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가 만나는 고통과 고난에는 뜻이 있고, 우리가 눈을 돌려야 할 대상은 고난 그 자체가 아니라 고난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이며, 하나님의 그 손길의 의미를 깨달으면 고난은 오히려 생명의 양식 이라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의 삶에서 고난을 피하고 싶은 것이 우리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오늘은 고난 가운데에 있는 두 사람을 묵상하는 가운데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 속담을 심리학적 용어로 좀 고상하게 풀면 이렇습니다. 자라보고 놀란 사람은 자라만 보면 본능적으로 피하게 되는데 이를 ‘회피’라고 합니다. 그런데 자라 때문에 몇 번 놀라고 나면 이번에는 자라 등 껍질 같은 솥뚜껑만 봐도 ‘이크’하고 놀라 뒤로 꽁무니를 빼는데 이번에는 이를 ‘도피’라고 부릅니다.
‘회피’와 ‘도피’는 우리의 삶 속에서 심리적으로 거부감을 일으키는 사상을 피하려는 심리적 방어 기제이고, 삶의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삶에서 회피반응과 도피반응을 보이는 것은 지극히 정상입니다. 그리고 삶의 무게가 무거울수록 회피반응과 도피반응의 정도는 더욱 커지는 법인데 오늘의 주인공 가운데 하나인 엘리야가 바로 그랬습니다. 구약성경 가운데 모세와 함께 가장 중요한 사람이 바로 엘리야였습니다. 엘리야는 선지자의 대표인 동시에 신앙의 영웅인데 그 엘리야가 오늘 로뎀나무 아래에 주저앉아 하나님께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독백하는 가운데 전형적인 도피행동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왕상19:3-4)
왜 엘리야가 이렇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바른 신앙에서 잠시 벗어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3년 동안 삶의 거처를 네번씩이나 옮기면서 쉼 없이 기아, 왕, 거짓선지자들과 싸우며 바쁜 삶을 살았던 엘리야가 일순간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 이유가 바로 말씀과 기도로부터 상실되었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왕상 19장 이전 까지 엘리야의 삶을 살펴 보면 그곳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과 인도하심이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그랄시냇가로 가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갔고, 말씀에 따라 사르밧으로 떠났습니다. 또 말씀에 순종하여 아합 왕에게 우상 숭배를 경고하고 심판이 있을 것을 말했습니다. 이처럼 엘리야는 말씀과 기도의 인도에 따라 장소를 옮겨 가고 있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19장에 들어 와서는 그만 지금까지의 패턴이 깨져 버립니다. 아합왕의 아내 이세벨의 오뉴월 서릿발 같은 협박에 기가 질렸던 엘리야가 이세벨의 두말 안쪽에 도망하여 광야로 들어 갔을 때 그곳에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당당하게 맞섰던 엘리야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리고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라고 넋두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와 나와의 거리가 하나님과의 거리입니다. 내가 말씀에서, 기도에서 멀어지는 거리만큼 하나님과 나와의 거리가 멀어지는 것이고 그 결과는 누구든 엘리야와 같은 존재로 전락할 수 있게 되며, 그래서 이러한 증상을 우리는 엘리야 신드롬이라 부릅니다.
오늘의 또 하나의 주인공이 히스기야입니다. 유다 11대왕으로 사악하기로 유명했던 아버지 아하스와는 달리 어머니 아비야의 영향을 받은 히스기야는 선대의 모든 사악한 영양을 물리치는 가운데 올바른 행동으로 나라를 다스리게 됩니다. 이 히스기야를 통해서 우리는 고난에 처했던 그가 어떻게 그 고난으로부터 헤어 나 올 수 있었는지 귀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먼저 그는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하자 목숨을 걸고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이끌어 낸 사람입니다. 성전 정결 작업을 시작으로 통치를 시작한 히스기야였습니다. 외세에 대한 치세가 무엇보다 급하다고 생각했던 히스기야는 선지자 이사야의 만류와 미가 선지자의 꾸짖음에도 불구하고 인접한 애굽, 블레셋, 시돈, 에돔, 모압, 압몬 등의 이방과 동맹을 맺어 자신이 맹주가 되어 강국 앗수르의 산헤립에 대항하려는 눈부신 활약을 시도하였으나 산헤립은 거꾸로 히스기야 연합군을 대파시키고 막대한 배상을 요구하고, 더 나아가 예루살렘마저 내 놓으라는 위협으로 인하여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처하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우리를 그 손에서 구원하옵소서 그리하시면 천하만국이 주 여호와는 홀로 하나님이신줄 알리이다”(왕하19:19) 히스기야의 간절한 기도는 이사야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알게 하십니다.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앗수르 왕 산헤립 까닭에 내게 기도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왕하19:20) 하나님께서는 사자를 보내심으로 앗수르의 진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을 치심으로 한 밤에 죽게 하셨고 (왕하19:35), 산헤립은 또한 자기가 낳은 자식들의 손에 죽게 하셨습니다. 이로써 히스기야의 기도는 국가 공동체를 기도로 구해내는 전형이 되었습니다.
기도로 국가를 존망의 위기로부터 구했던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부르짖음으로 개인의 난제를 해결하고 응답을 얻어 낸 개인기도의 전형을 다시 한번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히스기야가 병들어 목숨이 경각에 이르게 되자 다시 한번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함으로 15년간의 생명 연장을 허락받은 기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 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의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심히 통곡하더라”. 이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다시 이사야를 통해서 병을 낫게 할 처방을 알려 주셨고, 히스기야가 병이 나을 징조가 무엇인가를 물었을 때 선지자 이사야가 하나님께 간구하므로 일영표 위에 나아갔던 해를 뒤로 십도 물러가게 하는 징표를 보여 주셨다는 그 유명한 히스기야의 기도를 우리는 잘 압니다.
히스기야의 생명 연장을 가능케 했던 히스기야의 기도에는 몇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생명 연장을 위해서 하나님께만 간구했던 기도였습니다. 히스기야는 왕으로서 세상의 모든 부와 권력과 영광을 지닌 존재였음에도 자신의 죽을 병을 고침 받기 위해 오로지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간구의 기도를 했습니다. 둘째로 히스기야는 성전을 향해 기도했습니다. 일어 날 기력조차 없을 때에도 성전이 있는 벽 쪽을 향하여 얼굴을 돌려 기도했습니다. 비록 눈 앞에는 벽이 가로 막혀 있지만 그 벽 너머에는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있고, 그 곳에 계신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드리는 기도였습니다. 셋째로 병으로 목숨이 경각에 달리자 히스기야는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낮아져 어린아이와 같이 작은 자가 되었고, 왕의 체면에도 관계없이 하나님께 매달리는 통곡의 기도를 하였습니다. 히스기야의 눈물의 기도는 그의 간절한 심정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도한 히스기야는 목숨이 경각에 달렸던 병으로부터 회복되어 15년을 더 살 수 있는 회복의 허락을 받았던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히스기야의 기도 방식을 놓고 어떻게건 하나님에게 떼를 써서 커다란 선물 보따리를 받으려는 기도, 사람인 주제에 감히 하늘을 움직여 보겠다는 언감 생심의 기도라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모세 다음가는 신앙의 영웅, 선지자의 대표였던 엘리야가 말씀과 기도로부터 멀어지자 곧장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보았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함으로 나라를 구하고 자신의 생명을 연장 받는 히스기야의 모습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성경이 교훈하는 바를 그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히스기야의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전문성을 굳게 믿는 믿음에서 행한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히스기야의 기도는 하나님께 불경한 기도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택하신 백성을 하나님께서는 버리지 않으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무너져 내린 엘리야에게 두 번씩이나 천사를 보내 떡을 구어 먹이시고, 마른 목을 축이게 하시고, 세미한 음성으로 찾아 주심으로 쓰러진 엘리야를 다시 세우신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새해에 ‘신이 외면한 나라’라는 오명을 들어야 했던 중남미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 먹일 것이 없어 아이들에게 진흙으로 만든 과자를 먹여야 했던 부패와 정정불안, 연이은 자연재해의 피해국 아이티를 강타한 진도 7.0의 지진은 새해를 살기 시작한 우리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 줍니다. 우리가 붙들 것은 무엇입니까? 사람입니까? 명예입니까? 아니면 재산입니까? 이생의 자랑도 아니고, 안목의 정욕도 아닙니다.
그 대신 히스기야가 믿었던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동시에 말씀에 의지하여 간구로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당당히 요구하는 큰 믿음으로 오늘 내가 처한 고난을 극복해 나가는 것이 새해의 첫달을 마무리 하면서 우리가 붙들어야 할 유일한 살 길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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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주님, 오늘도 하루를 허락하시니 감사합니다. 홍해를 건널 때는 하나님께서 직접 홍해를 가르시고 백성들이 건너게 하시고, 요단강을 건널 때는 사람이 스스로 강물에 발을 내어 디딜 때 강물이 갈라지게 하신 것처럼, 강권적으로 믿고 구원받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로 하여금 일상에서 스스로 하나님 편에 설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잊은 삶을 살 것인가를 선택하게 하십니다.
원하고 바라옵기는 이생의 환난이 아무리 커도 주안에서 벗어나는 삶을 살지 않게 하시고, 금년 한해의 고난이 아무리 커도 줄기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떨어진 가지가 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도 이 시간을 마치면 모두 일상의 삶으로 돌아 갑니다. 승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믿사옵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아멘…
오늘은 고난 가운데에 있는 두 사람을 묵상하는 가운데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 속담을 심리학적 용어로 좀 고상하게 풀면 이렇습니다. 자라보고 놀란 사람은 자라만 보면 본능적으로 피하게 되는데 이를 ‘회피’라고 합니다. 그런데 자라 때문에 몇 번 놀라고 나면 이번에는 자라 등 껍질 같은 솥뚜껑만 봐도 ‘이크’하고 놀라 뒤로 꽁무니를 빼는데 이번에는 이를 ‘도피’라고 부릅니다.
‘회피’와 ‘도피’는 우리의 삶 속에서 심리적으로 거부감을 일으키는 사상을 피하려는 심리적 방어 기제이고, 삶의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삶에서 회피반응과 도피반응을 보이는 것은 지극히 정상입니다. 그리고 삶의 무게가 무거울수록 회피반응과 도피반응의 정도는 더욱 커지는 법인데 오늘의 주인공 가운데 하나인 엘리야가 바로 그랬습니다. 구약성경 가운데 모세와 함께 가장 중요한 사람이 바로 엘리야였습니다. 엘리야는 선지자의 대표인 동시에 신앙의 영웅인데 그 엘리야가 오늘 로뎀나무 아래에 주저앉아 하나님께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독백하는 가운데 전형적인 도피행동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왕상19:3-4)
왜 엘리야가 이렇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바른 신앙에서 잠시 벗어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3년 동안 삶의 거처를 네번씩이나 옮기면서 쉼 없이 기아, 왕, 거짓선지자들과 싸우며 바쁜 삶을 살았던 엘리야가 일순간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 이유가 바로 말씀과 기도로부터 상실되었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왕상 19장 이전 까지 엘리야의 삶을 살펴 보면 그곳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과 인도하심이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그랄시냇가로 가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갔고, 말씀에 따라 사르밧으로 떠났습니다. 또 말씀에 순종하여 아합 왕에게 우상 숭배를 경고하고 심판이 있을 것을 말했습니다. 이처럼 엘리야는 말씀과 기도의 인도에 따라 장소를 옮겨 가고 있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19장에 들어 와서는 그만 지금까지의 패턴이 깨져 버립니다. 아합왕의 아내 이세벨의 오뉴월 서릿발 같은 협박에 기가 질렸던 엘리야가 이세벨의 두말 안쪽에 도망하여 광야로 들어 갔을 때 그곳에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당당하게 맞섰던 엘리야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리고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라고 넋두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와 나와의 거리가 하나님과의 거리입니다. 내가 말씀에서, 기도에서 멀어지는 거리만큼 하나님과 나와의 거리가 멀어지는 것이고 그 결과는 누구든 엘리야와 같은 존재로 전락할 수 있게 되며, 그래서 이러한 증상을 우리는 엘리야 신드롬이라 부릅니다.
오늘의 또 하나의 주인공이 히스기야입니다. 유다 11대왕으로 사악하기로 유명했던 아버지 아하스와는 달리 어머니 아비야의 영향을 받은 히스기야는 선대의 모든 사악한 영양을 물리치는 가운데 올바른 행동으로 나라를 다스리게 됩니다. 이 히스기야를 통해서 우리는 고난에 처했던 그가 어떻게 그 고난으로부터 헤어 나 올 수 있었는지 귀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먼저 그는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하자 목숨을 걸고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이끌어 낸 사람입니다. 성전 정결 작업을 시작으로 통치를 시작한 히스기야였습니다. 외세에 대한 치세가 무엇보다 급하다고 생각했던 히스기야는 선지자 이사야의 만류와 미가 선지자의 꾸짖음에도 불구하고 인접한 애굽, 블레셋, 시돈, 에돔, 모압, 압몬 등의 이방과 동맹을 맺어 자신이 맹주가 되어 강국 앗수르의 산헤립에 대항하려는 눈부신 활약을 시도하였으나 산헤립은 거꾸로 히스기야 연합군을 대파시키고 막대한 배상을 요구하고, 더 나아가 예루살렘마저 내 놓으라는 위협으로 인하여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처하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우리를 그 손에서 구원하옵소서 그리하시면 천하만국이 주 여호와는 홀로 하나님이신줄 알리이다”(왕하19:19) 히스기야의 간절한 기도는 이사야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알게 하십니다.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앗수르 왕 산헤립 까닭에 내게 기도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왕하19:20) 하나님께서는 사자를 보내심으로 앗수르의 진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을 치심으로 한 밤에 죽게 하셨고 (왕하19:35), 산헤립은 또한 자기가 낳은 자식들의 손에 죽게 하셨습니다. 이로써 히스기야의 기도는 국가 공동체를 기도로 구해내는 전형이 되었습니다.
기도로 국가를 존망의 위기로부터 구했던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부르짖음으로 개인의 난제를 해결하고 응답을 얻어 낸 개인기도의 전형을 다시 한번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히스기야가 병들어 목숨이 경각에 이르게 되자 다시 한번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함으로 15년간의 생명 연장을 허락받은 기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 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의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심히 통곡하더라”. 이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다시 이사야를 통해서 병을 낫게 할 처방을 알려 주셨고, 히스기야가 병이 나을 징조가 무엇인가를 물었을 때 선지자 이사야가 하나님께 간구하므로 일영표 위에 나아갔던 해를 뒤로 십도 물러가게 하는 징표를 보여 주셨다는 그 유명한 히스기야의 기도를 우리는 잘 압니다.
히스기야의 생명 연장을 가능케 했던 히스기야의 기도에는 몇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생명 연장을 위해서 하나님께만 간구했던 기도였습니다. 히스기야는 왕으로서 세상의 모든 부와 권력과 영광을 지닌 존재였음에도 자신의 죽을 병을 고침 받기 위해 오로지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간구의 기도를 했습니다. 둘째로 히스기야는 성전을 향해 기도했습니다. 일어 날 기력조차 없을 때에도 성전이 있는 벽 쪽을 향하여 얼굴을 돌려 기도했습니다. 비록 눈 앞에는 벽이 가로 막혀 있지만 그 벽 너머에는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있고, 그 곳에 계신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드리는 기도였습니다. 셋째로 병으로 목숨이 경각에 달리자 히스기야는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낮아져 어린아이와 같이 작은 자가 되었고, 왕의 체면에도 관계없이 하나님께 매달리는 통곡의 기도를 하였습니다. 히스기야의 눈물의 기도는 그의 간절한 심정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도한 히스기야는 목숨이 경각에 달렸던 병으로부터 회복되어 15년을 더 살 수 있는 회복의 허락을 받았던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히스기야의 기도 방식을 놓고 어떻게건 하나님에게 떼를 써서 커다란 선물 보따리를 받으려는 기도, 사람인 주제에 감히 하늘을 움직여 보겠다는 언감 생심의 기도라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모세 다음가는 신앙의 영웅, 선지자의 대표였던 엘리야가 말씀과 기도로부터 멀어지자 곧장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보았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함으로 나라를 구하고 자신의 생명을 연장 받는 히스기야의 모습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성경이 교훈하는 바를 그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히스기야의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전문성을 굳게 믿는 믿음에서 행한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히스기야의 기도는 하나님께 불경한 기도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택하신 백성을 하나님께서는 버리지 않으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무너져 내린 엘리야에게 두 번씩이나 천사를 보내 떡을 구어 먹이시고, 마른 목을 축이게 하시고, 세미한 음성으로 찾아 주심으로 쓰러진 엘리야를 다시 세우신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새해에 ‘신이 외면한 나라’라는 오명을 들어야 했던 중남미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 먹일 것이 없어 아이들에게 진흙으로 만든 과자를 먹여야 했던 부패와 정정불안, 연이은 자연재해의 피해국 아이티를 강타한 진도 7.0의 지진은 새해를 살기 시작한 우리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 줍니다. 우리가 붙들 것은 무엇입니까? 사람입니까? 명예입니까? 아니면 재산입니까? 이생의 자랑도 아니고, 안목의 정욕도 아닙니다.
그 대신 히스기야가 믿었던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동시에 말씀에 의지하여 간구로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당당히 요구하는 큰 믿음으로 오늘 내가 처한 고난을 극복해 나가는 것이 새해의 첫달을 마무리 하면서 우리가 붙들어야 할 유일한 살 길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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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주님, 오늘도 하루를 허락하시니 감사합니다. 홍해를 건널 때는 하나님께서 직접 홍해를 가르시고 백성들이 건너게 하시고, 요단강을 건널 때는 사람이 스스로 강물에 발을 내어 디딜 때 강물이 갈라지게 하신 것처럼, 강권적으로 믿고 구원받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로 하여금 일상에서 스스로 하나님 편에 설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잊은 삶을 살 것인가를 선택하게 하십니다.
원하고 바라옵기는 이생의 환난이 아무리 커도 주안에서 벗어나는 삶을 살지 않게 하시고, 금년 한해의 고난이 아무리 커도 줄기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떨어진 가지가 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도 이 시간을 마치면 모두 일상의 삶으로 돌아 갑니다. 승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믿사옵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아멘…
히스기야 처럼 모든지 하나님만 바라보고 믿음으로 기도할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 될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ReplyDelete좋은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