멋자랑’같은 TV프로그램을 보노라면 정말 전 국민이 아직도 먹고 사는 일인 기본적인 욕구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아 입맛이 씁쓸해 지기도 합니다.

출애굽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랬습니다. 그 고생 고생 애굽의 종노릇을 뒤로 하고 홍해의 기적을 보며 애굽을 나온 후 겨우 두달 보름 밖에 안되 이스라엘 온 백성이 신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 도다”(출 16:3)이 아우성 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광야에 나와 배고파 죽겠다고 난리치던 백성이 구워먹고, 삶아먹고, 쪄먹어도 되던 만나에 싫증이 나기 시작하니까 또 집단적으로 타박했습니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의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없도다”(민11:4-6)

우리의 예수는 처음부터 달랐습니다. 예수가 공생애를 앞두고 마지막 남은 인간적인 번뇌의 씨앗을 소탕하기 위해 스스로 굶주림과 고독의 장소 광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고통가운데 가장 힘든 때에 사탄이“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마4:3) 먹는 문제를 가지고 예수를 시험했습니다. 예수는 단호히 대답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마4:4) 예수는 사람들의 먹는 문제를 부정하지 않으시면서도 사람은 먹는 문제에만 매달려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시므로로 사탄의 시험에 단호히 대처하셨습니다. 역사상 우리는 먹는 문제에 정신이 팔려 영원한 생명을 잃어 버린 경우를 수 없이 보아왔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입으로 먹는 것은 우리의 생명을 잠시 연장할 뿐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생명을 영원히 보장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란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잠깐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조금 더 편한 직장, 좀 더 좋은 직장을 찾습니다. 그래서 3D업종이란 말이 생겨나게 됐습니다. 집주인의 생각이 바뀌면 이사가야 하는 전세집은 이제 그만 살고, 게딱지만해도 내 집을 가져 살기를 원합니다. 소위 안전 욕구라고 말합니다. 좀더 욕심을 부려서 남 눈치 안보고 내 사업을 해보고 싶어 이 궁리 저 궁리에 머리가 아프기 시작하고, 많은 경우 이 돈 저 돈 끌어 모아 사업이랍시고 벌였다가 낭패 보기 시작하는 단계가 이 단계입니다.
그러나 예수에게 애초부터 안전욕구는 없었습니다. 태어날 때는 방이 없어 마구간에서 태어났고, 고향에서도 홀대를 받아 집한칸 없었습니다. 마8:20은 말합니다.”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이 말씀은 하찮은 짐승들 조차도 보금자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세상의 주인이고 창조자이신 그리스도가 자신의 셰계에 와서는 안식처가 없는 나그네, 사람들의 거주지에서는 내쫓김을 받는 방랑자가 되었다는 말로 예수는 말그대로 편히 살 집 한칸도 없는 방랑자로서 공생애 사역을 감당하고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결혼해서 가정을 가지고 자식 낳아 허리를 조금이나마 펼 때가 언제입니까? 아쉬운대로 좀 여유있는 전세집, 아니면 게딱지 같은 아파트라도 내 집한칸 어렵사리 장만하고, 첫 아이 고등학교 졸업할 무렵 둘째놈 중학교에 다닐라 치면 슬슬 고개를 쳐드는 욕구가 있습니다. 바로 사회적 욕구입니다. 지금껏 가정를 일구느라 정신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내 집하나 갖자고 열심히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허리를 펴고 하늘을 바라보니 남자랍시고 회사에서 이 눈치 저눈치 보느라 나는 온데 간데가 없고 그 친했던 고등학교 동창, 대학 동문들 어찌 사는지 얼굴 본지도 까마득, 아이들 뒤치닥거리, 그 잘난 남편 뒤치닥거리하는 사이에 내 이름 석자는 온데 간데가 없고 큰애 이름 끝자락에 붙은 아무개 엄아, 시집살이 이 눈치 저 눈치에, 내 가정 하나 잘 먹고 잘 살자고 친정도 저 만치에 두고 살았던 인생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허리를 좀 펴 볼만 하니까 나타나는 욕구가 바로 사회적 욕구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누군가와 어울려 살고 싶다는 말입니다.

동창들도 만나고, 이제 까지 참았던 군대 동기생 모임에도 나가고 싶고, 이제 까지 미뤘던 여고 동창들도 만나고 싶고, 꾹꾹 눌러 두었던 앞동 아파트 계 모임에도 나가고 싶고, 사람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외로운 가운데 혼자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가장 무서운 병은 에이즈도 아니고 요즘 유행하는 H1A1신형 독감도 아니고 외로움이라는 질병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회적 욕구는 잘 관리되지 않으면 정말 문제가 커집니다. 요즘 유행처럼 번지는 방송국 막장드라마를 아시지요? 물론 드라마니까 현실보다는 과장된 측면이 있지만 드라마는 우리 사회에서 있는 이야기, 있을 법한 이야기가 소재가 되는 법입니다. 그래야 재미가 있는 법이거든요. 재미있다고 보는 막장드라마도 없는 것을 억지로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주위에서 흔하게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어쨋든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나라는 존재를 잊고 살다가 이제는 사람답게 살아 보자는 내 안으로부터 밖으로 표출되는 욕구가 바로 사회적 욕구입니다.

예수는 어땠습니까? 예수도 잘 나갔습니다. 진리의 말씀 전파에, 치유와 회복의 역사에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무리가 예수의 뒤를 따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구약 유대의 오실 메시야로 알고 왕으로 세우자고들 난리 법석이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예루살렘 중심에 터 잡고 찾아오는 사람들로부터 이 대접 저 대접 받으며 말그대로 사회적 욕구를 폼나게 즐기며 채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달랐습니다. 우리가 찾던 사회적 욕구 충족이 가능하던 때에 예수는 오히려 아직 날이 채 새기도 전에(눅4:42) 한적한 곳으로 기도하러 갔습니다.(마1:35) 이것은 예수 자신이 공생애 기간을 통해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분명히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사회가운데 있으시되 항상 기도하는 삶을 모본으로 보여주는 삶을 사신 분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육의 세상을 사는 우리들은 인간적인 사회적 욕구와 영적인 욕구 간의 균형을 원만이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제 자식들도 장성하여 분가하여 사람 구실하여 살고, 두 부부 누구의 눈치 안보며 살만해지면 고개를 드는 욕구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존경욕구입니다. 쉽게 말하면 바로 대접받으며 살고 싶은 욕구입니다. 이 때가 되면 식당도 분위기 찾아갑니다. 조금 먹어도 고급을 찾아 먹습니다. 자신들의 분위기에 맞는 사람들만 골라 만납니다. 라이온스 클럽에도 들고, 로타리 클럽에도 나가고, 골프릎 쳐도 명품 클럽으로 쳐야 하고, 핸드백을 들어도 명품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즈음에 교회 주보를 만드는 사람은 무척 조심해야 합니다. 교우 동정란을 특별히 신경을 써야 합니다.이 욕구는 배운 사람 못 배운사람, 가진 사람 못가진 사람 별차이 없습니다. ‘존경’이라는 근거를 통해 하나의 카테고리를 이루는 욕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어땠습니까? 바로 이때 예수는 바로 빌라도의 법정에 있었습니다. 채찍질을 했습니다. 군병들이 침뱉고, 손바닥으로 때렸습니다.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팻말을 붙이고, 발가 벗겨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존경과는 정반대, 수치 중의 수치로 예수를 대접했습니다.
자아실현 욕구가 인간들의 인본주의 논리에 따른 마지막 욕구입니다. 이 세상에 살다간 증거를 남기고 싶은 욕구 이것이 사람들의 마지막 욕구입니다.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그 유지에 따라 아주 큰 돌맹이의 밑자락에 작은 글씨로 새겼습니다. 그게 작은 비석입니까? 어쨋든 사람들은 누구든 이 세상에 살다간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웃으면서 죽는 사람은 별로 없다고들 하지요?. 개똥 밭을 굴러도 이 세상이 좋다고 몸부림치다가 할 수 없어 저 세상으로 떠나는 사람들이 상대도 안되게 더 많다고들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는 어땠습니까.? 가상 칠언을 남기고 ‘다 이루었다’는 말로 만족하며 이 세상에서 육적인 삶을 마감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인본주의적 삶을 살아야 합니까? 아니면 예수님처럼 신본주의 삶을 살아야합니까? 아니면 어디에 무엇을 얼마만큼 섞은 삶을 살아야 합니까?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또 해결점은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우리는 예수님 처럼 기도하는 삶을 살야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바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그 난리법석이었던 ‘노사모’의 ‘노’자도 이미 잊혀졌고, DJ의 ‘D’자도 벌써 잊혀져 갑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땅을 떠난지 2000년이 지났는데도 이 세상 곳곳에서 편만하게 기억되는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원하고 바라옵기는 인간의 욕심 따라 살다가 죽은지 사흘이면 벌써 잊혀지기 시작하는 삶이 아니라 이 땅에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게 하시고 죽은 후에는 또한 곧 바로 저 부활하여 영생하는 소망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세상 사는 일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수고하지 않는 공중의 새를 먹이시고, 수고하지 않아도 솔로몬 보다 아름다운 옷을 들꽃에 입히시는 하나님, 우리의 쓸것을 미리 아시는 하나님을 굳게 붙잡으므로 필요없는 걱정과 염려를 먼저 하며 사는 불신앙의 삶을 살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믿사옵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Monday, March 1, 2010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강산이 한번 바뀌고도 남을 시간이 흐른 뒤에야 한국에 사는 동생을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 잠시 구경삼아 나온 곳, 휴게소 언덕너머로 물을 잔뜩 머금은 구름이 이른 저녁 햇살에 쌍무지개를 떠 올렸습니다.




평신도의 모델, 스데반(행7: 54-60)


벌써 10년이 훌쩍 넘은 일이었지만 한국 서점가를 화들짝 놀라게 했던 한 권의 책이 있었습니다.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쓴 한국 한국인 비판’이라는 이케하라 마모루라는 일본인이 쓴 책입니다. 이케하라는 이 책에서 경제는 1만달러, 의식은 1백달러인 한국인이 지닌 사회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통렬히 꼬집었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 이케하라는 맞아 죽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주인공 스데반은 정말로 맞아 죽었습니다. 스데반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배반자들과 살인자들에게 신실하게 복음을 전했고, 이로 인하여 스데반은 숱한 돌에 맞아 죽은 것입니다.

스데반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스데반은 어떤 사람이었기에 하나님께서 그 영광스러운 자리에 서기에 합당한 순교의 은혜를 주셨습니까? 이 영광스러운 순교는 과연 어느 날 갑자기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까? 오늘은 초대교회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의 삶을 묵상하는 가운데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1세기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영향을 끼친 몇 명의 인물 가운데 한명을 꼽으라고 할 때 아무도 의심할 수 없는 한 사람이 바로 사도들에 의해 세운 바 된 ‘일곱 사람 중의 한 사람’인 오늘의 주인공이 청년 스데반입니다.
‘면류관’이라는 뜻의 이름을 지닌 그는 헬라파 유대인 중 한 사람으로서 예루살렘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항상 이방인 취급을 받아 왔던 사람입니다. 스데반의 회심한 나이가 20세 후반이었다면 그가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지금 그의 나이는 이제30대 후반의 나이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스데반이 회심 후 오랜 시일이 지난 후에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은 사람들을 쓰실 사람들이 어느 정도의 나이가 될 때까지는 맡길 사역을 위해 오랫동안 준비시키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이유에 따라 스데반도 교회 내에서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인정해 주는 신앙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보내실 때까지 오랜 기간 동안 훈련을 받아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먼저 스데반은 과연 어떤 과정을 통해 초대교회 교인이 되었습니까? 스데반이 누구인지 어떤 삶의 배경을 가지고 있는지 성경은 자세히 말하고 있지 않지만 우리는 사도들이 일곱 사람을 세우기 위해 내걸었던 조건, 특히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언급한 스데반이 겸비했던 자질(6:3,5,10)을 통해서 능히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스데반은 예루살렘에서 수천명의 사람들과 더불어 세례를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방언의 은사를 받은 것도 아니었고, 특별히 하늘에서 내려오는 특별한 권능이나 징조를 받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또 열광적으로 복음을 전하던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아직까지는 그저 그렇고 그런 보통의 신앙인이었을 뿐 입니다.
두번째 과정은 세례 이후 곧바로 뒤따라 왔습니다. 스데반은 예루살렘에 머물기 위해 고향에 두고 온 가족과 친구와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는 베드로의 권고에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그 자리에서 결단을 내리고 교회에 남았던 사람입니다.
세번째 과정은 교회를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하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스데반은 한마디로 말해 하늘나라의 복음에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린 지금 그에게 남은 것은 시간과 마음뿐이었지만 모든 삶을 드리는 복음의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삶이 순식간에 일어났던 사람입니다.
마지막 네번째 과정은 예루살렘에서 회심한 수십명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가정 교회 공동체에 들어가 신앙공동체의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평소같았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만 은혜받은 스데반에게 있어서 신앙공동체의 삶은 귀한 나날들이었고, 스데반은 이 공동체 생활을 통해서 새로운 삶을 경험하고, 새로운 삶을 실현하는 가운데 신앙을 성장시켜 갈 수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경험하는 것처럼 스데반도 당시 새로운 삶으로 인해 수없는 실수를 범하기도 했고, 신앙생활에서 큰 실망을 겪기도 했을 것임이 분명합니다. 신앙공동체 생활에서 이해하기 힘든 별의별 일들과 사건들 때문에 견디기 힘든 고충을 겪었을 것도 확실합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이해와 용서를 배워야 했습니다. 얼마만큼이나 올바른 신앙의 삶을 살 수 있을런지 때때로 자신을 의심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어두운 삶의 비전을 밝게 비춰 주시고, 그가 가야 할 길을 인도해 주셨습니다.
아직 젊기 때문에 교회에서 큰 일을 맡지는 못했지만 이것 또한 스데반에게는 오히려 잘 된 일이어서 주님의 3년 반 공생애 기간을 따라 다녔던 사도들이 배웠을 섬김의 도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통해서 스데반 자신이 가진 은사를 더 깊이 다지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스데반은 차근 차근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경험하고, 예수 안에 거하는 삶을 익혀 나갔습니다. 복음을 전할 준비된 그릇을 찾고 계셨던 하나님은 그 모습을 보시면서 드디어 스데반의 삶을 사역자로서의 삶으로 주장하시게 된 것입니다. 준비된 그릇으로서의 스데반을 확인하신 하나님은 이그 후 날이 갈수록 평범했던 스데반에게 권능을 부어 주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스데반이 복음을 선포했을 때 모든 사람들은 그 말씀이 참된 것이지 아니면 입으로만 말하는 거짓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스데반이 행하는 기적이 결코 마술이 아니라, 성령에서 비롯된 능력인 것도 잘 알았습니다. 사람들은 스데반이 거룩한 척하는 위선자가 아니고, 스데반의 모든 표현이 자기 자랑이 아니라 겸손함으로 이루어진 것임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스데반이 세움을 받았을 때 아무도 마다하지 않았고, 아무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오늘 주제의 결론 부분을 나누는 가운데 말씀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초대교회에는 아직 두개의 그룹만이 있었습니다. 그 하나가 사도그룹이었고, 다른 하나는 바로 회심자 그룹이었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사도들 외에 다른 사역자들이 있었으면 어떨까?’라는 생각들을 가지게 되었을 때 ‘일곱사람’의 평신도 사역자들을 세울 필요가 생기게 되었고, 그 때 스데반과 같은 평신도 사역자들이 전격적으로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초대교회 내에 스데반과 같은 평신도 사역자로서 일군들이 바르게 세워졌을 때 어떤 결과가 일어났습니까? 첫째로 말씀이 왕성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이것은 성경 교훈의 양이 많아지고, 교훈의 질이 깊어 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들이 말씀에 전심을 쏟게 되자 말씀의 가르침이 넓어지고 깊어진 것을 말합니다. 이 때 성경 말씀이 교회와 성도들에게 확고하게 자리 잡히게 되고, 교회는 말씀이 살아있는 교회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둘째로 교회가 부흥하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심히 많아지고”, 말씀이 강해지고 말씀의 깊이가 깊어지고, 말씀의 넓이가 넓어지자 교회가 부흥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교회가 수적으로 양적으로 성장하게 된 것입니다.
셋째로 세상이 항복하게 되었습니다.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건실한 일꾼을 세운 교회는 이처럼 놀라운 영향력을 발휘하였으므로 회개와 개종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지금까지 스데반을 말한 것은 평신도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닫기 위함입니다. 교회는 수세기 동안 이런 사람들에 의해 발전되고 유지되어 왔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견뎌내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신앙으로 고난을 이겨낸 사람들, 곧 평신도들이 교회를 지켜왔던 것입니다. 1억5천만명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수가 증가한 오늘의 중국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금년에 우리는 ‘두날개로 날아 오르는 건강한 교회’를 표어로 내걸고 6단계 양육시스템을 우리 교회가 부흥할 수 있는 귀한 도구로 알고 제도의 정착과 활성화를 위해 교회의 모든 지체가 애쓰고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 모두가 다시한번 건강한 교회를 위한 평신도의 역할의 중요성을 생각할 때입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위해 주신 이 귀한 제도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의 평신도들이 깨어나야 합니다. pre-encounter, 일군반, 제자반 , 바나나사역, 알파학교, 중보기도학교, 치유사역과 각종 사경회, 그리고 기타 성경공부반 등 오랜 기간 동안 교회를 통하여 준비시키신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이 모든 일들이 결국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 사역을 위해서 그동안 평신도들을 세워 사용하시려는 하나님의 큰 뜻이었음을 다시 한번 깨달아 알고, 한 사람의 평신도들이 스스로 깨어 날 때 금년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비전은 성공할 수 있습니다.
성패는 우리 모두가 뜨거운 열정과 사랑을 가진 스데반과 같은 평신도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련받고, 양육받은 하나님의 군사는 오로지 하나님이신 성령의 손에 붙들려 있을 때에만 진정한 하나님의 군사가 될 수 있는 것임을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