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February 24, 2010

꼴찌들에게 보내는 위로(히12:1-3)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목청껏 소리를 지르고 손뼉을 치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삽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우리에게는 좀처럼 이런 갈망을 풀 기회가 사라졌습니다. 환호가 아니라도 좋으니 속이 후련하게 박장대소라도 할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그럴만한 기회도 없습니다. 그저 하루하루를 덤덤하게 살아 넘길 뿐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의례적안 미소아니면 조소,냉소, 고소가 고작입니다. 나를 포함하여 이런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보노라면 얼굴 모양까지 얄궂게 변해 버릴 것 같은 걱정마저 들게 됩니다.
속 시원히 사람의 마음을 풀수 있는 기회는 뭐니뭐니해도 잘 싸우는 운동경기를 볼 때가 아닌가 합니다. 그런 점에서 지난 3월에 있었던 한국야구나 김연아 선수는 그 역할을 톡톡히 해낸 효자요 효녀였습니다.

흔히들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합니다. 그리고 운동경기 중에서 마라톤 만큼 우리들의 환호와 갈채를 받는 경기도 없습니다. 순간의 짜릿한 승부에 묘미가 있다는 100미터 단거리 우승자에게는 감탄을 하면서도 보다 긴 호흡의 승부인 마라톤 우승자에게서는 감동을 느낍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숨이 멎는 듯한 무서운 고통의 시간과 길고 긴 고독이라는 터널을 통과하는 인간 한계를 극복한 그 노력에 후한 점수를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의 여정을 마라톤과 같다고 할 때 우리 믿음의 여정을 또한 마라톤에 비유해도 하나도 지나칠 것이 없습니다. 오늘 히브리서 기자는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 갑시다’라고 평범하지만 가시 돋친 격려를 하고 있습니다.
또한 힘겨운 믿음의 길이지만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구름처럼 우리를 둘러 싸고 있으니’ 우리도 믿음의 선배들을 본받아 믿음의 길을 달려 마침내는 후대 사람들에게 믿음의 증인으로 본이 되자’고 굳센 각오와 결의를 요구하고 있으며, ‘우리 믿음의 근원이 되시며 완성자가 되시는 예수’를 닮아 ‘우리를 얽어 매는 온갖 무거운 짐과 죄를 벗어버리고’ 끝내는 믿음이라는 신앙 마라톤의 결승점에 도달하자고 매섭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히브리서 기자의 권면을 볼 때 우리가 달려가야 할 믿음이라는 신앙 마라톤의 여정은 설익은 낭만의 길이 아니라 오히려 뼈와 살을 깎는 진지한 장거리 경주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신앙의 마라톤 여정을 달리는 나로 하여금 자꾸만 발목을 무겁게 하여 그 자리에 주저 앉히려는 방해가 끼어 듭니다. 그것은 먼저 내가 얼마나 먼 길을 달려 왔으며, 또 앞으로 얼마나 먼 길을 달려가야 할 것인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나를 더욱 무겁게 하는 것은 도대체 나는 몇 등으로나 이 길고 긴 뜀박질의 길을 달려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마라톤은 아무리 힘들어도 42.195km만 달리면 됩니다. 그런데 인생 마라톤, 신앙 마라톤은 얼마나 먼 길을 달려야 하는 길인지?, 그리고 나는 얼마나 먼 길을 달려 왔으며, 또 얼마나 먼 나머지 길을 달려가야 할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달려 온 길은 이미 다 잊혀졌고, 그대신 앞길에 숨막히게 할 언덕이 몇 개나 남아 있을런지, 맞바람을 받으며 달려가야 할 내리막 길은 또 얼마나 더 있을런지 도대체 알 수가 없고, 그 생각만 하면 숨이 턱턱 막힙니다. 그래서 요즘처럼 산다는 것이 견디기 어려울 만큼 정말 너무 너무 힘이 들 때에는 어서 빨리 이 땅의 삶을 정리하고 저 곳의 삶터로 옮겨 가는 것이 더 현명할 것이라는 불신앙적인 생각을 아주 가끔은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재 보고, 저렇게 재 보아도 내가 선두그룹을 달리는 마라톤 주자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내가 어느 그룹을 달리는지를 알아야 힘을 더 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알게 아닙니까? 내가 제대로 뛰고 있는지 어떤지를 알 것이 아닙니까?그런데 도무지 알 재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심란해지고, 그래서 자꾸만 그 자리에 주저 앉고 싶어 집니다. 아를 어찌해야 합니까?

그러나 우리가 자꾸만 그 자리에 주저 앉고 싶은 충동을 떨쳐 내기 위해서는 42.195Km를 내어 달려야 하는 육상 마라톤과 신앙 마라톤과의 차이를 깨달아야 합니다.
먼저 신앙마라톤의 길은 쪽 대본을 들고 달리는 경주라는 사실입니다. 신앙 마라톤의 여정은 쪽 대본을 들고 연기하며 뛰는 마라톤의 길입니다. 육상마라톤은 이미 눈으로 확인 해 본 정해 진 길을 달려가는 경주이지만 신앙 마라톤의 길은 극을 전개해 가면서 작가가 계속 대본을 쓰는 쪽 대본에 따라 연기하며 달리는 마라톤 경기입니다. 설사 내 인생 여정, 내 신앙 여정을 위한 한편의 대본이 모두 완성되어 있다고 해도 절대로 그 대본은 한번에 내 손에 주어 지지 않는 법입니다. 그저 매일, 매회 주어지는 쪽 대본을 들고 연기하며 달릴 뿐입니다. 장래 일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물안하게 사는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는 경우 장래 일을 모른다는 것만큼 오히려 감사한 일은 없습니다. 내일 일을 알지 못하고, 우리가 죽을 날을 알지 못하고 살 수 있다는 것은 감사할 일입니다.
성경을 보면 쪽 대본을 받아 들고 달려간 믿음의 선배, 신앙의 선배들로 가득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이 바로 그런 사람들을 가득 담은 믿음의 장입니다. 아브라함도 쪽 대본을 받아 들고 달려간 믿음의 대표적인 증인입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쪽 대본을 들고 바로 그 곳 까지 달려 갔습니다.’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는 쪽 대본을 들고 곧장 모리아 땅 까지 내어 달렸습니다. 그 다음에는 또 어떤 길이 펼쳐 질지도 모른채 어떤 장면이 펼쳐 질지도 모른채 주신 쪽 대본을 들고 지시하는 곳 까지 연기하며 달려 간 것입니다.
지금 달려 가는 앞 길이 아무리 궁금해도 내 손에 들려진 쪽 대본에 따라 연기하며 달려가면 됩니다. 그러면 내일 이면 또다른 쪽 대본을 주실 것이고. 그 쪽 대본에 따라 연기하며 하루하루를 충실히 이어 달려가면 언젠가는 골인 지점에 영광스럽게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을 것은 이 쪽 대본들이 모두 모여 한편의 완결된 대본을 만들것이로되 이 모든 것은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을 이루어 가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둘째로. 신앙 마라톤은 남보다 먼저 달리는 경주가 아이라 모두가 함께 달리는 경기입니다. 육상 마라톤은 신기록 달성과 일등에 대한 집착으로 달리는 경주입니다. 육상 마라톤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예외가 없는 규칙에 따라 달리는 경기입니다. 이에 비해 신앙 마라톤은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더욱 엄중한 공의의 규칙으로 달리지만 이와 더불어 무한한 사랑의 규칙이 동시에 적용되는 경기입니다. 여기에다 신앙 마라톤은 처음부터 끝까지 실수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단숨에 잘 달릴 수 있는 선수는 아무도 없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경기입니다. 다만 골인 지점을 향해 달리며 ‘내 힘으로 가능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창조주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하나님을 더욱 의뢰해야 함을 배우고, 깨달으며 달리는 경주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마라톤에서는 등수에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천로역정에서 보는 것처럼 중간에 코스를 이탈했어도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경주이고, 더 이상 못가겠다고 아예 주저 앉는 사람들 모두를 축하와 격려로 손잡고 함께 달리는 일종의 이색 마라톤 경주인것입니다.
그래서 감탄보다는 감동이 넘칩니다. 왜냐하면 100m 경주 에서처럼 감탄은 탁월함에 대한 감정 표현이지만 감동은 훌륭함에 대한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신앙 마라톤은 신기록 수립이나 월계관을 쓰는 일등을 목표로 삼는 경쟁 마라톤이 아니라 예수가 주신 새계명(요13:34)’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사랑하라’는 명령을 목표로 삼는 동거 동락의 마라톤이기 때문에 경쟁 의식도 필요없고, 늦게 출발했거나 도중에 넘어지거나 하여 소비한 시간 때문에 피해 의식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신앙 마라톤이 가진 이런 특징들은 마라톤 주자인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그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는 우리가 누구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꼴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는 교육과 부와 사회적 지위와 업적이 어떠하건 우리는 모두 다 죽은 인생들이었습니다. 모태 신앙인이건 저 처럼 인생 40대 후반에 예수를 믿게 된 늦깍이건 우리 모두는 은혜시대 끝자락을 다행히 놓치지 않고 신앙의 마라톤을 함께 뛸 수 있는 주자가 된 은혜입은 꼴찌들임을 감사할 뿐입니다. 그리고 또한 감사한 일은 육상마라톤처럼 아직 가지 않은 미지의 골인 지점을 향해 뛰는 마라톤 경주가 아니라 영적으로는 이미 도착해 있는 그 골인 지점을 향해 뛰는 마라톤 경주라는 점에서 더욱 감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마음에 품은 것은 이미 이룬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5:4) 우리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이미 옮겨진 그 곳을 향해 뛰어 달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소망으로 달릴 수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모두 신앙 마라톤 경주의 꼴찌 주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실망하지 않고 소망으로 달릴 수 있습니다. 우리를 둘러 싼 허다한 증인들이 우리를 응원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앞서 가셔서 모든 것을 다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앞에서 친히 바람막이가 되어 주시고, 우리 꼴찌들 바로 옆에서 ‘으쌰, 으쌰’를 외쳐 주십니다. 우리 꼴지들이여, 우리는 다만 영광스런 골인 지점을 향해 하루 하루를 열심히 달려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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