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February 18, 2010

인생의 흉년에 붙들어야 할 손(룻1:1-5)



인생은 돌아 올 수 없는 차표를 들고 떠나는 나그네 길입니다. 그 나그네 길에서 우리는 오늘 보다 조금 더 나은 내일을 찾아 어디론가 끊임없이 움직여 갑니다. 살아보면 어차피 알게 될 일이지만 어제 떠나 온 출발지 그 곳보다 오늘 도착된 목적지가 딱히 나은 것도 아닌데도 그걸 위해 그렇게나 수고하고 애쓴 것을 생각하면 억울하기 짝이 없는 것이 우리네 인생 나그네 길입니다. 게다가 작은 꿈을 안고 떠나 도착된 그 곳이 언제나 더 나으라는 법은 없는 것이어서 때론 거기서 오히려 더 못한 상황이 펼쳐 질 때에는 그저 말문이 막힐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나오미 일가가 그랬습니다.
베들레헴의 옛 이름 ‘에브랏’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고 백성의 소망하던 곳인데 그곳에 말로 다 못할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 흉년을 피해 ‘하나님은 왕이시다’는 이름을 가진 남편 엘리멜렉을 따라 모압땅에 내려 온 나오미 일가가 흉년을 피하기는 커녕 완전히 망가져 내리는 인생의 흉년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나오미는 진실로 처절한 인생의 흉년 가운데 서있습니다. 배우자는 죽으면 땅에 묻지만 자식은 죽으면 부모의 가슴에 묻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객지에서 남편 잃고, 자식도 그것도 둘이나 잃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과부는 먹고 사는 일도 편치 않고 서러운 법입니다. 그런 과부 나오미가 두 자부와 함께 이방 땅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저 막막할 뿐 입니다.
웃음짓는 소수의 승자 뒤에는 피눈물 흘리는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패배자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승패와 우열이 확실하게 구분되는 글로벌 무한 경쟁시대를 삽니다. 우리가 사는 미국의 실리콘 밸리는 성공의 요람이라고 하여 한 때 발 붙일 곳이 없도록 붐비던 곳이었자만 사실 그곳은100개의 새로운 벤쳐가 나타나면 그 가운데 겨우 하나만 살아 남고 99개는 피어 보지도 못하고 죽는 실패의 요람입니다. 손맛 하나만 믿고 부지런히 노력하면 먹고는 산다는 식당도 1000개가 생겨야 겨우 6개가 살아남아 1%의 성공율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경쟁이 심합니다. 이처럼 처절한 한계 경쟁의 시대가 바로 오늘의 경쟁시대입니다. 참으로 피하고 싶은 착잡한 현실입니다.

인생이란게 다 그렇고 그런 것이어서 풍년이 들다가도 흉년이 드는 법이고, 흉년에 고생하다가도 또 풍년이 들어 언제 그랬나 싶게 흉년의 고생을 말끔히 잊어 버리는 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흉년을 맞아 먹고 살기가 막막한 사람들에게는 과거 풍년에 대한 기억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고 이 기회만 잘 넘기면 또 풍년의 풍성한 시절이 찾아 온다는 위로의 말도 별반 소용이 없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쓰러져서 다시 일어나는 일은 여전히 어려운 일입니다.
실패한 모두가 그들 인간적인 노력만으로 다시금 다시 일어 설 수 있다면 뭐 그리 대단하게 실패의 고통을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누가 실패의 고통 속에서 폐인으로 마지막 남은 삶을 연명하며, 누가 실패로 인해 스스로 인생을 마감하는 삶을 살겠습니까? 아무리 다시 서려고 노력해도, 해도 해도 안되니까 선택하고야마는 그 길이 일본과 같은 자살대국에서처럼 한계 경쟁사회에서 패자들이 걸어 가는 삶의 마지막 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는 우리들은 인생의 흉년을 맞아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그것은 먼저 인간의 눈으로 볼 때 한없이 한심하고 억울해도 인생의 흉년 가운데 처한 모든 문제가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인생의 흉년을 만나면 힘들고, 아프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이 흉년의 상황이 어서 빨리 사라져 주기를 바라고 기대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인생의 흉년 가운데 숨겨진 의미를 찾기 보다는 우리를 흉년 가운데 던져 넣은 그 상황이 없어져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평소때와는 달리 사생결단의 기도로 주님께 매달리는 신앙의 열심을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인간적인 생각으로’이번 기회만 잘 넘기면’을 곱씹으며 발버둥 쳐보지만 하나님은 엘리멜렉을 이방 땅에서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게 하셨고, 두 아들 마저도 데려가 결국은 나오미와 두 자부를 회생키 어려운 한심한 처지에 몰아 넣으신 것처럼 우리들도 다시는 회복할 수 없을 것 같은 처지에 몰아 넣으실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룻기의 처음 이야기를 살고자 발버둥 치는 우리들의 입장에서 보면 처음 이야기의 결말이 너무 허무하고 비극적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흉년에 닥친 문제들을 그대로 얼마동안 머무르게 하시거나, 아주 해결해 주시지 않거나, 때에 땨라서는 오히려 우리의 생명마저도 거두어 가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이 노년에 허락하신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기 위해 아무런 의문과 미련없이 제단을 향해 길을 떠나는 아브라함이 가졌던 신앙의 자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인간적 기대를 포기하게 하는 삶은 잘못하면 자포자기의 삶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기대를 포기하면서도 더 이상의 희망이 없을 것 같은 그 흉년 가운데에도 아직도 희망의 불씨는 살아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룻기의 처음 이야기에서 나오미 가정이 몰락하는 한심한 처지의 이야기는 1장 1절로 5절까지가 전부입니다. 오늘 룻기의 본문을 보면 인간의 죽음 , 더구나 한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던 남성들의 죽음이 너무나도 간단히 기록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한 가정을 책임지던 남자들의 삶이 그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믿는 우리들에게도 똑같은 슬픔의 이야기가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이야기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한심하고 억울한 처지를 통해서도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패자 부활의 계획이 있음이 룻기에서 더욱 중요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룻기에서의 희망의 새로운 삶은 5절의 ‘남았더라’라는 단어가 그 전조가 됩니다. 룻기의 초반부에는 슬픔과 괴로움과 고독의 처절한 가뭄이 가득했지만 그런 가운데도 여전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때문에 가능한 사막의 오아시스같은 새 삶은 바로 ‘남았더라’는 단어를 통해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때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더 이상 스스로에게 의지할 만한 것이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만을 온전히 의뢰하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집니다.
6절을 보면 나오미는 이방 땅에서 고국 땅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그것은 나오미가 고국 땅에서의 풍년 소식을 들은 것이 이유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고국 땅의 백성을 돌보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오미는 그 소식을 듣자 마자 곧바로 행동으로 옮겨 고향으로 돌아 갔습니다.
그래서 룻기는 1장 1절로 5절에서 끝나지 않고 마지막 4장까지 이어졌고,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룻기의 비극은 사라지고 점점 더 기쁜 일을 향해 달려 가는 것입니다. 룻이 보아스를 만나는 극적인 이야기의 결국이 다윗의 조상이 되고 다윗 왕국을 이룬다는 사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 자손 중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룻기의 이야기는 패배의 이야기가 아니라 더 없이 풍성한 패자 부활의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비록 암담하고, 소중한 가족들이 죽을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하나님의 크고 넓은 구속사 속에서는 더 큰 풍년을 위한 희망의 불씨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현실 역시 계속되는 흉년의 때이지만 모든 것을 잃는다 해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 남는 우리는 새로운 역전의 패자 부활의 이야기를 쓰는 위대한 역사 가운데 설 수 있고, 인생의 흉년 가운데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 같아도 우리에게 남는 영원한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어떤 어려움 가운데서도 희망을 노래 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흉년을 극복한답시고 잔머리를 쓰며 현실을 도피하는 삶은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결국은 낭비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도피성 현실 극복이 아니라 흉년의 현실 속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 분을 즐기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 올바른 신앙인이 살아야 할 삶의 자세입니다.
하나님을 내게 맞추는 삶이 아니라 나를 하나님께 맞추는 삶, 남은 자의 소망을 가지고 이 어려운 현실을 살아내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만이 인생의 흉년에 우리가 붙들어야 할 손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호랑이한테 쫓기던 햇님과 달님이 ‘우리를 살리시려거든 우리에게 튼튼한 동아줄을 내려 주시고, 우리를 죽이시려거든 썪은 동아줄을 내려 주세요’ 기도했고, 오누이는 하늘에서 내려 온 튼튼한 동아줄을 붙잡고 하늘로 오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어릴적 듣던 동화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 사는 일이 참으로 어렵다 보니 우리의 어리석음이 세상이 내미는 이 손 저 손을 생각없이 붙잡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고난 가운데 붙들어야 할 손은 하나님의 손 밖에 없습니다.
원하고 바라옵기는 우리를 향한 그 많은 손길들 가운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참 손만을 붙들 수 있는 굳은 믿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손을 내미시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인내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믿사옵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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