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February 3, 2010

여리고 대작전 (수 6:1-4, 12-15, 20)


모맥 거두는 시기, 언덕까지 철철 넘치던 요단강,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물이 끊어졌습니다. 안 당해 봐서 그렇지 얼마나 신이 났겠습니까? 그 길을 200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이 건넜습니다.
요단을 건너고, 길갈에 진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 이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할례를 행했고, 유월절도 지켰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슴에 남았던 애굽의 수치를 저 멀리 굴려 버렸습니다. 광야에서의 노예와 같은 삶도 끝이 났습니다.
지금까지 내리던 만나도 그쳤습니다. 이제부터는 가나안에서 나는 산물을 먹어야 했고, 백성들은 새로운 환경에 도전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길갈은 백성들이 뿌리를 내릴 곳이 아니었기에 그들은 가나안 본토를 정복해야 했습니다. 이 정복의 여정에 처음 가로 놓인 것이 여리고 성이었고, 이 여리고성을 점령하느냐 실패하느냐에 따라 이스라엘의 앞으로의 방향이 결정될 것입니다.
여리고성은 어떤 곳일까요? 그리고 여리고 성의 점령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여리고성은 둘레가 약 600m, 1500명 정도의 사람들이 살았던 성읍으로 추측됩니다. 그 당시의 성읍들은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것처럼 큰 규모가 아니었습니다. 규모는 작았지만 성은 잘 지어진 건축물로 아무도 그 벽을 타고 넘어 여리고로 침입할 수 없는 완벽한 구조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리고성은 가나안 본토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었습니다.
1절의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들로 인하여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고 했습니다. NEB 성경에는 ‘bolted and barred’ 볼트로 조이고 빗장을 걸었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이미 이스라엘에 대한 소문을 들은 여리고 성과 주변 사람들은 성으로 들어가 문을 굳게 잠그고 출입을 금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이 성읍을 포기하고 그냥 지나가 주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전쟁이 오래 갈 수록 밖에서 공격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조해질 것이지만 철통같은 요새 안에서 식량을 마련해 놓고 상황을 주시하는 여리고 주민들이 밖으로 나와 싸울 기미는 조금도 없습니다.
이 성은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었습니다. 이 곳을 점령하지 않으면 이스라엘의 뒤를 귀찮게 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코끼리를 괴롭히는 것은 사자가 아니라 작은 쥐, 생쥐입니다.

적은 숫자가 끊임없이 뒤에서 귀찮게 할 것이고, 이는 결국 가나안 본토 정복 과정에 큰 장애요소가 될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또한 여리고성의 함락은 여호와 구원의 실제적인 실례이면서도 표본이기 때문에도 반드시 정복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여리고성을 무너뜨린다는 것은 오로지 믿음으로 접근할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히 11:30은 ‘믿음으로 칠일동안 여리고를 두루다니며 성이 무너졌으며’라고 하여 여리고 정복에 믿음을 말했습니다. 또 수6:2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여리고와의 싸움은 이스라엘 백성과의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여리고 정복 전쟁은 하나님이 함께 싸우는 싸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싸우는 전쟁에서 상대는 더 강퍅하게 나오기 마련입니다. 기왕 질 거 빨리 항복하고 나오면 좋을 터인데 말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향해가는 온전한 믿음 생활을 가로막는 내앞의 여리고는 무엇입니까? 마음의 할례도 했고, 마음의 유월절도 지켰는데 내 앞에 버티고 있는 여리고는 무엇입니까? 아직도 내 마음에 남은 자존심입니까? 내 재능입니까? 명성입니까? 아니면 내가 지금껏 쌓아 놓은 재력입니까? 이것들이 시시때때로 내 믿음의 생활을 방해하고 있습니까? 아무리 위해서 기도해도 아직도 돌아서지 않는 내 가족이 있습니까? 내가 다니는 사업장, 사장을 위해 동료들을 위해 기도하는데 이들은 오히려 마음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나를 핍박합니까? 이 모든 것들이 내가 무너뜨리고 넘어서야 할 여리고들입니다. 내가 정복해야 할 마음의 여리고, 생활의 여리고들인 것입니다.
여리고는 인간의 눈으로 볼때 난공불락의 성입니다. 참으로 난감한 지경입니다. 그러나 이 때에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수 6:2에서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붙이셨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손’은 신체의 한 부분이지만 손은 힘과 권능과 지배와 보호를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여호수아와 그 백성에게 붙이셨다고 하셨으니 이 싸움은 반드시 승리합니다. 이제는 다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뿐입니다.
그래서 6장의 여리고성 함락에 있어서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세심한 명령이며, 이 명령을 그대로 따라 행하는 이스라엘의 순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에서 보였던 불순종과 자만은 모두 사라지고 여기에서는 구체적인 하나님의 명령을 그대로 수행하는 행동만이 나타납니다. 이 순종 때문에 나머지는 모두 하나님이 하실 일이 됩니다. 하나님이 승리하십니다. 그리고 그 승리는 나의 승리가 됩니다.
3절로 5절에 여리고 공격 방법이 잘 나와 있습니다. ‘너희 모든 군사는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행할 것이요 제 칠일에는 성을 일곱번 돌며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제사장들이 양각나팔을 길게 울려 불어서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작전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즉시 순종했습니다. 제사장들을 불러 작전 지시를 내리되 제사장들과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다수결의 민주주의적 방식으로 처리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리고 성은 나의 어줍잖은 실력으로 무너져 버릴 성이 아니지만 이 전쟁은 반드시 이깁니다. 법궤가 행진의 중심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전쟁은 하나님이 싸우시는 전쟁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명령을 순종하는 백성들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규칙을 철저히 지켜야 했습니다. 수 6:10을 보면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레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찌니라’고 했습니다.
여리고성은 8-9에이커, 그러니까 우리 교회 전체 땅 2배보다 약간 작은 크기입니다. 이스라엘 본진과 여리고성은 2km 정도 거리였다고 하니까 교회에서 언덕 너머 카슨까지 가는 정도의 거리입니다. 이 크기의 여리고 성 둘레를, 이 거리를 이스라엘 200만명이 한바퀴 돌아가려면 얼마나 복잡했겠습니까? 옳은 말 하기도 어렵지만 하고 싶은 말을 입안에 가두는 일은 더 어렵습니다. 200만명이 30분 거리을 걸어 가면서 한 마디씩만 하면 ‘ 와글와글’ 얼마나 정신이 없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저는 아직 경험이 없지만 교회가 무너지는 것은 돈 때문이 아니라고 합니다. 사람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입 때문이라고 합니다.
교회가 비전을 세우는 때까지는 이런 말 저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비전이 정해지면 입은 다물고 비전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들레지 말아야 합니다. 들레면 이 사람 저사람 상처만 받을 뿐입니다. 그러나 외칠 때는 외쳐야 합니다. 살다 보면 낄 데 안 낄데 분별없이 들레다가 막상 외쳐야 될 때는 ‘나, 몰라라’ 뒤로 쑥 빠지는 경우를 봅니다. 외쳐야 될 때와 조용해야 될 때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6:10 후반절은 말합니다.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는 외치라’ 금년에 정해진 교회의 비전을 향해 우리 모두는 조용한 가운데 일심으로 걸어가야 합니다.
일곱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언약궤 앞을 일곱 양각 나팔을 불며 앞서 나갔습니다. 이 광경을 내려다 보고 있던 여리고성 사람들은 얼마나 불안에 안절부절했을까요? 나팔 소리는 하나님의 장엄하신 음성이나 말씀을 상징합니다.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을 때도 나팔 소리를 들었습니다.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계시록을 쓸 때에도 나팔 소리 같은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지막 재림 때에도 우리는 나팔 소리를 먼저 들을 것입니다. 나팔 소리를 듣는 여리고 성 백성들은 기가 죽어 간이 오그라들었을 것이고, 이 나팔 소리를 듣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기가 충천했을 것입니다. 2007년 이 한 해에도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의 나팔소리를 들으면서 험한 세상 속에서 백배 사기 충천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수 6:12에는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니라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궤를 메고’라고 했고, 수6:15에는 ‘제 칠일 새벽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서 여전한 방식으로 성을 일곱번 도니 성을 일곱번 돌기는 그 날 뿐이었더라’고 했습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복을 위해서 철저히 준비를 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무작정 돌진하는 생각없는 장군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어쩌다 한번만 일찍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매일 아침을 일찍 일어난 것입니다. 이 말씀 속에서 여호수아가 얼마나 열심이었고 철저하게 준비하는 사람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평범 속에 비범이 있습니다. 라디오 광고를 듣다보니 ‘산 기도원에 갑시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산 기도원에 갑시다. 픽업 차량은 오전 10시 반, 11시 반, 하루에 두번 xx 마켓 앞에서 출발합니다’ 정말 광고처럼 그 곳에서만 하나님이 살아서 역사하시는지는 둘째 치고, 일년 열두 달 매일 산 기도원만 쫓아 다닐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며칠 다니다가 맙니다. 길어야 몇 달 아닙니까? 우리의 삶의 모든 승리는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여전한 방식으로’ 일곱번 돌 때 이루어집니다. 주님 앞에 가는 그 날까지 오늘이 그 날인가 하는 마음으로 똑같이 살아야 합니다.
2007년 한 해도 지금 앉아 있는 그 자리를 꿋꿋하게 지키십시오. 기도로 지키십시오. 찬송으로 지키십시오. 눈물로 지키십시오. 시종 여일하게, 여전한 방식으로 살면 다른 것 안 해도 될 줄 압니다. 우리가 새벽마다 예배드리는 이 곳이 바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장소인 줄을 믿습니다. 그냥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여전한 방식으로 살면 나의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그 역사가 이루어 지는 제 칠이 올 줄 믿습니다.
‘이에 백성은 외치고…’ 여리고성 함락 기사는 지금 이곳 수 6:20에 딱 한번 나옵니다. 그것은 여리고가 무너진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나가는 과정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떻게, 어떤 과정을 따라 사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날마다의 과정을 보십니다. 신을 벗고 날마다 구별된 거룩한 가치관을 지니고 살고 있는지, 날마다 예배 공동체와 함께 영적으로 무장하고 살고 있는지, 말씀이라는 언약궤를 마음의 중심에 두고 살고 있는지를 보시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여리고는 우리의 섣부른 재주로 무너뜨릴 수 없는 성입니다. 무슨 짓을 해도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함락할 수 없는 성입니다.
13바퀴의 여리고 성을 돌면서 깨달아야 하는 것은 ‘우리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실 때 우리는 한 순간 한 순간을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정해 주신 방법대로 사는것이 최선의 방법인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고백해야 합니다. 이 고백이 성령 충만으로 사는 비결입니다.
2007년 한 해도 성령 충만한 한 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이 정해 주신 방법으로 삶으로 말미암아 승리하는 한해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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