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March 23, 2010

빈들에 마른 풀 같을지라도(사32:15)


한 15년 쯤전에 여행 삼아 미국 땅에 처음 왔을 때의 느낌이란 여유로움 그 자체였습니다. 맥도날드에서 32oz 컵에 담아 주는 얼음 섞인 코카콜라, 평지 골프코스에 품어대는 스프링클러, 이름모를 회사 국기 게양대에 매달려 한가롭게 나부끼는 큼지막한 성조기, 5번 프리웨이, 101번 프리웨이로 한없이 펼쳐지는 벌판, 이들이 주는 느낌이란 바로 미국적 여유로움 그것이었습니다.

산천은 그 산천이었지만 10년전부터 이민의 삶을 사는 동안 내 안에서 바뀌어 버린 환경 때문에 15년 전 그 여유로움은 간데 없이 일종의 자괴감만 남았었습니다. ‘저 넓은 땅에 내 집 지을 땅은 한평도 없구먼!,”, “넌 그 동안 무얼하며 살아왔나!”

이번 휴가를 감사함으로 받아 똑같은 길을 가보았습니다. 도시를 벗어나 곧 펼쳐지는 그 광활한 광야, 벌판을 바라보는 가운데 감동으로 떠 오르게 하신 찬송이 방금 부른 ‘빈 들에 마른 풀같이’였습니다. 그리고 길지 않은 여행 내내 빈들의 의미를 새겨 보았습니다.
광야는 어떤 곳입니까? 광야는 텅 비어 있는 곳입니다. 텅 비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광야는 모든 것을 정화하고 새롭게 만들어 가는 역사의 빈들, 마음의 빈들입니다.

성경은 빈들에 관해서 자주 말합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평화의 왕 예수가 태어났다는 소식도 빈들에서 밤새워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제일 먼저 전해졌고, 하나님의 구원의 소식은 텅 빈 광야의 어둠 속에서 추위에 떨며 밤새워 남의 양떼나 지키던 희망 없는 사람들에게 제일 먼저 전해졌습니다.
목자들이 밤새워 양떼를 지키던 빈들은 홍해의 기적을 체험한 이스라엘이 40년 간 헤매던 그 빈들이었고, 이스라엘이 한때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과 정의와 평화가 넘치는 공동체를 이루기로 순결하게 다짐했던 그 빈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언자 호세아는 부패하고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빈들로 나가자고 호소했습니다. 빈들에서 하나님에 대한 옛 사랑을 되찾고, 정의와 평화의 공동체를 다시 시작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때묻은 삶을 청산하고 광야로 나가서 여호와 하나님과 다시 시작하자는 것입니다
광야는 또 이 세상은 ‘할 수 없는 일이 더 많은 세상’임을 깨닫게 해 주는 장소입니다. 바싹 마른 잡목과 바싹 마른 풀들이 널려 있는 빈들이건 끝없이 모래 사막으로 펼쳐진 광야이건 우리가 그런 곳에 홀로 버려졌을 때 우리에게 드는 느낌은 어떤 것입니까? 황량하고 부족함, 쓸쓸하고 외로움, 고통스러움과 견디기 힘듬, 이런 것들입니다. 왜입니까? 멀리서 바라보면 바싹 마른 풀들조차 황금색의 물결로 아름답게 보이는 곳이기는 해도 잠깐 머무는 곳이 아니라 나 홀로 버려지는 곳이라면 이처럼 부정적인 느낌이 드는 것은 광야, 빈들에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별반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기술 혁명과 전문가 시대는 ‘ 할 수 있다’의 긍정적인 사고의 길로 우리를 자연스럽게 인도해 갔습니다. ‘열심히 돈만 벌어 봐라!’ ‘세상에 뭐가 무섭겠나?’ 그 일이 아무리 무시무시하고, 어려워 보여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인간이 달 나라에 간 것은 이미 그 옛날 일이 되어 버렸고, 그 먼 우주 공간에 우주선을 띄워 보내고, 우리가 사는 지구 바깥을 우주 왕복선을 타고 왔다 갔다 하는 판국에 그 문제에 딱 들어 맞을 전문가들만 있으면, 그들을 고용할 재력만 있으면 해결되지 않을 .일이 없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과거의 경험과 기회, 기술 혁명, 전문가 집단의 존재는 긍정적인 사고의 힘을 무조건 믿게 만드는 요인이 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사실 많은 광야들이 개척되어 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에겐 과거의 기술과 경험, 전문가 집단이 어쩌지 못하는 새로운 광야, 새로운 빈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지금까지는 우리를 둘러 싼 외적 환경을 바꾸기 위해 애써 왔다면 이제부터는 우리 스스의 가능성를 발견하려는 노력, 우리의 인간 내면 자체가 새로운 개척지, 새로운 광야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자기 중심의 탐닉 시대를 만들어 내게 하였습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물질적으로 더 많은 것을 누리며 사는 시대가 되었지만 우리네 인간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진한 허탈감에 빠져 사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난 할 수 있다’는 정신 무장으로 힘껏 노력하고 거기다가 하나님의 은혜까지 더해져 목표했던 것을 이루어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삶은 그곳에서 끝나지 않기에 또 다시 부족한 것이 생기고 마련이고, 게다가 그 부족한 것들 중의 어떤 것들은 살아 생전 결코 이루어 질 수 없는 것들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아무리 일년 열 두달을 하루 같이 긍정적 사고에 젖어 살아도 내 욕구의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는 않는 인생의 한계가 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비애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네 인생들입니다. 이처럼 우리 모두는 이루지 못한 꿈의 아픔을 안고 살아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여기서 광야는 바로 삶의 긴 여정 속에서 우리네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별반 없는 곳임을 깨닫게 해 주는 곳입니다.
특별히 그 문제가 우리의 영적인 문제인 때에, 그 문제가 우리의 죄와 관련된 문제인 때에 광야는 우리로 하여금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곳임을 깨닫게 해 주는데 더 없이 좋은 장소 입니다. 그 옛날 예수도 이 사실을 진작부터 깨달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광야에 나가 시험을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가 시험받은 유대광야는 죽음의 바다인 사해 근처에 있습니다. 요단강은 갈릴리 호수에서 발원하여 사해로 흘러 들어갑니다. 갈릴리 호수는 수량이 풍부하고 물고기가 아주 많은 생명의 호수이지만 사해는 너무 짜서 아무것도 살 수 없는 죽음의 바다입니다. 요단강은 생명의 호수 갈릴리에서 발원하여 죽음의 바다인 사해로 흘러 들어갑니다.

그런데도 예수는 갈릴리 마을들로 들어가기 전에 사해 옆에 있는 유대 광야로 들어가서 시험을 받습니다. 죽음의 바다 길목의 빈들에서 그는 마지막 남은 번뇌의 씨앗을 소탕한 것입니다. 굶주림과 고독 속에서 천국과 지옥 사이를 넘나들며 내면과의 외로운 싸움을 통해 마침내 대 자유를 얻게 된 것입니다.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를 잃는 대신 더 큰 나를 얻는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의 신비 안에 들어 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는 그 빈들에서 문명의 치장이 없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인간의 힘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빈들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생명의 신비 안에 있는 사람으로서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날아오를 수도 있게 되었고, 해와 달과 교감할 수도 있게 되었으며, 새들과 말하고, 벌레들의 소리를 알아 들을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온 우주에 가득 찬 생명의 기운들을 느낄 수 있게 되었고, 상처받은 영들의 탄식과 기쁨의 소리를 들을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뭇 생명과 하나가 되어 함께 울릴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때 비로소 예수는 갈릴리 마을들로 들어가 인류 구원의 역사를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광야는 우리에게도 참으로 소중한 의미를 갖습니다.

긴 인생을 사는 동안 우리는 종종 광야의 삶을 동경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에 배어든 습관화되 기질, 습기(習氣)를 떨어 내고 싶은 마음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빈 곳에 오래 머물러 있고 싶은 사람은 많지 않은 것은 우리의 힘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한계상황에 오랫동안 있는 것 자체가 별로 유쾌한 일이 못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네가 아무리 버텨도 결국에는 갈 수 밖에 없는 곳이 인생살이의 ‘빈 들’입니다. 그 빈들의 이름은 다름아닌 실패, 절망, 고독, 우울, 무기력, 허무 등입니다. 이런 것들이 만들어 내는 한계 상황 속에서 우리 스스로를 찬찬히 돌아 볼 때 빈들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에게 흘러들어오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삶의 빈들은 또 다른 은혜가 됩니다.

지금 인생의 빈들에서 서성이는 우리들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 빈들에는 오직 죽음만이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에도 생명은 살아 있습니다. 지금은 비록 바싹 마른 풀들만이 눈에 보여도 이제 하나님이 철따라 우로를 내려 주시면 그곳에도 초목이 무성하게 되어 생명은 살아 움직일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미 경험으로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망을 갖습니다. 지금 우리가 인생의 빈들을 살아도 하나님의 성령의 빗물이 우리에게 가득 넘쳐 흘러 내리기만 하면 우리의 심령도 새생명으로 가득차게 된다는 그 확신에서 큰 믿음을 갖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말씀하십니다.’필경은 위에서부터 성신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눈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삼림으로 여기게 되리라’

말씀을 정리합니다.
빈들은 황량한 곳이기는 하지만 분주한 현실을 떠나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 영적 정체성을 돌아 볼 수 있는 좋은 곳입니다. 빈들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영적으로 마지막의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일입니다 일상의 숨가쁜 회전 속에서 내가 누구인지?, 왜 사는지?를 잠시 돌아 보는 여유를 가지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꼭 광야로 빈들로 나가야만 되는 일도 아닙니다. 대신 수많은 군중 속에 섞여 사는 힘없는 존재이지만 광야같은 마음, 빈들과 같은 마음으로 우리 자신을 주님 앞에 내어 놓고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으려고 애쓰면서 사는 것이 바로 빈들의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가 회개하라고, 빈 마음이 되라고 선언한 것은 우리의 빈 마음에 예수가 찾아 올 수 있고, 우리의 빈 마음에 그리스도의 새로운 나라가 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오랜 가뭄으로 몸도 마음도 온통 먼지 투성이입니다. 성령의 단비로 후련하게 씻김을 받는 귀한 시간 되기기를 소원합니다. 빈들의 삶을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큰 은총을 경험하는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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