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태우면 경마잡히고 싶다고 사람의 욕심은 좀, 점잖은 말로 인간의 욕구는 한이 없습니다. 똥차라도 좋으니 내 차 한대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가도 어느새 지나가는 8기통 반짝 반짝 새까만 차를 보면 나도 모르게 눈이 휘둥글 돌아가는게 보통 사람들의 심리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의 마음을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을 만큼 크게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꽤 오래 전에 매슬로우라는 사람이 인간이 지닌 다양한 욕구를 잘 정리 해 놓았습니다. 오늘은 매슬로우가 사람들의 욕구를 저차원 욕구로부터 고차원 욕구로 정리한 것을 예수님의 삶과 비교하는 가운데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무엇때문에 그 힘든 일을 합니까? 사람들에 물으면 별별 소리 다합니다. 어떤 사람은” 일이 좋아서 한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일이 즐거워서 한다’고 폼잡으며 말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먹고 살만 하니까 그런 소리가 나오는 법입니다. 사람들이 그 힘든 일을 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먹고 살기 위해서, 내 가족, 내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입니다. 이처럼 먹고 사는 일과 자손 번식의 욕구를 생리적 욕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런 생리적 욕구는 말 못하는 동물들에게도 있는 욕구이기도 한 것인데 한 나라가 온통 맛있는 음식 찾아 먹기에 눈이 충혈되어 있는 것 같은 한국의 ‘맛자랑 멋자랑’같은 TV프로그램을 보노라면 정말 전 국민이 아직도 먹고 사는 일인 기본적인 욕구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아 입맛이 씁쓸해 지기도 합니다.
출애굽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랬습니다. 그 고생 고생 애굽의 종노릇을 뒤로 하고 홍해의 기적을 보며 애굽을 나온 후 겨우 두달 보름 밖에 안되 이스라엘 온 백성이 신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 도다”(출 16:3)이 아우성 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광야에 나와 배고파 죽겠다고 난리치던 백성이 구워먹고, 삶아먹고, 쪄먹어도 되던 만나에 싫증이 나기 시작하니까 또 집단적으로 타박했습니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의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없도다”(민11:4-6)
우리의 예수는 처음부터 달랐습니다. 예수가 공생애를 앞두고 마지막 남은 인간적인 번뇌의 씨앗을 소탕하기 위해 스스로 굶주림과 고독의 장소 광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고통가운데 가장 힘든 때에 사탄이“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마4:3) 먹는 문제를 가지고 예수를 시험했습니다. 예수는 단호히 대답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마4:4) 예수는 사람들의 먹는 문제를 부정하지 않으시면서도 사람은 먹는 문제에만 매달려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시므로로 사탄의 시험에 단호히 대처하셨습니다. 역사상 우리는 먹는 문제에 정신이 팔려 영원한 생명을 잃어 버린 경우를 수 없이 보아왔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입으로 먹는 것은 우리의 생명을 잠시 연장할 뿐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생명을 영원히 보장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란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잠깐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조금 더 편한 직장, 좀 더 좋은 직장을 찾습니다. 그래서 3D업종이란 말이 생겨나게 됐습니다. 집주인의 생각이 바뀌면 이사가야 하는 전세집은 이제 그만 살고, 게딱지만해도 내 집을 가져 살기를 원합니다. 소위 안전 욕구라고 말합니다. 좀더 욕심을 부려서 남 눈치 안보고 내 사업을 해보고 싶어 이 궁리 저 궁리에 머리가 아프기 시작하고, 많은 경우 이 돈 저 돈 끌어 모아 사업이랍시고 벌였다가 낭패 보기 시작하는 단계가 이 단계입니다.
그러나 예수에게 애초부터 안전욕구는 없었습니다. 태어날 때는 방이 없어 마구간에서 태어났고, 고향에서도 홀대를 받아 집한칸 없었습니다. 마8:20은 말합니다.”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이 말씀은 하찮은 짐승들 조차도 보금자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세상의 주인이고 창조자이신 그리스도가 자신의 셰계에 와서는 안식처가 없는 나그네, 사람들의 거주지에서는 내쫓김을 받는 방랑자가 되었다는 말로 예수는 말그대로 편히 살 집 한칸도 없는 방랑자로서 공생애 사역을 감당하고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결혼해서 가정을 가지고 자식 낳아 허리를 조금이나마 펼 때가 언제입니까? 아쉬운대로 좀 여유있는 전세집, 아니면 게딱지 같은 아파트라도 내 집한칸 어렵사리 장만하고, 첫 아이 고등학교 졸업할 무렵 둘째놈 중학교에 다닐라 치면 슬슬 고개를 쳐드는 욕구가 있습니다. 바로 사회적 욕구입니다. 지금껏 가정를 일구느라 정신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내 집하나 갖자고 열심히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허리를 펴고 하늘을 바라보니 남자랍시고 회사에서 이 눈치 저눈치 보느라 나는 온데 간데가 없고 그 친했던 고등학교 동창, 대학 동문들 어찌 사는지 얼굴 본지도 까마득, 아이들 뒤치닥거리, 그 잘난 남편 뒤치닥거리하는 사이에 내 이름 석자는 온데 간데가 없고 큰애 이름 끝자락에 붙은 아무개 엄아, 시집살이 이 눈치 저 눈치에, 내 가정 하나 잘 먹고 잘 살자고 친정도 저 만치에 두고 살았던 인생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허리를 좀 펴 볼만 하니까 나타나는 욕구가 바로 사회적 욕구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누군가와 어울려 살고 싶다는 말입니다.
동창들도 만나고, 이제 까지 참았던 군대 동기생 모임에도 나가고 싶고, 이제 까지 미뤘던 여고 동창들도 만나고 싶고, 꾹꾹 눌러 두었던 앞동 아파트 계 모임에도 나가고 싶고, 사람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외로운 가운데 혼자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가장 무서운 병은 에이즈도 아니고 요즘 유행하는 H1A1신형 독감도 아니고 외로움이라는 질병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회적 욕구는 잘 관리되지 않으면 정말 문제가 커집니다. 요즘 유행처럼 번지는 방송국 막장드라마를 아시지요? 물론 드라마니까 현실보다는 과장된 측면이 있지만 드라마는 우리 사회에서 있는 이야기, 있을 법한 이야기가 소재가 되는 법입니다. 그래야 재미가 있는 법이거든요. 재미있다고 보는 막장드라마도 없는 것을 억지로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주위에서 흔하게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어쨋든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나라는 존재를 잊고 살다가 이제는 사람답게 살아 보자는 내 안으로부터 밖으로 표출되는 욕구가 바로 사회적 욕구입니다.
예수는 어땠습니까? 예수도 잘 나갔습니다. 진리의 말씀 전파에, 치유와 회복의 역사에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무리가 예수의 뒤를 따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구약 유대의 오실 메시야로 알고 왕으로 세우자고들 난리 법석이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예루살렘 중심에 터 잡고 찾아오는 사람들로부터 이 대접 저 대접 받으며 말그대로 사회적 욕구를 폼나게 즐기며 채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달랐습니다. 우리가 찾던 사회적 욕구 충족이 가능하던 때에 예수는 오히려 아직 날이 채 새기도 전에(눅4:42) 한적한 곳으로 기도하러 갔습니다.(마1:35) 이것은 예수 자신이 공생애 기간을 통해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분명히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사회가운데 있으시되 항상 기도하는 삶을 모본으로 보여주는 삶을 사신 분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육의 세상을 사는 우리들은 인간적인 사회적 욕구와 영적인 욕구 간의 균형을 원만이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제 자식들도 장성하여 분가하여 사람 구실하여 살고, 두 부부 누구의 눈치 안보며 살만해지면 고개를 드는 욕구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존경욕구입니다. 쉽게 말하면 바로 대접받으며 살고 싶은 욕구입니다. 이 때가 되면 식당도 분위기 찾아갑니다. 조금 먹어도 고급을 찾아 먹습니다. 자신들의 분위기에 맞는 사람들만 골라 만납니다. 라이온스 클럽에도 들고, 로타리 클럽에도 나가고, 골프릎 쳐도 명품 클럽으로 쳐야 하고, 핸드백을 들어도 명품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즈음에 교회 주보를 만드는 사람은 무척 조심해야 합니다. 교우 동정란을 특별히 신경을 써야 합니다.이 욕구는 배운 사람 못 배운사람, 가진 사람 못가진 사람 별차이 없습니다. ‘존경’이라는 근거를 통해 하나의 카테고리를 이루는 욕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어땠습니까? 바로 이때 예수는 바로 빌라도의 법정에 있었습니다. 채찍질을 했습니다. 군병들이 침뱉고, 손바닥으로 때렸습니다.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팻말을 붙이고, 발가 벗겨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존경과는 정반대, 수치 중의 수치로 예수를 대접했습니다.
자아실현 욕구가 인간들의 인본주의 논리에 따른 마지막 욕구입니다. 이 세상에 살다간 증거를 남기고 싶은 욕구 이것이 사람들의 마지막 욕구입니다.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그 유지에 따라 아주 큰 돌맹이의 밑자락에 작은 글씨로 새겼습니다. 그게 작은 비석입니까? 어쨋든 사람들은 누구든 이 세상에 살다간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웃으면서 죽는 사람은 별로 없다고들 하지요?. 개똥 밭을 굴러도 이 세상이 좋다고 몸부림치다가 할 수 없어 저 세상으로 떠나는 사람들이 상대도 안되게 더 많다고들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는 어땠습니까.? 가상 칠언을 남기고 ‘다 이루었다’는 말로 만족하며 이 세상에서 육적인 삶을 마감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인본주의적 삶을 살아야 합니까? 아니면 예수님처럼 신본주의 삶을 살아야합니까? 아니면 어디에 무엇을 얼마만큼 섞은 삶을 살아야 합니까?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또 해결점은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우리는 예수님 처럼 기도하는 삶을 살야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바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그 난리법석이었던 ‘노사모’의 ‘노’자도 이미 잊혀졌고, DJ의 ‘D’자도 벌써 잊혀져 갑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땅을 떠난지 2000년이 지났는데도 이 세상 곳곳에서 편만하게 기억되는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원하고 바라옵기는 인간의 욕심 따라 살다가 죽은지 사흘이면 벌써 잊혀지기 시작하는 삶이 아니라 이 땅에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게 하시고 죽은 후에는 또한 곧 바로 저 부활하여 영생하는 소망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세상 사는 일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수고하지 않는 공중의 새를 먹이시고, 수고하지 않아도 솔로몬 보다 아름다운 옷을 들꽃에 입히시는 하나님, 우리의 쓸것을 미리 아시는 하나님을 굳게 붙잡으므로 필요없는 걱정과 염려를 먼저 하며 사는 불신앙의 삶을 살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믿사옵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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