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February 24, 2010

꼴찌들에게 보내는 위로(히12:1-3)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목청껏 소리를 지르고 손뼉을 치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삽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우리에게는 좀처럼 이런 갈망을 풀 기회가 사라졌습니다. 환호가 아니라도 좋으니 속이 후련하게 박장대소라도 할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그럴만한 기회도 없습니다. 그저 하루하루를 덤덤하게 살아 넘길 뿐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의례적안 미소아니면 조소,냉소, 고소가 고작입니다. 나를 포함하여 이런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보노라면 얼굴 모양까지 얄궂게 변해 버릴 것 같은 걱정마저 들게 됩니다.
속 시원히 사람의 마음을 풀수 있는 기회는 뭐니뭐니해도 잘 싸우는 운동경기를 볼 때가 아닌가 합니다. 그런 점에서 지난 3월에 있었던 한국야구나 김연아 선수는 그 역할을 톡톡히 해낸 효자요 효녀였습니다.

흔히들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합니다. 그리고 운동경기 중에서 마라톤 만큼 우리들의 환호와 갈채를 받는 경기도 없습니다. 순간의 짜릿한 승부에 묘미가 있다는 100미터 단거리 우승자에게는 감탄을 하면서도 보다 긴 호흡의 승부인 마라톤 우승자에게서는 감동을 느낍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숨이 멎는 듯한 무서운 고통의 시간과 길고 긴 고독이라는 터널을 통과하는 인간 한계를 극복한 그 노력에 후한 점수를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의 여정을 마라톤과 같다고 할 때 우리 믿음의 여정을 또한 마라톤에 비유해도 하나도 지나칠 것이 없습니다. 오늘 히브리서 기자는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 갑시다’라고 평범하지만 가시 돋친 격려를 하고 있습니다.
또한 힘겨운 믿음의 길이지만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구름처럼 우리를 둘러 싸고 있으니’ 우리도 믿음의 선배들을 본받아 믿음의 길을 달려 마침내는 후대 사람들에게 믿음의 증인으로 본이 되자’고 굳센 각오와 결의를 요구하고 있으며, ‘우리 믿음의 근원이 되시며 완성자가 되시는 예수’를 닮아 ‘우리를 얽어 매는 온갖 무거운 짐과 죄를 벗어버리고’ 끝내는 믿음이라는 신앙 마라톤의 결승점에 도달하자고 매섭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히브리서 기자의 권면을 볼 때 우리가 달려가야 할 믿음이라는 신앙 마라톤의 여정은 설익은 낭만의 길이 아니라 오히려 뼈와 살을 깎는 진지한 장거리 경주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신앙의 마라톤 여정을 달리는 나로 하여금 자꾸만 발목을 무겁게 하여 그 자리에 주저 앉히려는 방해가 끼어 듭니다. 그것은 먼저 내가 얼마나 먼 길을 달려 왔으며, 또 앞으로 얼마나 먼 길을 달려가야 할 것인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나를 더욱 무겁게 하는 것은 도대체 나는 몇 등으로나 이 길고 긴 뜀박질의 길을 달려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마라톤은 아무리 힘들어도 42.195km만 달리면 됩니다. 그런데 인생 마라톤, 신앙 마라톤은 얼마나 먼 길을 달려야 하는 길인지?, 그리고 나는 얼마나 먼 길을 달려 왔으며, 또 얼마나 먼 나머지 길을 달려가야 할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달려 온 길은 이미 다 잊혀졌고, 그대신 앞길에 숨막히게 할 언덕이 몇 개나 남아 있을런지, 맞바람을 받으며 달려가야 할 내리막 길은 또 얼마나 더 있을런지 도대체 알 수가 없고, 그 생각만 하면 숨이 턱턱 막힙니다. 그래서 요즘처럼 산다는 것이 견디기 어려울 만큼 정말 너무 너무 힘이 들 때에는 어서 빨리 이 땅의 삶을 정리하고 저 곳의 삶터로 옮겨 가는 것이 더 현명할 것이라는 불신앙적인 생각을 아주 가끔은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재 보고, 저렇게 재 보아도 내가 선두그룹을 달리는 마라톤 주자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내가 어느 그룹을 달리는지를 알아야 힘을 더 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알게 아닙니까? 내가 제대로 뛰고 있는지 어떤지를 알 것이 아닙니까?그런데 도무지 알 재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심란해지고, 그래서 자꾸만 그 자리에 주저 앉고 싶어 집니다. 아를 어찌해야 합니까?

그러나 우리가 자꾸만 그 자리에 주저 앉고 싶은 충동을 떨쳐 내기 위해서는 42.195Km를 내어 달려야 하는 육상 마라톤과 신앙 마라톤과의 차이를 깨달아야 합니다.
먼저 신앙마라톤의 길은 쪽 대본을 들고 달리는 경주라는 사실입니다. 신앙 마라톤의 여정은 쪽 대본을 들고 연기하며 뛰는 마라톤의 길입니다. 육상마라톤은 이미 눈으로 확인 해 본 정해 진 길을 달려가는 경주이지만 신앙 마라톤의 길은 극을 전개해 가면서 작가가 계속 대본을 쓰는 쪽 대본에 따라 연기하며 달리는 마라톤 경기입니다. 설사 내 인생 여정, 내 신앙 여정을 위한 한편의 대본이 모두 완성되어 있다고 해도 절대로 그 대본은 한번에 내 손에 주어 지지 않는 법입니다. 그저 매일, 매회 주어지는 쪽 대본을 들고 연기하며 달릴 뿐입니다. 장래 일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물안하게 사는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는 경우 장래 일을 모른다는 것만큼 오히려 감사한 일은 없습니다. 내일 일을 알지 못하고, 우리가 죽을 날을 알지 못하고 살 수 있다는 것은 감사할 일입니다.
성경을 보면 쪽 대본을 받아 들고 달려간 믿음의 선배, 신앙의 선배들로 가득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이 바로 그런 사람들을 가득 담은 믿음의 장입니다. 아브라함도 쪽 대본을 받아 들고 달려간 믿음의 대표적인 증인입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쪽 대본을 들고 바로 그 곳 까지 달려 갔습니다.’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는 쪽 대본을 들고 곧장 모리아 땅 까지 내어 달렸습니다. 그 다음에는 또 어떤 길이 펼쳐 질지도 모른채 어떤 장면이 펼쳐 질지도 모른채 주신 쪽 대본을 들고 지시하는 곳 까지 연기하며 달려 간 것입니다.
지금 달려 가는 앞 길이 아무리 궁금해도 내 손에 들려진 쪽 대본에 따라 연기하며 달려가면 됩니다. 그러면 내일 이면 또다른 쪽 대본을 주실 것이고. 그 쪽 대본에 따라 연기하며 하루하루를 충실히 이어 달려가면 언젠가는 골인 지점에 영광스럽게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을 것은 이 쪽 대본들이 모두 모여 한편의 완결된 대본을 만들것이로되 이 모든 것은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을 이루어 가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둘째로. 신앙 마라톤은 남보다 먼저 달리는 경주가 아이라 모두가 함께 달리는 경기입니다. 육상 마라톤은 신기록 달성과 일등에 대한 집착으로 달리는 경주입니다. 육상 마라톤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예외가 없는 규칙에 따라 달리는 경기입니다. 이에 비해 신앙 마라톤은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더욱 엄중한 공의의 규칙으로 달리지만 이와 더불어 무한한 사랑의 규칙이 동시에 적용되는 경기입니다. 여기에다 신앙 마라톤은 처음부터 끝까지 실수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단숨에 잘 달릴 수 있는 선수는 아무도 없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경기입니다. 다만 골인 지점을 향해 달리며 ‘내 힘으로 가능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창조주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하나님을 더욱 의뢰해야 함을 배우고, 깨달으며 달리는 경주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마라톤에서는 등수에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천로역정에서 보는 것처럼 중간에 코스를 이탈했어도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경주이고, 더 이상 못가겠다고 아예 주저 앉는 사람들 모두를 축하와 격려로 손잡고 함께 달리는 일종의 이색 마라톤 경주인것입니다.
그래서 감탄보다는 감동이 넘칩니다. 왜냐하면 100m 경주 에서처럼 감탄은 탁월함에 대한 감정 표현이지만 감동은 훌륭함에 대한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신앙 마라톤은 신기록 수립이나 월계관을 쓰는 일등을 목표로 삼는 경쟁 마라톤이 아니라 예수가 주신 새계명(요13:34)’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사랑하라’는 명령을 목표로 삼는 동거 동락의 마라톤이기 때문에 경쟁 의식도 필요없고, 늦게 출발했거나 도중에 넘어지거나 하여 소비한 시간 때문에 피해 의식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신앙 마라톤이 가진 이런 특징들은 마라톤 주자인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그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는 우리가 누구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꼴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는 교육과 부와 사회적 지위와 업적이 어떠하건 우리는 모두 다 죽은 인생들이었습니다. 모태 신앙인이건 저 처럼 인생 40대 후반에 예수를 믿게 된 늦깍이건 우리 모두는 은혜시대 끝자락을 다행히 놓치지 않고 신앙의 마라톤을 함께 뛸 수 있는 주자가 된 은혜입은 꼴찌들임을 감사할 뿐입니다. 그리고 또한 감사한 일은 육상마라톤처럼 아직 가지 않은 미지의 골인 지점을 향해 뛰는 마라톤 경주가 아니라 영적으로는 이미 도착해 있는 그 골인 지점을 향해 뛰는 마라톤 경주라는 점에서 더욱 감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마음에 품은 것은 이미 이룬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5:4) 우리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이미 옮겨진 그 곳을 향해 뛰어 달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소망으로 달릴 수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모두 신앙 마라톤 경주의 꼴찌 주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실망하지 않고 소망으로 달릴 수 있습니다. 우리를 둘러 싼 허다한 증인들이 우리를 응원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앞서 가셔서 모든 것을 다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앞에서 친히 바람막이가 되어 주시고, 우리 꼴찌들 바로 옆에서 ‘으쌰, 으쌰’를 외쳐 주십니다. 우리 꼴지들이여, 우리는 다만 영광스런 골인 지점을 향해 하루 하루를 열심히 달려 갑시다.

Monday, February 22, 2010

Saturday, February 20, 2010

나는 너를, 너는 나를...



산업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용자와 피고용자, 즉 부리는 자와 부림을 당하는 자 사이에는 항상 긴장이 있어 왔다. 그리고 양자가 주고 받는 것에 대한 공평성에 대하여 편차가 클수록 그 긴장의 강도는 커지는 법이다. 언제나 부리는 자에게는 ‘그것으로 충분”(That’s enough)이라는 논리가, 부림을 당하는 자에게는 언제나 ‘더 많이’(The more, the better) 의 논리가 작용해 왔다. 언제나 가진 자가 힘을 가졌었지만 딱 한번 가지지 못한 자가 가진 자의 세상을 뒤집어 엎었던 시도가 있었고, 그것이 성공한 것처럼 보였던 것이 바로 성공한 실패70년 역사의 볼세비키 사회주의혁명이었고, 지금껏 살아 남은 것이 그 아류인 북한의 공산주의이다. 그러나 그것도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이 보기에는 이미 확실히 실패한 사회이념임이 분명하다.

성공하는, 발전하는, 그래서 누구나가 소속하고 싶은 조직이란 어떤 것일까? 그것은 간단하다. 주는 것만큼 열심히 일할 수 있는 사람과 일하는 만큼 충분히 공급해 주는 사용자가 만나는 곳이다. 이 논리란게 참으로 간단한 것 같아도, 실상은 그렇지 못해 그 오랜 역사에 있어서 That’s enough와 The more, the better가 싸워 온 것이다.

큰 아이가 미국 해군에 입대했다. 사람에게는 죽을 기회가 세번, 살 기회가 세번 찾아 온다고 했는데 이번 기회가 큰 아이가 큰 나라에서 좀더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기회라 여겨져 입대를 결심했고, 길지않은 시간이지만 고난의 훈련기간을 은혜가운데 마치고 졸업을 하였기에 남은 식구가 어려운 발걸음으로 시카고 훈련기지를 찾아 반가움을 나누고 서로 덕담을 나눌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졸업식에서 육군 편제로는 대령인 부대장 Captain의 훈시에서 받는 감동이 컸기에 여기에 소개하고자 하는 것이다. “Do your job, the Navy will take care of you’ (맡은 바 소임에 최선을 다하십시요, 여러분이 복무하는 해군은 여러분을 돌 볼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여 나라에 충성하는 세계 각 나라 출신들의 군인들 한명 한명을, 피부색이 다르고 지금까지 살아 온 배경이 달라도 미국이라는 국가를 위해 충성하기로 결심하는 사병 한명 한명을 해군이 책임지고 돌보겠다는 부대장의 훈시와 권면이고, 해군을 대표한 부대장으로서의 약속인 것이다. 나라를 위해서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하는 개인이 모인 미국 해군과 이들을 끝까지 책임져 주는 미국 해군이 어찌 세계 막강의 해군이 될 수 없을 것인가!

5학년 5반을 살아오는 동안 나름대로 이런 저런 조직에 속해 보았지만 아쉽게도 사람의 입을 통해서는 ‘최선을 다하십시요, 내가 끝까지 당신을 책임지겠소’라는 말을 들어 보지 못했고, 안타깝게도 아직껏 그런 조직에 몸 담아 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결국은 오늘 하나님으로부터 그 말씀을 들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8장 20절 말씀이다. 이 세상에서는 어려운 논리일지 몰라도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것이 기본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곳은 더 이상 다툼과 갈등이 필요없는 곳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Thursday, February 18, 2010

큰 아이를 격려코자!






사람에게는 살 길이 세번, 죽을 길이 세번 찾아 온다고 합니다. 큰 아이에게 더 넓은 세상에서 좀 더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기회로 찾아 온 줄 알고 해군에 지원했고, 고난의 훈련을 은혜가운데 마치고 졸업을 하게 되었기에 어려운 발걸음으로 남은 식구들이 시카고 훈련장을 찾아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고 앞길을 격려하는 자리를 갖고 잠시 외출하여 사진을 찍었습니다.

인생의 흉년에 붙들어야 할 손(룻1:1-5)



인생은 돌아 올 수 없는 차표를 들고 떠나는 나그네 길입니다. 그 나그네 길에서 우리는 오늘 보다 조금 더 나은 내일을 찾아 어디론가 끊임없이 움직여 갑니다. 살아보면 어차피 알게 될 일이지만 어제 떠나 온 출발지 그 곳보다 오늘 도착된 목적지가 딱히 나은 것도 아닌데도 그걸 위해 그렇게나 수고하고 애쓴 것을 생각하면 억울하기 짝이 없는 것이 우리네 인생 나그네 길입니다. 게다가 작은 꿈을 안고 떠나 도착된 그 곳이 언제나 더 나으라는 법은 없는 것이어서 때론 거기서 오히려 더 못한 상황이 펼쳐 질 때에는 그저 말문이 막힐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나오미 일가가 그랬습니다.
베들레헴의 옛 이름 ‘에브랏’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고 백성의 소망하던 곳인데 그곳에 말로 다 못할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 흉년을 피해 ‘하나님은 왕이시다’는 이름을 가진 남편 엘리멜렉을 따라 모압땅에 내려 온 나오미 일가가 흉년을 피하기는 커녕 완전히 망가져 내리는 인생의 흉년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나오미는 진실로 처절한 인생의 흉년 가운데 서있습니다. 배우자는 죽으면 땅에 묻지만 자식은 죽으면 부모의 가슴에 묻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객지에서 남편 잃고, 자식도 그것도 둘이나 잃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과부는 먹고 사는 일도 편치 않고 서러운 법입니다. 그런 과부 나오미가 두 자부와 함께 이방 땅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저 막막할 뿐 입니다.
웃음짓는 소수의 승자 뒤에는 피눈물 흘리는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패배자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승패와 우열이 확실하게 구분되는 글로벌 무한 경쟁시대를 삽니다. 우리가 사는 미국의 실리콘 밸리는 성공의 요람이라고 하여 한 때 발 붙일 곳이 없도록 붐비던 곳이었자만 사실 그곳은100개의 새로운 벤쳐가 나타나면 그 가운데 겨우 하나만 살아 남고 99개는 피어 보지도 못하고 죽는 실패의 요람입니다. 손맛 하나만 믿고 부지런히 노력하면 먹고는 산다는 식당도 1000개가 생겨야 겨우 6개가 살아남아 1%의 성공율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경쟁이 심합니다. 이처럼 처절한 한계 경쟁의 시대가 바로 오늘의 경쟁시대입니다. 참으로 피하고 싶은 착잡한 현실입니다.

인생이란게 다 그렇고 그런 것이어서 풍년이 들다가도 흉년이 드는 법이고, 흉년에 고생하다가도 또 풍년이 들어 언제 그랬나 싶게 흉년의 고생을 말끔히 잊어 버리는 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흉년을 맞아 먹고 살기가 막막한 사람들에게는 과거 풍년에 대한 기억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고 이 기회만 잘 넘기면 또 풍년의 풍성한 시절이 찾아 온다는 위로의 말도 별반 소용이 없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쓰러져서 다시 일어나는 일은 여전히 어려운 일입니다.
실패한 모두가 그들 인간적인 노력만으로 다시금 다시 일어 설 수 있다면 뭐 그리 대단하게 실패의 고통을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누가 실패의 고통 속에서 폐인으로 마지막 남은 삶을 연명하며, 누가 실패로 인해 스스로 인생을 마감하는 삶을 살겠습니까? 아무리 다시 서려고 노력해도, 해도 해도 안되니까 선택하고야마는 그 길이 일본과 같은 자살대국에서처럼 한계 경쟁사회에서 패자들이 걸어 가는 삶의 마지막 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는 우리들은 인생의 흉년을 맞아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그것은 먼저 인간의 눈으로 볼 때 한없이 한심하고 억울해도 인생의 흉년 가운데 처한 모든 문제가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인생의 흉년을 만나면 힘들고, 아프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이 흉년의 상황이 어서 빨리 사라져 주기를 바라고 기대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인생의 흉년 가운데 숨겨진 의미를 찾기 보다는 우리를 흉년 가운데 던져 넣은 그 상황이 없어져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평소때와는 달리 사생결단의 기도로 주님께 매달리는 신앙의 열심을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인간적인 생각으로’이번 기회만 잘 넘기면’을 곱씹으며 발버둥 쳐보지만 하나님은 엘리멜렉을 이방 땅에서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게 하셨고, 두 아들 마저도 데려가 결국은 나오미와 두 자부를 회생키 어려운 한심한 처지에 몰아 넣으신 것처럼 우리들도 다시는 회복할 수 없을 것 같은 처지에 몰아 넣으실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룻기의 처음 이야기를 살고자 발버둥 치는 우리들의 입장에서 보면 처음 이야기의 결말이 너무 허무하고 비극적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흉년에 닥친 문제들을 그대로 얼마동안 머무르게 하시거나, 아주 해결해 주시지 않거나, 때에 땨라서는 오히려 우리의 생명마저도 거두어 가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이 노년에 허락하신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기 위해 아무런 의문과 미련없이 제단을 향해 길을 떠나는 아브라함이 가졌던 신앙의 자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인간적 기대를 포기하게 하는 삶은 잘못하면 자포자기의 삶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기대를 포기하면서도 더 이상의 희망이 없을 것 같은 그 흉년 가운데에도 아직도 희망의 불씨는 살아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룻기의 처음 이야기에서 나오미 가정이 몰락하는 한심한 처지의 이야기는 1장 1절로 5절까지가 전부입니다. 오늘 룻기의 본문을 보면 인간의 죽음 , 더구나 한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던 남성들의 죽음이 너무나도 간단히 기록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한 가정을 책임지던 남자들의 삶이 그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믿는 우리들에게도 똑같은 슬픔의 이야기가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이야기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한심하고 억울한 처지를 통해서도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패자 부활의 계획이 있음이 룻기에서 더욱 중요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룻기에서의 희망의 새로운 삶은 5절의 ‘남았더라’라는 단어가 그 전조가 됩니다. 룻기의 초반부에는 슬픔과 괴로움과 고독의 처절한 가뭄이 가득했지만 그런 가운데도 여전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때문에 가능한 사막의 오아시스같은 새 삶은 바로 ‘남았더라’는 단어를 통해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때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더 이상 스스로에게 의지할 만한 것이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만을 온전히 의뢰하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집니다.
6절을 보면 나오미는 이방 땅에서 고국 땅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그것은 나오미가 고국 땅에서의 풍년 소식을 들은 것이 이유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고국 땅의 백성을 돌보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오미는 그 소식을 듣자 마자 곧바로 행동으로 옮겨 고향으로 돌아 갔습니다.
그래서 룻기는 1장 1절로 5절에서 끝나지 않고 마지막 4장까지 이어졌고,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룻기의 비극은 사라지고 점점 더 기쁜 일을 향해 달려 가는 것입니다. 룻이 보아스를 만나는 극적인 이야기의 결국이 다윗의 조상이 되고 다윗 왕국을 이룬다는 사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 자손 중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룻기의 이야기는 패배의 이야기가 아니라 더 없이 풍성한 패자 부활의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비록 암담하고, 소중한 가족들이 죽을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하나님의 크고 넓은 구속사 속에서는 더 큰 풍년을 위한 희망의 불씨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현실 역시 계속되는 흉년의 때이지만 모든 것을 잃는다 해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 남는 우리는 새로운 역전의 패자 부활의 이야기를 쓰는 위대한 역사 가운데 설 수 있고, 인생의 흉년 가운데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 같아도 우리에게 남는 영원한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어떤 어려움 가운데서도 희망을 노래 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흉년을 극복한답시고 잔머리를 쓰며 현실을 도피하는 삶은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결국은 낭비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도피성 현실 극복이 아니라 흉년의 현실 속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 분을 즐기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 올바른 신앙인이 살아야 할 삶의 자세입니다.
하나님을 내게 맞추는 삶이 아니라 나를 하나님께 맞추는 삶, 남은 자의 소망을 가지고 이 어려운 현실을 살아내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만이 인생의 흉년에 우리가 붙들어야 할 손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호랑이한테 쫓기던 햇님과 달님이 ‘우리를 살리시려거든 우리에게 튼튼한 동아줄을 내려 주시고, 우리를 죽이시려거든 썪은 동아줄을 내려 주세요’ 기도했고, 오누이는 하늘에서 내려 온 튼튼한 동아줄을 붙잡고 하늘로 오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어릴적 듣던 동화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 사는 일이 참으로 어렵다 보니 우리의 어리석음이 세상이 내미는 이 손 저 손을 생각없이 붙잡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고난 가운데 붙들어야 할 손은 하나님의 손 밖에 없습니다.
원하고 바라옵기는 우리를 향한 그 많은 손길들 가운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참 손만을 붙들 수 있는 굳은 믿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손을 내미시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인내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믿사옵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Wednesday, February 17, 2010

벼룩시장을 아시나요?

유서 깊은 세계에 도시가 빠지지 않고 가지고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벼룩시장입니다. 가난한 예술가들의 스튜디오와 인도 이민자들이 운영하는 옷감 공장이 모여 있던 브릭 레인, 영화”노팅힐’의 배경이 되었던 포토벨로 마켓이 영국 런던의 유명한 벼룩시장이라면 낮춰 말하면 고물시장, 고급스럽게 말하면 빈티지마켓인 메구로도로리에는 일본의 유명한 벼룩시장입니다. 클리낭쿠르는 불란서 파리의 유명한 벼룩시장으로 파리의 남대문시장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말이면 70여개의 벼룩시장이 열리므로 눈에 띄는 대로 잘 고르면 60년대에 나온 루이뷔통이나 구찌, 크리스티앙 디오르, 입생로랑 등을 손에 쥐는 행운(!)도 잡을 수 있는 곳입니다. 미국에도 뉴욕에 서는 알짜배기 쇼핑 벼룩시장이 있습니다. 6번가와 24-27번 스트리트가 만나는 곳에서 열리는 Annex Antique & Flee Market에서는 가구와 장식품, 보석, 은제품을, Central Park 인근의 Columbus Circle Market에서는 옷과 액서서리, 공예품들을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런가운데 뉴욕벼룩시장의 알짜배기는 모피쇼핑이기도 합니다. 동물보호주의자들로부터 욕을 먹고 가끔 돌팔매질을 당해도 잘고르면 거저(!)인데야 어쩌겠습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 미국동네 주변에도 몇 군데에 벼룩시장이 섭니다.
한국에도 지금 대통령이 서울시장으로 있을 때 벌인 청계천 정화 작업때문에 거의 사라지고 명맥만을 잇고 있는 청계8가인 성동기계공고 옆쪽을 따라 형성된 황학동 벼룩시장이 있습니다. 지금은 간신히 명맥만을 잇고 있지만 한참 때는’세상에서 제일 비싸고 단 하난 뿐인 1억짜리 오디오도 만들 수 있다’,‘마음만 먹으면 우주선도 만든다’는 황학동 벼룩시장은 지금은 돈도 아닌(?) 1천원만 들고 가도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던 시장이었습니다.

서설이 길어졌습니다. 벼룩시장에 가면 참으로 재미있다 못해 행복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가끔은 두 아이들을 데리고, 특히 공부하는 큰 아이를 피해 작은 아이를 데리고 황학동을 찾은 기억이 있습니다. 이곳을 찾는 이들은 나처럼 재미와 행복을 느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벼룩시장에 한구석에 자리잡고 좌판을 펴는 사람들에게는 남모르는 애환이 있다는 사실을 같이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장이 서는 날마다, 아니면 주말마다 보따리를 풀고 장판을 벌이는 사람들이 가진 꿈이란게 무엇이겠습니까? 별것아니지요, 남들처럼 허름해도 내 가게하나 가지는거 아니겠습니까? 이런저런 까닭으로 나이 먹어 인생말년이 되도록 벼룩시장 장사꾼한다고 스스로를 말하고, 또 속모르는 사람 홈리스들 집세 안나가니 얼마나 좋겠냐?고 말하는 것처럼 좌판장사하니 가게세 안나가 얼마나 좋겠냐? 말할지 몰라도 그 깊은 속은 그래도 내 가게 하나 얻어 갖는 것입니다.
가끔 우리 믿는 이들이 벼룩시장에서 좌판행상하는 장사치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주말에 한번 열리는 벼룩시장처럼 주말에 한번 교회에 나와 고생보따리 염려보따리 좌판을 벌여 놓고 하나님께 ‘이 고민 사주세요’, ‘저 염려사주세요’ 하루 종일 지나는 사람 얼굴 쳐다 보다가 남은 고민, 남은 염려 보따리 주섬주섬 꾸려 쳐진 걸음으로 집으로 되돌아가는데 이골난 수십년 벼룩시장 장사치가 아닌지를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또”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라고 하셨고,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그대로 믿을 뿐입니다. 더 이상 고생과 염려를 펼쳐놓고 사주기를 기다리는 믿음없는 벼룩시장의 행상은 그만두십시다.

Monday, February 15, 2010

Thursday, February 11, 2010

그것은 본능이었습니다

남가주에 오랜만에 많은 비가 내렸습니다. 덕분에(!) 많은 사고와 그에 따른 어려움이 있었지만 몇년 계속된 가뭄에는 큰 도움이 되었을겁니다.
유년부 아이들이 놀던 모래판에도 많은 비가 오니 작은 웅덩이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그곳도 좋은 놀이터가 되어 의자들을 드믄 드믄 놓고 징검다리 건너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즐겁습니다.
월요일이면 교회 뜰 안도 고즈녁해 집니다. 어디서 날아 왔는지 멧비둘기 두어 마리가 물에서 퐁당퐁당 멱을 감습니다. 까치대신 미국에서 흔히 보는 까마귀도 풍덩 목욕을 합니다. 날아가던 오리도 잠시 들러 첨벙, 한가히 물놀이를 하다 갑니다.
늘상 물이 고여있던 웅덩이도 아니고 많은 비가 많이 온 까닭으로 잠시 생겨 났다 이제 햇빛과 햇볕이 며칠만 계속되면 다시금 바짝 말라버릴 모래판인데도 이 비둘기나 까마귀, 그리고 지나던 오리들은 이곳에 물이 고인 것을 어찌 알았을까요? 신기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본능으로 밖에 답을 구할 길이 없습니다.
바쁘게 살 때는 몰라도 한살 두살 나이를 먹어가니 가끔은 고향 생각이 납니다. 그것이 우리네들의 귀소 본능이 아닐까 합니다. 아무리 척박한 세상을 살아도 하나님을 찾는 종교의 씨앗이 우리들 마음에는 숨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큰 일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아이구 하나님’을 찾게 되는 거구요.
믿는 우리들은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우리를 찾아 주셔서 강권적으로 마음에 감추어진 종교성을 일깨우시고, 하나님을 우리의 영적인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하시니 감사한 것이지요.
웅덩이에서 퐁당거리는 오리를 보는 일이 참으로 한가롭습니다.

Monday, February 8, 2010

고난에 빠진 나를 극복하는 법 (왕하20:1-11)

살다가 만나는 고통과 고난에는 뜻이 있고, 우리가 눈을 돌려야 할 대상은 고난 그 자체가 아니라 고난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이며, 하나님의 그 손길의 의미를 깨달으면 고난은 오히려 생명의 양식 이라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의 삶에서 고난을 피하고 싶은 것이 우리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오늘은 고난 가운데에 있는 두 사람을 묵상하는 가운데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 속담을 심리학적 용어로 좀 고상하게 풀면 이렇습니다. 자라보고 놀란 사람은 자라만 보면 본능적으로 피하게 되는데 이를 ‘회피’라고 합니다. 그런데 자라 때문에 몇 번 놀라고 나면 이번에는 자라 등 껍질 같은 솥뚜껑만 봐도 ‘이크’하고 놀라 뒤로 꽁무니를 빼는데 이번에는 이를 ‘도피’라고 부릅니다.

‘회피’와 ‘도피’는 우리의 삶 속에서 심리적으로 거부감을 일으키는 사상을 피하려는 심리적 방어 기제이고, 삶의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삶에서 회피반응과 도피반응을 보이는 것은 지극히 정상입니다. 그리고 삶의 무게가 무거울수록 회피반응과 도피반응의 정도는 더욱 커지는 법인데 오늘의 주인공 가운데 하나인 엘리야가 바로 그랬습니다. 구약성경 가운데 모세와 함께 가장 중요한 사람이 바로 엘리야였습니다. 엘리야는 선지자의 대표인 동시에 신앙의 영웅인데 그 엘리야가 오늘 로뎀나무 아래에 주저앉아 하나님께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독백하는 가운데 전형적인 도피행동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왕상19:3-4)

왜 엘리야가 이렇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바른 신앙에서 잠시 벗어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3년 동안 삶의 거처를 네번씩이나 옮기면서 쉼 없이 기아, 왕, 거짓선지자들과 싸우며 바쁜 삶을 살았던 엘리야가 일순간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 이유가 바로 말씀과 기도로부터 상실되었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왕상 19장 이전 까지 엘리야의 삶을 살펴 보면 그곳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과 인도하심이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그랄시냇가로 가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갔고, 말씀에 따라 사르밧으로 떠났습니다. 또 말씀에 순종하여 아합 왕에게 우상 숭배를 경고하고 심판이 있을 것을 말했습니다. 이처럼 엘리야는 말씀과 기도의 인도에 따라 장소를 옮겨 가고 있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19장에 들어 와서는 그만 지금까지의 패턴이 깨져 버립니다. 아합왕의 아내 이세벨의 오뉴월 서릿발 같은 협박에 기가 질렸던 엘리야가 이세벨의 두말 안쪽에 도망하여 광야로 들어 갔을 때 그곳에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당당하게 맞섰던 엘리야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리고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라고 넋두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와 나와의 거리가 하나님과의 거리입니다. 내가 말씀에서, 기도에서 멀어지는 거리만큼 하나님과 나와의 거리가 멀어지는 것이고 그 결과는 누구든 엘리야와 같은 존재로 전락할 수 있게 되며, 그래서 이러한 증상을 우리는 엘리야 신드롬이라 부릅니다.

오늘의 또 하나의 주인공이 히스기야입니다. 유다 11대왕으로 사악하기로 유명했던 아버지 아하스와는 달리 어머니 아비야의 영향을 받은 히스기야는 선대의 모든 사악한 영양을 물리치는 가운데 올바른 행동으로 나라를 다스리게 됩니다. 이 히스기야를 통해서 우리는 고난에 처했던 그가 어떻게 그 고난으로부터 헤어 나 올 수 있었는지 귀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먼저 그는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하자 목숨을 걸고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이끌어 낸 사람입니다. 성전 정결 작업을 시작으로 통치를 시작한 히스기야였습니다. 외세에 대한 치세가 무엇보다 급하다고 생각했던 히스기야는 선지자 이사야의 만류와 미가 선지자의 꾸짖음에도 불구하고 인접한 애굽, 블레셋, 시돈, 에돔, 모압, 압몬 등의 이방과 동맹을 맺어 자신이 맹주가 되어 강국 앗수르의 산헤립에 대항하려는 눈부신 활약을 시도하였으나 산헤립은 거꾸로 히스기야 연합군을 대파시키고 막대한 배상을 요구하고, 더 나아가 예루살렘마저 내 놓으라는 위협으로 인하여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처하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우리를 그 손에서 구원하옵소서 그리하시면 천하만국이 주 여호와는 홀로 하나님이신줄 알리이다”(왕하19:19) 히스기야의 간절한 기도는 이사야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알게 하십니다.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앗수르 왕 산헤립 까닭에 내게 기도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왕하19:20) 하나님께서는 사자를 보내심으로 앗수르의 진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을 치심으로 한 밤에 죽게 하셨고 (왕하19:35), 산헤립은 또한 자기가 낳은 자식들의 손에 죽게 하셨습니다. 이로써 히스기야의 기도는 국가 공동체를 기도로 구해내는 전형이 되었습니다.

기도로 국가를 존망의 위기로부터 구했던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부르짖음으로 개인의 난제를 해결하고 응답을 얻어 낸 개인기도의 전형을 다시 한번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히스기야가 병들어 목숨이 경각에 이르게 되자 다시 한번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함으로 15년간의 생명 연장을 허락받은 기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 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의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심히 통곡하더라”. 이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다시 이사야를 통해서 병을 낫게 할 처방을 알려 주셨고, 히스기야가 병이 나을 징조가 무엇인가를 물었을 때 선지자 이사야가 하나님께 간구하므로 일영표 위에 나아갔던 해를 뒤로 십도 물러가게 하는 징표를 보여 주셨다는 그 유명한 히스기야의 기도를 우리는 잘 압니다.

히스기야의 생명 연장을 가능케 했던 히스기야의 기도에는 몇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생명 연장을 위해서 하나님께만 간구했던 기도였습니다. 히스기야는 왕으로서 세상의 모든 부와 권력과 영광을 지닌 존재였음에도 자신의 죽을 병을 고침 받기 위해 오로지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간구의 기도를 했습니다. 둘째로 히스기야는 성전을 향해 기도했습니다. 일어 날 기력조차 없을 때에도 성전이 있는 벽 쪽을 향하여 얼굴을 돌려 기도했습니다. 비록 눈 앞에는 벽이 가로 막혀 있지만 그 벽 너머에는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있고, 그 곳에 계신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드리는 기도였습니다. 셋째로 병으로 목숨이 경각에 달리자 히스기야는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낮아져 어린아이와 같이 작은 자가 되었고, 왕의 체면에도 관계없이 하나님께 매달리는 통곡의 기도를 하였습니다. 히스기야의 눈물의 기도는 그의 간절한 심정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도한 히스기야는 목숨이 경각에 달렸던 병으로부터 회복되어 15년을 더 살 수 있는 회복의 허락을 받았던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히스기야의 기도 방식을 놓고 어떻게건 하나님에게 떼를 써서 커다란 선물 보따리를 받으려는 기도, 사람인 주제에 감히 하늘을 움직여 보겠다는 언감 생심의 기도라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모세 다음가는 신앙의 영웅, 선지자의 대표였던 엘리야가 말씀과 기도로부터 멀어지자 곧장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보았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함으로 나라를 구하고 자신의 생명을 연장 받는 히스기야의 모습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성경이 교훈하는 바를 그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히스기야의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전문성을 굳게 믿는 믿음에서 행한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히스기야의 기도는 하나님께 불경한 기도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택하신 백성을 하나님께서는 버리지 않으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무너져 내린 엘리야에게 두 번씩이나 천사를 보내 떡을 구어 먹이시고, 마른 목을 축이게 하시고, 세미한 음성으로 찾아 주심으로 쓰러진 엘리야를 다시 세우신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새해에 ‘신이 외면한 나라’라는 오명을 들어야 했던 중남미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 먹일 것이 없어 아이들에게 진흙으로 만든 과자를 먹여야 했던 부패와 정정불안, 연이은 자연재해의 피해국 아이티를 강타한 진도 7.0의 지진은 새해를 살기 시작한 우리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 줍니다. 우리가 붙들 것은 무엇입니까? 사람입니까? 명예입니까? 아니면 재산입니까? 이생의 자랑도 아니고, 안목의 정욕도 아닙니다.
그 대신 히스기야가 믿었던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동시에 말씀에 의지하여 간구로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당당히 요구하는 큰 믿음으로 오늘 내가 처한 고난을 극복해 나가는 것이 새해의 첫달을 마무리 하면서 우리가 붙들어야 할 유일한 살 길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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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주님, 오늘도 하루를 허락하시니 감사합니다. 홍해를 건널 때는 하나님께서 직접 홍해를 가르시고 백성들이 건너게 하시고, 요단강을 건널 때는 사람이 스스로 강물에 발을 내어 디딜 때 강물이 갈라지게 하신 것처럼, 강권적으로 믿고 구원받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로 하여금 일상에서 스스로 하나님 편에 설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잊은 삶을 살 것인가를 선택하게 하십니다.
원하고 바라옵기는 이생의 환난이 아무리 커도 주안에서 벗어나는 삶을 살지 않게 하시고, 금년 한해의 고난이 아무리 커도 줄기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떨어진 가지가 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도 이 시간을 마치면 모두 일상의 삶으로 돌아 갑니다. 승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믿사옵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아멘…

Sunday, February 7, 2010

Saturday, February 6, 2010

예루살렘에서 부르는 The Holy City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두 부부입니다


정말 미천한 동물에게서도 배울 게 있습니다.

섬기는 교회의 땅이 넓어서 그런지 크지 않은 동물들 여러가지와 더불어 삽니다.
제일 많게는 땅 다람쥐(Gopher)이고, 그 다음으로 들고양이, 일정한 세력권을 정해 놓고 사는 스컹크, 그리고 아빠와 엄마, 그리고 아들과 딸들이 사이좋게 몰려다니는 너구리 , 그리고 시궁창을 헤매고 다니는 기분나쁘게 생긴 파섬 , 다람쥐 등등과 더불어 사는 셈입니다.
얼마전에 신문에서 비단뱀이 산돼지를 삼킨 것까지는 좋았는데 숨을 못쉬고 죽은 기사가 올라왔었습니다. 폭식의 결과로 장엄한(!) 최후를 맞은 것이었지요.
이 기사를 보면서 교회 주변에서 사는 들고양이를 생각해 봅니다. 이 고양이들이 땅 다람쥐를 먹이로 사냥할 때를 가끔 눈여겨 보게 되는데 참으로 감명을 받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우선 땅다람쥐가 들랑달랑 거리는 구멍을 정해 놓고는 멀지 않은 곳에 쪼그려 엎드리고는 기다립니다. 언제 나올지도 모르는 땅다람쥐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겁니다. 어떤 때는 아마 몇 시간을 기다리는 것 같습니다. 먹고 사는 것이 힘들다고 말하지만 들고양이들 세계라고 예외는 아닌 것이지요. 그나마 구멍 안에서 땅다람쥐들이 눈치라도 채는 날이면 그 날은 공치는 날입니다. 꼭 Labor Market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일터를 못 구하고 힘없이 어깨가 처진 채 돌아가는 노동자들의 신세가 생각납니다.
그러다가 한마리라도 잡을라 치면 그 놈도 기분이 매우 좋은 모양입니다. 잡은 땅 다람쥐 혼을 빼놓으려는 심산도 있겠지만 이리 펄쩍 저리 펄쩍거리며 먹이를 물고 자기 집으로 기분도 명쾌하게(!) 돌아갑니다. 분명한 것은 사람들 처럼 잡은 먹이감 옆에 놔 두고 다른 먹이감 을 기다리는 법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만큼 먹을 양만 잡으면 되는 것이 보통의 짐승들이 습성인가 봅니다.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것이지요.
성경은 여러 곳에서 과한 물질욕에 대한 경고의 말씀을 주시고 있지만 그게 쉽지는 않습니다. 항상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애쓰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습성이고, 그 습성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보통 인간들의 한계입니다.

이점에서는 하찮은 미물들이 인간들보다 낳은 것 같습니다.

Wednesday, February 3, 2010

엘리야의 믿음 (왕상 18:33-39)

지난 몇년 동안 매년 캘리포니아가 산불로 몸살을 앓았는데 금년에도 또 스테이션 산불로 많은 재산 피해와 심적인 걱정을 겪었습니다. 이번 산불은 그 규모가 캘리포니아 최대의 산불로 기록되게 되었으며 수십채의 가옥을 태우고, 8천만불을 넘는 피해를 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도 산 꼭대기에서 벌어지는 불싸움 이야기입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아합왕의 바알 선지자 450명과 벌이는 싸움판입니다. 산 정상에 있는 제단에 송아지를 잡아 놓고 각자의 신에게 기도를 올리고 그 기도에 응답하신 각자의 신이 제물을 불로 사르는지를 보아 누구의 신이 참 신이신가를 결정하자는 한판 승부였습니다.
먼저 450명 바알 선지자들이 달려 들었습니다. 말 그대로 하늘에 있는 그들의 신을 부르기에 난리 법석이었습니다. ‘바알의 이름을 불러 가로되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그러나 바알이 참 신입니까? 그러나 하루 종일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바알 선지자들은 그들의 규례대로 자해에 가까운 행위로 피가 흐르기 까지 그들의 몸을 칼고 창으로 상하게 했습니다.
엘리야가 얼마나 배포가 큰 선지자인지는 모르겠고 죽기를 각오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바알 선지자들을 살살 약올렸습니다. ‘엘리야가 저희를 조롱하여 가로되 큰 소리로 부르라 저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 잠간 나갔는지 혹 길을 행하는지 혹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바알 선지자들 입장에서는 깐죽거리는 엘리야를 쳐 죽여도 시원치 않을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어쩝니까? 그 난리 법석에도 하늘에서는 아무러 소식이 없는데 어쩌겠습니까?
이제 엘리야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근 한달동안 스테이션 산불을 진화하는 그 많은 소방관들이 하늘과 땅에서 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늘에서는 큰 비행기로 뻘건 소화 분말을 뿌려대었고 강과 호수에서 물을 퍼다가 불나는 곳에 뿌려 댔습니다. 땅에 있는 소방관들은 불이 붙을 만한 지역에 미리 맞불을 놓거나 해서 불붙을 만한 것을 미리 없애는 일을 했습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워서 알듯이 불이 잘 붙으려면 산소가 있어야 하고, 불이 붙을 재료가 있어야 하고 불이 붙을 재료는 기왕이면 바싹 말라야 불이 잘 타는 법입니다. 거기다가 성냥같은 불로 그어대면 활활 불이 잘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성냥 같은 불이 바로 오늘 하늘에서 신이 내려 주는 불입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희한한 짓을 합니다. 제단에 제물을 쌓아 놓고, 주변에 고랑을 파고는 제단과 주변에 물을 퍼다 부으라고 했습니다. 이 짓을 세번이나 하게 했는데 이것은 주변이 물에 흥건히 젓어 질펀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도대체 무얼 믿고 이런 짓을 했습니까? 사실을 그 해답의 실마리가 32절에 있습니다. 엘리야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돌로 제단을 쌓고’ 그렇습니다. 엘리야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을 그냥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하나님의 권능을 철썩같이 믿었습니다.
그리고 기도했습니다.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그 결과가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는 그 해답을 잘 압니다.’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핧은지라’ 불이 얼마가 거셌는지 불이 번제물과 물이 가득한 도랑을 핧았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엘리야는 바알의 선지자들을 보기 좋게 이겼고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들을 기손시냇가로 끌어다가 처단했습니다.
지난 4-5주 동안 스테이션 산불을 끌 수 없었고 아직도 불씨가 남아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람이 강하게 불었고, 날이 더웠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바람의 방향이 소방관들의 마음대로 따라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자연을 누가 쥐고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천지를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동안 비를 내려 주셨고, 바람을 잔잔히 해주시고, 날씨를 서늘 하게 해주셨으면 벌써 끝이 났을 이야기 입니다.
갈멜살 제단 고랑에 넘치는 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를 둘러 싼 온갖 고난과 역경입니다. 그러나 이 고난과 역경 중에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그까이꺼 아무것도 아닌 것을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성경을 읽으면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는 말씀이 수없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런데도 실제 생활에서 우리가 고난 중에 처하게 되면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됩니다. 날마다 기도하면서도 ‘그건 그거고’라고 말하는 불신앙의 자세를 우리는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을 온전히 믿고 바라 보는 참 신앙의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하여 어려운 시국을 잘 넘기는 슬기로운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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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주님 감사합니다. 오늘 특별히 성령님이 함께하여 주셔서 파키스탄 셀과 북한 셀이 연합으로 좋은 곳에서 모여 말씀듣고 교제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원하고 바라옵기는 우리 모두가 엘리야가 하나님을 향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바알 선지자들을 대적한 것처럼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 우리 둘러싼 모든 고난과 역경에 담대히 맞서 헤쳐 나가는 참 신앙을 삶을 살게 하옵소서. 환난날의 산성이시고, 고난 가운데 피할 바위가 되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믿음을 허락하시옵소서.
믿사옵고,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여리고 대작전 (수 6:1-4, 12-15, 20)


모맥 거두는 시기, 언덕까지 철철 넘치던 요단강,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물이 끊어졌습니다. 안 당해 봐서 그렇지 얼마나 신이 났겠습니까? 그 길을 200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이 건넜습니다.
요단을 건너고, 길갈에 진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 이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할례를 행했고, 유월절도 지켰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슴에 남았던 애굽의 수치를 저 멀리 굴려 버렸습니다. 광야에서의 노예와 같은 삶도 끝이 났습니다.
지금까지 내리던 만나도 그쳤습니다. 이제부터는 가나안에서 나는 산물을 먹어야 했고, 백성들은 새로운 환경에 도전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길갈은 백성들이 뿌리를 내릴 곳이 아니었기에 그들은 가나안 본토를 정복해야 했습니다. 이 정복의 여정에 처음 가로 놓인 것이 여리고 성이었고, 이 여리고성을 점령하느냐 실패하느냐에 따라 이스라엘의 앞으로의 방향이 결정될 것입니다.
여리고성은 어떤 곳일까요? 그리고 여리고 성의 점령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여리고성은 둘레가 약 600m, 1500명 정도의 사람들이 살았던 성읍으로 추측됩니다. 그 당시의 성읍들은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것처럼 큰 규모가 아니었습니다. 규모는 작았지만 성은 잘 지어진 건축물로 아무도 그 벽을 타고 넘어 여리고로 침입할 수 없는 완벽한 구조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리고성은 가나안 본토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었습니다.
1절의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들로 인하여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고 했습니다. NEB 성경에는 ‘bolted and barred’ 볼트로 조이고 빗장을 걸었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이미 이스라엘에 대한 소문을 들은 여리고 성과 주변 사람들은 성으로 들어가 문을 굳게 잠그고 출입을 금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이 성읍을 포기하고 그냥 지나가 주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전쟁이 오래 갈 수록 밖에서 공격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조해질 것이지만 철통같은 요새 안에서 식량을 마련해 놓고 상황을 주시하는 여리고 주민들이 밖으로 나와 싸울 기미는 조금도 없습니다.
이 성은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었습니다. 이 곳을 점령하지 않으면 이스라엘의 뒤를 귀찮게 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코끼리를 괴롭히는 것은 사자가 아니라 작은 쥐, 생쥐입니다.

적은 숫자가 끊임없이 뒤에서 귀찮게 할 것이고, 이는 결국 가나안 본토 정복 과정에 큰 장애요소가 될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또한 여리고성의 함락은 여호와 구원의 실제적인 실례이면서도 표본이기 때문에도 반드시 정복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여리고성을 무너뜨린다는 것은 오로지 믿음으로 접근할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히 11:30은 ‘믿음으로 칠일동안 여리고를 두루다니며 성이 무너졌으며’라고 하여 여리고 정복에 믿음을 말했습니다. 또 수6:2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여리고와의 싸움은 이스라엘 백성과의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여리고 정복 전쟁은 하나님이 함께 싸우는 싸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싸우는 전쟁에서 상대는 더 강퍅하게 나오기 마련입니다. 기왕 질 거 빨리 항복하고 나오면 좋을 터인데 말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향해가는 온전한 믿음 생활을 가로막는 내앞의 여리고는 무엇입니까? 마음의 할례도 했고, 마음의 유월절도 지켰는데 내 앞에 버티고 있는 여리고는 무엇입니까? 아직도 내 마음에 남은 자존심입니까? 내 재능입니까? 명성입니까? 아니면 내가 지금껏 쌓아 놓은 재력입니까? 이것들이 시시때때로 내 믿음의 생활을 방해하고 있습니까? 아무리 위해서 기도해도 아직도 돌아서지 않는 내 가족이 있습니까? 내가 다니는 사업장, 사장을 위해 동료들을 위해 기도하는데 이들은 오히려 마음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나를 핍박합니까? 이 모든 것들이 내가 무너뜨리고 넘어서야 할 여리고들입니다. 내가 정복해야 할 마음의 여리고, 생활의 여리고들인 것입니다.
여리고는 인간의 눈으로 볼때 난공불락의 성입니다. 참으로 난감한 지경입니다. 그러나 이 때에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수 6:2에서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붙이셨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손’은 신체의 한 부분이지만 손은 힘과 권능과 지배와 보호를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여호수아와 그 백성에게 붙이셨다고 하셨으니 이 싸움은 반드시 승리합니다. 이제는 다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뿐입니다.
그래서 6장의 여리고성 함락에 있어서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세심한 명령이며, 이 명령을 그대로 따라 행하는 이스라엘의 순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에서 보였던 불순종과 자만은 모두 사라지고 여기에서는 구체적인 하나님의 명령을 그대로 수행하는 행동만이 나타납니다. 이 순종 때문에 나머지는 모두 하나님이 하실 일이 됩니다. 하나님이 승리하십니다. 그리고 그 승리는 나의 승리가 됩니다.
3절로 5절에 여리고 공격 방법이 잘 나와 있습니다. ‘너희 모든 군사는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행할 것이요 제 칠일에는 성을 일곱번 돌며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제사장들이 양각나팔을 길게 울려 불어서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작전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즉시 순종했습니다. 제사장들을 불러 작전 지시를 내리되 제사장들과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다수결의 민주주의적 방식으로 처리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리고 성은 나의 어줍잖은 실력으로 무너져 버릴 성이 아니지만 이 전쟁은 반드시 이깁니다. 법궤가 행진의 중심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전쟁은 하나님이 싸우시는 전쟁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명령을 순종하는 백성들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규칙을 철저히 지켜야 했습니다. 수 6:10을 보면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레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찌니라’고 했습니다.
여리고성은 8-9에이커, 그러니까 우리 교회 전체 땅 2배보다 약간 작은 크기입니다. 이스라엘 본진과 여리고성은 2km 정도 거리였다고 하니까 교회에서 언덕 너머 카슨까지 가는 정도의 거리입니다. 이 크기의 여리고 성 둘레를, 이 거리를 이스라엘 200만명이 한바퀴 돌아가려면 얼마나 복잡했겠습니까? 옳은 말 하기도 어렵지만 하고 싶은 말을 입안에 가두는 일은 더 어렵습니다. 200만명이 30분 거리을 걸어 가면서 한 마디씩만 하면 ‘ 와글와글’ 얼마나 정신이 없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저는 아직 경험이 없지만 교회가 무너지는 것은 돈 때문이 아니라고 합니다. 사람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입 때문이라고 합니다.
교회가 비전을 세우는 때까지는 이런 말 저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비전이 정해지면 입은 다물고 비전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들레지 말아야 합니다. 들레면 이 사람 저사람 상처만 받을 뿐입니다. 그러나 외칠 때는 외쳐야 합니다. 살다 보면 낄 데 안 낄데 분별없이 들레다가 막상 외쳐야 될 때는 ‘나, 몰라라’ 뒤로 쑥 빠지는 경우를 봅니다. 외쳐야 될 때와 조용해야 될 때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6:10 후반절은 말합니다.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는 외치라’ 금년에 정해진 교회의 비전을 향해 우리 모두는 조용한 가운데 일심으로 걸어가야 합니다.
일곱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언약궤 앞을 일곱 양각 나팔을 불며 앞서 나갔습니다. 이 광경을 내려다 보고 있던 여리고성 사람들은 얼마나 불안에 안절부절했을까요? 나팔 소리는 하나님의 장엄하신 음성이나 말씀을 상징합니다.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을 때도 나팔 소리를 들었습니다.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계시록을 쓸 때에도 나팔 소리 같은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지막 재림 때에도 우리는 나팔 소리를 먼저 들을 것입니다. 나팔 소리를 듣는 여리고 성 백성들은 기가 죽어 간이 오그라들었을 것이고, 이 나팔 소리를 듣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기가 충천했을 것입니다. 2007년 이 한 해에도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의 나팔소리를 들으면서 험한 세상 속에서 백배 사기 충천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수 6:12에는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니라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궤를 메고’라고 했고, 수6:15에는 ‘제 칠일 새벽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서 여전한 방식으로 성을 일곱번 도니 성을 일곱번 돌기는 그 날 뿐이었더라’고 했습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복을 위해서 철저히 준비를 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무작정 돌진하는 생각없는 장군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어쩌다 한번만 일찍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매일 아침을 일찍 일어난 것입니다. 이 말씀 속에서 여호수아가 얼마나 열심이었고 철저하게 준비하는 사람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평범 속에 비범이 있습니다. 라디오 광고를 듣다보니 ‘산 기도원에 갑시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산 기도원에 갑시다. 픽업 차량은 오전 10시 반, 11시 반, 하루에 두번 xx 마켓 앞에서 출발합니다’ 정말 광고처럼 그 곳에서만 하나님이 살아서 역사하시는지는 둘째 치고, 일년 열두 달 매일 산 기도원만 쫓아 다닐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며칠 다니다가 맙니다. 길어야 몇 달 아닙니까? 우리의 삶의 모든 승리는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여전한 방식으로’ 일곱번 돌 때 이루어집니다. 주님 앞에 가는 그 날까지 오늘이 그 날인가 하는 마음으로 똑같이 살아야 합니다.
2007년 한 해도 지금 앉아 있는 그 자리를 꿋꿋하게 지키십시오. 기도로 지키십시오. 찬송으로 지키십시오. 눈물로 지키십시오. 시종 여일하게, 여전한 방식으로 살면 다른 것 안 해도 될 줄 압니다. 우리가 새벽마다 예배드리는 이 곳이 바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장소인 줄을 믿습니다. 그냥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여전한 방식으로 살면 나의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그 역사가 이루어 지는 제 칠이 올 줄 믿습니다.
‘이에 백성은 외치고…’ 여리고성 함락 기사는 지금 이곳 수 6:20에 딱 한번 나옵니다. 그것은 여리고가 무너진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나가는 과정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떻게, 어떤 과정을 따라 사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날마다의 과정을 보십니다. 신을 벗고 날마다 구별된 거룩한 가치관을 지니고 살고 있는지, 날마다 예배 공동체와 함께 영적으로 무장하고 살고 있는지, 말씀이라는 언약궤를 마음의 중심에 두고 살고 있는지를 보시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여리고는 우리의 섣부른 재주로 무너뜨릴 수 없는 성입니다. 무슨 짓을 해도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함락할 수 없는 성입니다.
13바퀴의 여리고 성을 돌면서 깨달아야 하는 것은 ‘우리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실 때 우리는 한 순간 한 순간을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정해 주신 방법대로 사는것이 최선의 방법인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고백해야 합니다. 이 고백이 성령 충만으로 사는 비결입니다.
2007년 한 해도 성령 충만한 한 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이 정해 주신 방법으로 삶으로 말미암아 승리하는 한해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Monday, February 1, 2010

다 지나갑니다!

교회 친교실 앞을 지나치다 보면 크게 세가지 종류의 나무를 볼 수 있습니다. 올리브 나무와 전나무, 그리고 밤나무와 비슷한 속빈 열매만을 맺는다하여 “너도 밤나무냐?”라는 비아냥을 받았다는 너도 밤나무가 그것입니다.

이 세가지의 나무들이 돌아가면서 일년내 푸른 잎을 내서 싱그러움을 더해줍니다.
그러나 관리하는 입장에서 보면 이 세가지 나무는 여간 성가신 것이 아닙니다. 우선 초봄이 되면 올리브나무는 눈가루 같은 꽃을 피워서 아스팔트위를 지저분하게 하고, 시도 때도 없이 고엽을 떨굽니다. 좀 나아졌다 싶으면 이제는 너도밤나무가 굵은 모래같은 꽃을 피우고 지워서 콘크리트 길 바닥을 지저분하게 만듭니다. 7월이 되면 벌써 이른 올리브 열매, virgin olive를 맺기 시작하여 기름기 많은 열매가 또 다시 아스팔트를 더럽히기 시작하고, 이제 숨좀 돌리나 싶다가 10월이 되면 벌써 가을이 되어 주위의 나무들이 단풍으로 물들기 시작하여 10월 중순에 접어 들면 너도 밤나무가 낙엽을 떨구기 시작합니다. 하늘이 안보일 정도로 많은 잎을 달고 있는 너도 밤나무가 낙엽을 떨궈 또 금년에도‘나를 얼마나 괴롭히랴’는 생각을 해보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시간은 흘러 하늘이 안보일만큼 많던 그 낙엽의 잎새를 거의 다 떨어 뜨리고 난 뒤의 나무가 바로 그림의 너도 밤 나무입니다.



물론 그 중간에 전나무도 홀씨 주머니를 몇 가마나 떨구워 그걸 치우느라 힘겹게 했지요. 그러다 보면 일년이 다 지나 갑니다.
우리네 인생이 다 그렇습니다. 기쁘고 행복한 일들은 별반 기억에 없고, 힘들고 고생같은 일들만 머리에 남아서 순간 순간 우리를 어렵게 만들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 보면 그 괴롭고 고생스럽게 만들었던 일들은 다 지나갔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또 우리는 꿈을 지니고 새 희망가운데 새로운 삶을 계획하며 살 수 있는 것이기도 하구요.

주님의 은혜 가운데 큰 꿈을 꾸며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20/80법칙을 아십니까?

한 연구자가 사회조직을 잘 연구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가 이렇습니다. 어떤 조직이 발전하는 것은 그 구성원 모두가 애써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 전체의 20%에 속하는 구성원들이 애씀으로 발전하더라는 것입니다. 나머지 80%는 언제나 20%의 뒤를 쫓아가는 추종자들이 될 뿐인 것이지요.
그 또 다시 20%의 20%는 더욱 열심을 보이는 리더인 것이고, 그 20%의 80%는 또 20%의 추종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해서 마지막 20%를 남은자(Remnant)로 삼아 하나님 나라일을 확장하는데 사용하십니다.
이제 빛과소금교회 인테넷 싸이트는 새롭게 거듭나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선도하는 리더 그룹의 20%에 속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다만 멀리서 바라보는 80%에 속하시겠습니까?

두손 없는 소금장수

"하나님은 참으로 멋진 분이십니다. 저에겐 비록 두 손은 없지만 그 누구보다도 사랑을 많이 주셨습니다." 두 손이 없는 충서교회의 강경환 권사님이 하신 말입니다.

그는 충남 서산 대산읍 영탑리에서 3만 9600㎡(약 1만 2천평)의 염전을 가꾸는 소금장수입니다. 그는 아무도 모르게 13년 째 해마다 명절이 되면 충남 서산 일대에 사는 독거노인들이 사는 수십 채의 집 앞에 맑은 천일염 30킬로그램 들이 소금부대를 놓고 사라졌습니다. 그러다 지난해에 두 손 없이 혼자서 해 내기에는 너무나 힘들다며 소금트럭을 싣고 읍내 사무소에 맡겼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인 13살 되던 해 그는 해변에서 주운 깡통을 두드리다 번쩍하는 빛과 함께 굉음이 울렸고 그는 정신을 잃었습니다. 전쟁 때 묻어놓은 발목지뢰가 터진 것입니다. 사흘 뒤 깨어난 그는 두 손목 아래가 사라지고 없어지고 만 것을 알았습니다. 남 보기 부끄러웠고 두 손 없이 공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생각한 그는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집안에서만 지냈습니다. 손 없는 그를 위해 어머니가 밥 먹여주고 소변을 뉘어주어야 했습니다. 인생을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혼자 입에 있다가 너무 배가 고파 두 손 없이 수저질하며 밥을 먹었습니다. 그 후 그는 석 달 동안 숟가락질 연습 후에 제 스스로 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지만 그의 인생이 바뀐 건 아니었습니다. 그는 두 차례에 걸쳐 농약을 먹고 자살하려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열일곱 살부터 나가는 주막에서 그는 일하며 괴로움을 잊으려 매일처럼 술을 퍼마셨습니다.

그날도 술에 취해 늦은 밤에 돌아왔습니다. 그의 책상 위에 두 팔과 한 다리가 없는 사람이 교회에서 강의를 한다는 유인물이었습니다. 자신보다 더 못한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알고 싶어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돌아와 그에게 편지했습니다. "나도 당신처럼 잘 살 수 있을까요?" "너도 나처럼 잘 살 수 있다"며 "내가 만약 두 손이 다 있었다면 그 손으로 나쁜 짓을 하고 살았을 것이다. 나는 없는 손 대신에 사랑을 알게 되고 마음의 변화를 받아 새롭게 살게 되었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는 결심하고 오른쪽 손목에 낫을 테이프로 감고 낫질을 하며 아버지 농사일을 도우다 어떤 분의 권유로 염전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농사짓는 삽보다 훨씬 무겁고 큰 삽을 놀리며 정상인만큼 일하기 위해 밤 9시까지 염전에 물을 대고 새벽까지 소금을 퍼야했습니다.

1996년 그는 이제 남을 도우는 것이 손을 잃은 대신에 얻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 믿고“1민원짜리 소금 한 포대를 팔 때만다 1000원을 떼서 모았습니다. 그 보다 다 불행한 사람들에게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열심히 한 보람이 있어 이제 그는 1만2000평의 염전을 소유하고 한해 6000만 원 정도의 소출을 올리고 있습니다. 순수입은 한해에 1800만원이지만 그 중의 10%인 200만원은 꼬박꼬박 남을 위해 쓰고 있습니다.
그는 2001년 시청으로 가서 매달 30만원씩 받을 수 있는 기초생활수급자 신분을 스스로 포기했고 6만원씩 받을 수 있는 장애인 수당도 포기하면서 말했습니다. “이제 나는 살 수 있는 길이 어느 정도 닦아졌으니까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 주라”고 했습니다.

"하나를 주면 그게 두 개가 돼서 돌아오고, 그 두 개를 나누면 그게 네 개가 되어서 또 나눠져요. 연결에 연결, 그게 사는 원리지요.”한 그의 말은 "주라 그러면 받으리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체험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것이니라[눅6:38]


*정충영교수의 칼럼을 옮겨 적습니다

꿈꾸는 자들이 되게 하소서

소망의 하나님, 내 딸들에게 죄에 대하여 ‘아니요’라고 말했던 요셉과 같은 용기를 주옵소서. 대답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타협하지 않고 전진할 수 있는 꾸준함도 주옵소서.
요셉처름 전진하다가 때로 믿었던 이에게 배신을 당하여도 꿈이 있기에 좌절하지 않게 하시고 억울한 누명을 쓴다해도 하나님의 주권을 믿으며 평안을 잃지 않는 넉넉한 가슴을 소유한 내 딸들이 되에 하소서
억울함이 사무쳐 인간들에게 결백을 설명하느라 시간을 허비하기 보다는 요셉처럼 항변의 말을 삼키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하옵소서, 밑바닥의 위치에서도 높은 위치의 사람들에게 빛을 전하는 이가 되게 하소서.
요셉처럼 가장 놀은 곳에 올라가서는 낮은 자를 배려하는 내 딸들이 되게 하시고, 요셉처럼 자신이 누리는 혜택이 자신이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게 하옵소서. 죽음에 임박해서도 민족이 나갈 바를 알리는 거룩한 자로 살게 하옵소서.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구유선과 최귀영이 지은 자녀 축복 기도문중에서 내용을 조금 바꿔 옮겨 적습니다.

믿음은 사랑입니다

주님은 공생애 기간 중 많은 기적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을 위해서는 단 한번의 기적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많은 환자를 고쳐주고 귀신을 몰아내고 심지어는 죽은 사람까지 살리신 주님이셨지만 자신이 직접 기적의 주체가 되었던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기적 가운데 한밤 중 역풍을 만난 풍랑으로 파도가 치는 호수 위를 걸어 오시는 모습은 매우 이례적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물 위를 걸어 오셨습니까? 제자들에게 예수님 자신의 초능력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입니까? 아닙니다. 주님은 풍랑에 시달리고 있는 제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달려 오신것일 뿐입니다. 세벽 네시에 제자들에게 갈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물 위를 걷는 방법 밖에 없었으므로 물 위를 걷는 기적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물 위를 걸으셨던 기적의 힘은 바로 사랑의 힘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물 위를 걷다가 몇 걸음 못가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왜 입니가? 그것은 자신을 뽐내기 위해 예수님의 기적을 흉내냈기 때문입니다. 흉내로는 부족합니다. 그 자체가 삶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기적의 근원은 바로 사랑입니다. 제자들을 위해 물 위를 달려 오시는 주님처럼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합시다.

비전으로 가슴을 뛰게 하라

전 세계에 걸쳐 평균 72시간마다 관광호텔을 하나씩 짓는다는 홀리데이인의 창업자는 케몬스 윌슨(Kemmons Wilson)입니다. 그는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가난으로 학교를 중퇴한 채 극장에서 팝콘을 팔았습니다

그의 사업적인 감각은 어려서부터 남달랐습니다. 팝콘을 팔기 위해 팝콘 기계를 할부로 구입하였고 슬롯머신 다섯 대로 2000달러를 벌기도 했습니다. 집을 구하기 위해 중계업자와 대화를 나누다가 사업성이 있다며 부동산업에 뛰어들어 멤피스에 있는 버려진 땅을 싼값에 구입했는데 그 땅은 3년 후에 100배 이상 상승했습니다.

1951년의 어느 날 그는 가족들과 함께 즐거운 마음으로 워싱턴으로 여행을 떠났지만 형편없는 숙박시설 때문에 전혀 즐겁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묵은 모텔은 불친절하고 지저분했고 식당도 없어서 끼니때마다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식당을 찾아가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그에게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게 만들었습니다. 미국 전역에 어느 한 곳 쓸 만한 숙박시설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후 그의 머릿속에는 워싱턴, 뉴욕, 시카고, LA에 호텔을 짓고 있는 자신의 모습과 자신의 호텔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묵고 나가는 미소 가득한 사람들의 모습을 비전으로 그려 나갔습니다. 누구나 안심하고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는 현대적인 서민용 휴식처를 제공하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사명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한 비전으로 그의 가슴은 뛰기 시작했습니다.

1952년 그는 싼 값으로 구입한 멤피스 교외에 있는 땅에 첫 번째 호텔의 문을 열었습니다. 홀리데이인(Holyday Inn) 1호를 짓고는 16미터 높이의 옥상에 "홀리데이 인(Holiday Inn)"이라는 네온사인 간판을 설치했습니다. 그리고는 관광객들에게 가장 완벽한 시설을 제공함으로써 편안하고 만족스런 서비스를 제공하고 모든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했습니다. 고객을 감동하게 해야 한다는 야심 때문이었습니다.

1959년까지 그는 100개의 호텔을 짓고 직영으로 운영했습니다. 체인 운영방식을 프랜차이즈 시스템으로 전환하자 호텔의 숫자는 급속히 늘어났습니다. 1964년에 500개, 1968년에 1,000개를 돌파하였습니다. 1972년부터는 전 세계에 72시간마다 하나씩 새로운 홀리데이 인 호텔이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그러한 확장추세는 1979년 그가 경영일선에서 물러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는 두 아들에게 홀리데이인의 경영권을 넘겨주었고 그 후 홀리데이인은 여러 기업의 명칭 아래 운영되고 있습니다.

흔히 우리 인생을 나그네 길에 비유합니다. 나그네는 짐이 가벼워야하지만 지친 몸을 누일 쉴 곳이 필요합니다. 케몬스 윌슨은 여행에서 경험한 유쾌하지 못한 기분을 나그네 인생들을 쉬게 하고자 하는 꿈을 홀리데이인 으로 구체화하였습니다. 그가 가진 꿈이 그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였듯 우리의 꿈 또 그렇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기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좇은 자라야 할것이요[딤전 5:10]

*정충영 교수의 칼럼에서 옮겨 적습니다.

자녀들을 위한 기도

우리 마음의 중심을 아시는 주님, 주연이, 정연이 두 딸들이 선한 생각과 마음을 가질 수 있는 복을 허락해 주옵소서. 매사에 긍정적이게 하시고, 항상 푸르른 생각을 지닌 아이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두 아이들의 생각 속에 남을 사랑하는 마음이 넘쳐나게 하옵시고. 사람들에게 주님의 평안의 미소를 짓게 하시며, 하나님이 정하신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삶의 깊이를 더해 주시옵소서. 특별히 순수한 마음만으로도 살 수 있게 하시고, 다른 사람들의 실수를 이해 할 수 있는 너그러운 마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슬플 때든 기쁠 때든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시는 때를 소망하며 늘 기뻐하는 얼굴로 살게 하시옵소서.
자신의 생각에 책임 질 줄 아는 주연이, 정연이 두 딸들이 되게 하시어 선한 생각이 그대로 말과 행동으로 나타나는 깊이 있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믿사옵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자 일어나 가자

간디는 생전에 국가가 망하는 일곱 가지 조건을 말했습니다.
"이럴 때 국가는 희망이 없으며, 멸망의 길로 나아 갈 것입니다. 첫째는 원칙없는 정치이며, 둘째는 도덕 없는 상업이며, 셋째는 노동 없는 부이며, 넷째는 인격 없는 교육이고, 다섯째는 인간성 없는 과학이며, 여섯째는 양심 없는 쾌락이며, 일곱째는 희생 없는 신앙입니다."

간디의 이러한 충고의 말은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의 마음에 비수와 같은 충격을 던집니다. 특별히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한 번쯤 생각해 볼 충고는 바로 '희생없는 신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버리고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십자가가 없는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이 말을 하는 나를 포함하여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 속에서 더 이상 희생의 십자가를 찾는 일이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희생'은 간디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들의 신앙에 반드시 있어야 할 필요 조건입니다.
오늘도 십자가을 지시고 앞장서 가시는 예수님은 믿는 우리들에게 외치십니다.

'자,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요 14:31)

드디어 해 냈습니다

지난 주에 정충영 교수 칼럼을 통하여 772번째의 도전이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그 주의 주일에 인터넷 뉴스를 통해 2종 보통 면허 필기 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보았습니다.
이해를 돕기위해 다시 한번 사정을 보면 이렇습니다.

완주군에 사는 차사순씨는 전주 중앙시장에서 푸성귀를 파는 작은 상인이었습니다. 생업을 위해 운전면허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차씨는 2005년 환갑을 넘긴 나이에 운전 면허 시험에 도전장을 냈습니다. 그러나 번번히 필기 시험 커트라인을 못미치는 점수로 인하여 시엄에 떨어지길 거듭했습니다. 지난주 게시판에 글을 올릴 때가 772번째의 도전이라고 했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772번째의 도전도 꽤 오래 전의 일이었나 봅니다.
그런데 그가 드디어 해냈습니다. 그동안 창피해서 이웃에도 비밀로 했던 그가 결국은 필기 시험에 합격한 것입니다. 무려 949번의 실패 후 950번 만에 합격한 것입니다.

차씨는 "곧 운전학원에 등록해 운행 연습을 하겠는데, 실기시럼은 필기 시험 보다는 훨씬 쉽게 통과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으로 벌써 손안에 쥐어진 운전 면허증을 보고 있었습니다.
7전 8기가 아니라 949전 950기의 역사를 이룬 쾌거였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6:9)

772번째의 도전

전북 완주군에 사는 A모(68) 할머니는 2005년 4월13일 운전면허 필기시험에 처음 도전한 이후 지금(2009년 1월)까지 771차례나 낙방의 고배를 마셨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포기하지 않고 여전히 면허증을 따겠다는 투지를 불사르고 있습니다.

할머니가 세운 이 기록은 운전면허 학과시험 응시에서 국내 최고 기록입니다. 모르긴 하지만 다른 나라의 경우는 이만한 기록이 없을 것으로 생각되어 가히 세계기록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계산해 보면 할머니는 3년 반 동안 주말과 국경일을 빼고는 매일 빠짐없이 시험을 치른 셈이 됩니다.

할머니는 시장에서 야채 좌판을 하다 아파트를 돌며 휴지 등 생필품을 파시는 분으로서 생업을 위해 운전면허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환갑이 넘은 나이에 운전면허 시험에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매일 아침 집을 나와 두 번 시내버스를 갈아타고 전주시 여의동 전북운전면허시험장에 출근하듯 나와 시험을 쳤습니다. 시험성적은 매번 30~50점에 그쳐 2종 보통면허 합격선인 60점을 넘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신청서에 붙인 인지대(1회 6,000원)만 400만 원이 넘게 들어 교통비와 식비 등을 합치게 되면 1,000만 원은 족히 들었을 것이라고 경찰 관계자는 말했습니다.

전북운전면허시험장 관계자는 "손수레를 끌고 장사를 하는 할머니는 면허증 취득이 급할 법도 하지만 요령을 피우지 않고 정석대로 자격증을 따겠다는 의지가 대단하다"며 "시험에 합격하는 날 기념패라도 만들어 전달할 생각"이라고 말했습니다.

정말 대단한 인내력이며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집념입니다. 이 할머니는 머지않아 반드시 합격하고 말 것이라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할머니는 합격할 때까지 시험을 치룰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시험에는 반드시 합격하여 포기하지 않는 도전정신이 성공을 낳는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시고 모두 사람들이 할머니로부터 인내력이 무엇인지 배우게 되기를 바랍니다.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눅 21:19]


*정충영교수의 칼럼에서

광야는 과정입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야곱의 후손들이 광야 길을 걷게 된 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광야는 과정이 됩니다. 자유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할 중간 과정이었습니다.

이 과정은 단순히 공간적, 시간적 차원의 중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 그것은 존재자체가 변화를 겪는 거듭남의 과정입니다. 펜을 바꾼다고 해서 글씨체가 당장 달라지는 것이 아닌 것처럼 야곱의 후손들이 이집트의 노예살이를 그만 두고 이집트를 떠났다고 해서 하루 아침에 대뜸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거듭나기 위해 존재 자체가 거듭나는 자기 정립의 과정을 거쳐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광야가 지닌 적극적인 의미, 거듭남의 과정입니다.

지난 1년동아 우리를 여기까지 걷게 하신 광야의 길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존재 자체의 거듭남을 위해서 계획적으로 걷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또 한번 하나님께 감사할 수 밖에 없습니다.
감사의 계절에 삶의 곳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시길...

왜 그랬을까

한 남자가 새근 새근 잠든 아기의 침대 맡에 서서 흐뭇해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방에 들어선 그의 아내는 남편의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습니다. 남편의 얼굴에서는 신기한 표정, 믿어지지 않는 표정, 탄복의 표정이 고루 묻어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에 깊이 감동을 받은 아내가 남편을 뒤에서 두팔로 살포시 감싸 안으며 젖은 눈,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세요?" 남편은 주저없이 내뱉었습니다. "78불 49센트 가격에 어떻게 이런 침대를 만들 수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아이쿠야!" 아내는 그만 그자리에 주저 앉고 말았습니다.
구유 안의 아기는 안중에도 없이 구유에만 흥분하는 우리들은 아닌지요.....

이런 개 같은 인간만 있다면

이번 주는 유난히 개와 관련된 신문기사가 많은 것 같습니다. 주초에는 한인이 중남미에서 길거리을 나 다니는 개를 잡아다 한국식당에 개고기로 만들어 팔다가 경찰에 구속됐다는 신문기사가 있더니만 주중에는 이락에 파병되었다 돌아 온 군인인 주인을 현관에서 보고 반가워 어쩔줄 모르는 랫시만큼이나 큰 개를 찍은 동영상이 올라와 있었습니다.
오늘 인터넷 신문을 보니 위의 제목과 같은 개이야기가 또 올라와 있었는데 생각할 만한 기사라 생각이 되어져 그대로 퍼다가 옮깁니다.

지난달 ‘세계 최고의 치료견’으로 불리며 미국인의 사랑을 받은 ‘백스터’가 사망했다. 7년 간 샌디에이고의 호스피스 병원에 평안과 사랑을 전파한 백스터는 장애견이다. 차우차우와 래브라도 리트리버 사이의 잡종인 백스터는 주인의 학대로 관절염 등 질병을 앓았다. 두 살 되던 해 안락사에 처해질뻔 하다가 멜리사 조셉 부부가 거두면서 새 삶을 출발했다.
19세로 숨지기까지 불편한 몸을 수레에 의지한 백스터는 죽음을 앞둔 환자 수백명을 보살폈다. 그들의 눈물 젖은 뺨을 핥고, 곁에 몇 시간이고 웅크리고 앉아 있거나 품에 안겼다. 열정적인 눈맞춤(아이 컨택트)으로 환자들에게 용기를 전했다. 이 쯤 되면 ‘영혼의 교감’ 차원이다.
이런 개가 미국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2007년 국내에서도 나온 책 ‘고마워 치로리’의 주인공은 일본 개다.

1992년 비오는 날 쓰레기장에서 새끼 다섯마리와 함께 발견된 유기견 ‘치로리’는 안락사 직전 구조됐다. 이후 13년 동안 치료견으로 활약하며 수많은 환자들을 돌봤다. 말을 잃은 노인의 입을 다시 열었다. 전신마비 환자가 치로리 덕분에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의술이라는 과학 위에 개와 인간의 정이 있었다.
치로리는 혈통 파악조차 어려운 잡종 중의 잡종이었다. 한 귀는 서고 다른 귀는 접혔다. 특히 다리가 볼품 없었다. 학대 후유증으로 뛸 수도 똑바로 앉을 수도 없는 짧은 다리였다. 치로리는 새끼를 모두 잃었다. 가해자는 인간들이었다. 치로리는 2006년 3월 암으로 죽었다. 사회에 사랑만 남기고 갔다.
이 시간에도 숱한 백스터와 치로리들이 이렇게 헌신하고 있다. 눈길만 돌리면 쉽게 목격할 수 있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들이다. 포한이나 앙갚음이라는 단어는 모르는 ‘짐승’들이다.
이런 개들은 대개 사람처럼 웃는 법을 안다. 눈을 실눈으로 만들고 입가 근육을 올려 미소를 만든다. 상처 받고 마음을 닫은 이들을 보듬고 녹여내는 웃음이다.
고통은 종종 삶을 침식시킨다. 하지만 쓰임에 따라 더 큰 일을 위한 과정이 된다. 고난을 겪음으로써 아집에서 벗어나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줄 알게된다. 세파를 통해 마음의 힘을 단련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성숙을 얻는 자는 생각보다 드물다. 분노와 원망으로 세상을 저주하며 거듭해 침몰하기 일쑤다.
‘개만도 못하다’는 말은 욕설이다. 아직까지는 그렇다.

지상의 포도밭, 하늘나라의 포도밭

굶주림과 과로 때문에 아이를 사산한 딸을 부축하고 엄마는 오막살이로 비를 피해 들어갑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자신들보다 더 비참한 소년과 그의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소년의 아버지는 훔쳐온 빵조차 목구명에 넘기지 못할 만큼 지쳐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을 다 밖으로 내 보내고 딸은 배고품에 죽어가는 소년의 아버지에게 자신의 젖을 물려 주는것이 죤 스타인벡이 쓴 소설 '분노의 포도'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지상의 포도밭은 먼저 온사람들이 더 많이 차지함으로써 나중 온 사람들을 멸시하고 착취합니다. 먼저 온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이용하여 기득권을 버리지 않으려 하고, 늦게 온 사람들은 더 각박해진 포도밭의 사정 때문에 좀처럼 가난과 질병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발만 동동 구릅니다. 다만 스타인벡의 소설처럼 '분노의 포도"만이 주렁 주렁 열릴 뿐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 포도밭에는 먼저 온 사람도 나중 온 사람도 차이가 없습니다. 하늘나라 포도밭은 나중 온 사람이 오히려 첫째가 될 수 있는 포도밭입니다. 그래서 하늘나라 포도밭은 '분노의 포도'가 아닌 '사랑과 평화의 포도'가 주렁 주렁 열리게 됩니다.
이제 사랑의 계절이 다가 옵니다. 우선 나부터 그리고 빛과 소금교회가 사랑을 나누는 일에 앞정설 수 있는 축복이 있으면 합니다.

그냥 늙지 맙시다

삼구개발의 CEO 구자관(65)씨는 직원 8000명에 2008년 매출 1400억 원을 올린 대기업의 사장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양계공장, 고무공장 등등 손을 댄 사업마다 실패했습니다. 구자관의 7남매는 외갓집으로, 고모 집으로 뿔뿔이 흩어져 살았습니다.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월사금을 제때 못낸 탓에 졸업장도 받지 못했고 남이 중학교 입학하던 날 아이스케이크 통을 메어야 했습니다.

그는 새벽부터 낮 동안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학교를 다녔습니다. 공장 사장은 학교 가려고 새벽같이 출근한 어린 소년을 “네까짓 게 공부?”하며 뺨따귀를 올려붙이곤 했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공부를 했습니다. 학비 낼 돈도 없는 그는 동대문에서 미아리 집까지 걸어 다니며 버스비를 모아야 한 권의 책을 살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밤12시에 돌아와 쓰러져 자는 아들을 어머니는 새벽 4시30분이면 어김없이 깨웠다. 공장가라고, 가서 얼른 일해서 돈 벌라고.

그는 젊은 날 공장에서 일하다가 전기톱에 양쪽 손가락이 절반쯤 잘려나가고, 공장을 뒤덮은 화마에 손은 물론 온몸을 덕지덕지 이식해야했습니다.
그가 군에서 돌아와 청소용 왁스 공장을 차려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가 되었지만 8년 만에 공장에 불이 났습니다. 화상으로 엉망진창이 된 그는 죽기로 하고 자동차를 몰고 잠수교 뛰어들었지만 운전 미숙으로 잠수교의 교각을 들이받아 죽지도 못했습니다.

미국에 이민갔던 형이 청소용품만 팔지 말고 미국 한인들처럼 청소를 대행해보라 권유했습니다. 그리하여 1976년 직원 2명으로 청소대행업을 시작했고 33년 의 세월이 흐른 지금 그의 사업체는 직원 8,000명에 연 매출 2,000억 원을 넘보는 중견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삼구개발은 다른 건물, 다른 회사의 청소 및 관리를 대행하며 경비보안, 환경과 시설관리도 합니다. 2009년 현재 200 여 개 사에 총 500여 개 사업장을 용역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 회사에서는 청소하는 사람들은 모두 ‘아줌마’와 ‘아저씨’로 통칭되지만 사장인 그는 아줌마 대신 ‘여사님’이라고 부릅니다. “생각해보라, 집에서 남편과 자녀들 뒷바라지를 다 해놓고 일터에 가서 남들 하기 싫은 궂은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존경받아야 할 여사님이지 왜 아줌마인가.”
그는 25년 근속한 직원을 사장으로 승진시키고 스스로 '대표사원'이라 명함을 찍고는 “회사는 직원들 것이다. 회사에 사장이 있으면 됐지 무슨 회장인가. 나는 이 회사를 위해 일하는 사원 가운데 대표일 뿐”이라 말합니다.

그는 56세의 나이에 스키를 배웠고 61세의 나이에 용인대 경찰행정학과에 입학했습니다. 그리고 64세의 나이에 오토바이를 배워 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늦었어’했으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나. 이것이 내 65년 인생의 핵심이다"고 말했습니다.
구자관 씨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남이 3D라 하며 기피할 때 그는 기쁨으로 그 일에 뛰어들었다는 것입니다. 구자관 씨가 성공한 것은 어려서부터 당한 고난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좌절하지 않고 일어서며 어떠한 일이라도 감당하겠다는 굳은 의지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그러한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여 세우십니다.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 [사 48:10]


*정충영 교수의 칼럼을 제목만 바꾸어 올립니다.

춘향에게서 배우는 믿음의 전형

자신의 직업을 통해서 세상을 보거나 믿음의 세상을 바라 볼 때 또다른 감각이 드러나곤 합니다.
작가 최인호가 문인의 취향을 통해서 믿음을 향한 메시지를 발견하고 있는데 그럴사함으로 요약해 올립니다.
춘향전과 심청전은 우리 문학이 낳은 대표적인 고전 구전 문학인데 그 중에서 춘향전을 우리 민죽이 창조한 사랑의 송가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열처녀 비유와 연결짓고 메시지를 던져 주고 있습니다.
남원 부사의 아들 이몽룡과 월매의 딸 춘향이 광한루에서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는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과거시험을 보고자 한양으로 길떠나는 몽룡도련님, 그 사이 새로 부임한 탐관오리 변사또와 그가 괴롭히는 춘양사이에 벌어지는 이야기, 그리고 금의 환향하는 이도령과 극적인 사랑의 열매를 맺는 이야기가 춘향전의 간략한 줄거리입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25장에서 열처녀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결론으로'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춘향은 바로 슬기로운 처녀였습니다. 춘향은 언제 올지도 모르는 사랑하는 신랑을 기다리면 항상 깨어 있었습니다. 탐관오리 변사또의 그 집요한 유혹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은 정결로 자신의 믿음을 지켰으며,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이 그 오랜 세월 끝에 거렁뱅이 모습으로 찾아왔지만 춘향 자신의 사람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슬기로운 처녀가 신랑으로 찾아 오신 주님과 혼인잔치에 들어가 마침내 행복한 신방을 꾸미듯 춘향이가 이도령의 정실 부인이 되어 백년해로하는 해피엔딩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작가 최인호는 춘향전의 춘향이는 우리에게 믿음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이 지상으로 오신 주님의 초라한 행색에 실망하여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미련한 처녀들인 백성입니다.
이제 곧 다가 올 성탄절을 생각하면서 또 이제 곧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을 생각하면서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니라'고 하신 주님의 지적의 말씀을 다시한번 생각해 봅니다.

사람들이란 참으로 묘한 심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 멀리 떨어져 있으면 고독해 하다가도 너무 가까이 다가온다 싶으면 지레 경계심을 품고 불편해 하는 것이 사람들의 심리입니다.

어차피 사회적 동물인 인간들은 더불어 살 수 밖에 없고, 특히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공동체의 일원으로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일진대 우리들은 얼마나 가까이 있어야 외롭지 않고 또 얼마나 떨어져 있어야 불편해 하지도 않으며 살 수 있을 까요?

비가 추적 추적 내리는 늦은 오전, 높은 전깃줄 위에 앉은 몇마리의 새들의 모습을 보면서 깨달았습니다. 서로 날갯짓을 해도 부대 끼지 않을 만큼 가깝고도 먼거리, 동시에 멀고도 가까운 거리가 서로를 평온케 해주는 심리적 거리가 아닐까합니다.

당신과 나 사이에는 과연 얼마나 멀고도 가까운 거리가 서로를 평온케 해주는 거리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