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September 13, 2010

네가 하나님이냐? (욥38:25-27)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다’(욥5:7)고 말하는 데만 사람의 말처럼 사람들은 고난으로부터 자유롭기가 어렵습니다. 사람들이란 제눈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봅니다. 그래서 고난에 처한 사람들을 위로한다는 말이 상한 마음을 가라 앉히기 보다는 오히려 그 상한 속을 더 끓어 오르게 만드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오늘 고난에 처한 욥과 세친구와 엘리후와의 논쟁이 그렇습니다. 그 끓어 오르는 속마음을 일시에 정리하시는 장면이 바로 하나님이 욥을 만나 주시는 장면입니다.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가운데로서 욥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욥38:1), 호렙산에서 세미한 소리를 통해서 엘리아를 만나주셨던 하나님(왕상19:12)이 오늘은 욥을 폭풍가운데서 만나 주십니다. 고난 가운데 혼돈에 싸인 욥을 위해 위엄과 권능으로 나타나시고, 동시에 하나님의 중대한 자기 표현을 위해서 폭풍가운데 나타 나셨습니다. 세미한 소리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만나든, 푹풍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만나든 하나님을 만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만나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위로자가 되어 주기 위해서 찾아 왔던 친구들과의 설전에 오히려 피로만 더한 채 이제 하나님 앞에 홀로 서게 된 욥에게 하나님께서는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욥38:4, 40:7) 다시 말해서 단단히 정신차리고 하나님의 질문에 대답할 준비를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고난의 이유를 몰라 당황하는 욥과 우리 모두를 향하여 소나기처럼 난데없이 질문을 퍼부어 대십니다. 창조세계와 창조질서에 대한 하나님의 질문들은 지금까지 나를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게 한 그 편협하고 협소한 지금까지의 사고방식을 깨뜨리기 위해서 폭풍가운데 나타 나셔서 정신없이 퍼부으신 질문들입니다.
38장에서부터 41장까지 이어지는 긴 문장 속의 질문들을 정리하면 먼저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눈 곳간에 들어 갔었느냐 우박 창고를 보았느냐?’,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누가 그 도량을 정하였는지 네가 아느냐?’, ‘까마귀 새끼가 먹을 것이 없어서 오락가락 할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을 것을 예비하는 자가 누구냐?,’ 그리고 마지막으로 ’네가 능히 낚시로 악어를 낚을 수 있겠느냐?’ 입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질문들은 ‘ 누구냐?, 네가 아는 것이 무엇이냐?, 네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로 다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이 세가지 질문들을 묵상하는 가운데 교훈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38장 41절의 ‘까마귀 새끼가 먹을 것을 예비하는 자가 누구냐?’, 이 질문은 신앙을 지닌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상식적인 질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욥에게 지금 하시는 이 질문은 천지 만물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가르치기 위한 상식적인 질문이 아니라 까마귀 새끼 한마리의 먹을 양식까지도 챙겨 주시는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가?를 묻는 질문,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의 존재와 정체성에 대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신 것과 같은 종류 질문, 모양만 다른 질문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지난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이 행하신 온갖 기적과 이적을 보고 경험했던 베드로는 거침없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사정이 다릅니다. 극심한 고난에 허덕이면서 그 고난의 궁극적인 원인조차 하나님에게 돌리고 싶은 때에 ‘하나님이 누구인신가?’라는 질문에 베드로처럼 거침없이 숨도 안 쉬고 올바로 대답할 수 있습니까?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다만 하나님이 스스로 보여 주시는 계시의 도움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고,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일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까닭없이, 이유없이’ 당하는 고난의 문제 또한 하나님의 자유행위에 포함되는 것임을 39장에서 산 염소의 출산의 고통을 예로 들어 말씀하십니다. 욥과 같이 우리가 지금 겪는 고난은 바로 하나님께서 성숙한 인격체 창조를 위한 하나님의 자유로운 창조 활동인 것을 출산의 고통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창조 질서에 속해 있는 모든 것들이 출산의 고통을 통하여 새 생명을 낳는 것처럼 욥이 당하는 고통, 즉 자식들의 죽음, 질병으로 인한 견딜 수 없는 육체적 고통,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당하고 있다는 영적 고통, 소외감 등 온갖 실존적 극한의 고난들은 오히려 욥 자신의 성숙한 인격체 창조라는 하나님의 재 창조 사역인 것을 깨달아 온전히 받아 들일 것을 바라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냐?’라는 질문은 바로 지금까지 자신을 위해 항변했던 욥에게 ‘ 네가 하나님이냐?’고 물으시는 말씀인 것이고, 극한 곤경에 욥과 우리를 빠뜨리게 하신 하나님, 그 가운데서도 소망과 의지가 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바로 알아 평안 속에서도 고난을 허락하시고, 고난 속에서도 희망과 평안을 주시는 다양한 하나님의 모습을 납득하므로 내가 지금 겪는 이해 할 수 없는 고난의 문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물음인 것입니다.
두번 째로 하나님께서는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누가 그 도량을 놓았는지 네가 아느냐?’(욥39:1-2)고 물으십니다. 하나님의 이 질문은 욥이나 우리가 편협한 지식의 잣대를 가지고 세상 돌아가는 이치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측량하려고 했던 어리석음에 대한 질타의 목소리입니다. 욥이 안다고 하는 지식은 자기 중심적인 주관적 지식일 뿐입니다. 고난에 처한 자신의 처지로 인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불평하고 항변하는 근거는 바로 욥자신, 바로 우리 자신의 도덕적 충실성입니다. 욥은 말합니다.’ 내가 언제 가난한 자의 소망을 막았던가… 내가 언제 나의 미워하는 자의 멸망을 기뻐하였으며 그의 재앙 만남을 인하여 기운을 뽐내었던가… 나그네로 거리에서 자게 하니지 아니하고,…’(욥31:16, 29)

욥은 도덕적으로 충실한 인생을 살아 왔습니다. 그러나 이 도덕적으로 충실한 삶을 살았다는 것이 때로는 오히려 하나님을 올바르게 아는데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욥의 지식이란 더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명과 도덕적 규범에 충실한 자에게 하나님은 재난과 형벌과 같은 고난의 멍에를 지우지 않을 것이라는 전통적인 인과 응보의 신학이 바로 우리가 익숙한 신학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욥의 지식이요 생각인 동시에 바로 우리들의 지식이요 생각일 뿐입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단적으로 말씀하십니다. ‘ 내 생각과 너희 생각은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사55:8) 이 말씀은 욥이나 우리 인간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과 하나님이 우리를 알고 있는 지식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욥은 인간의 이성적 지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까닭도 없는 극심한 고난을 통하여 인간적 이성과 지성의 한계 너머에 계시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지식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말합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이처럼 인간이 자기 지식의 한계, 자기의 부족함을 깨닫는 길은 바로 무한광대한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네가 아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받을 때입니다.
사실 욥은 사회적으로 힘있는 자들의 강탈과 억압으로 인하여 가난과 질병에 허덕이고 있는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사회에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살아 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욥은 말합니다. ‘나는 소경의 눈도 되고 빈궁하는 자의 아비도 되며 불의한 자의 어금니를 꺽고 그 잇사이에서 겁탈한 물건을 빼어 내었었느니라’(욥27:15-17) 그러나 이제 욥이 하나님 앞에 홀로 서있는 때에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물으십니다. 인간적 삶에 있어서 세상만사의 모든 문제 해결의 근원은 궁극적으로 악의 문제 해결, 즉 죄로부터의 구원에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세상의 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나대던 욥에게 ‘ 소같이 풀을 먹는 하마를 볼찌어다. 그것이 정신 차리고 있을 때에 누가 능히 잡을 수 있겠느냐?’는 물음으로 책망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더 나아가 ‘모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낮추며 악인을 그 처소에서 밟아서 그들을 함게 진토에 묻고 어둑한 곳에 둘찌니라 그리하면 네 오른 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내가 인정하리라’(욥40:9-14)고 하십니다. ‘네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질문은 바로 ‘네가 하나님이냐’는 질문의 연장선에서 하나님의 방식을 욥과 우리가 얼마나 이해할 수 있느냐?를 물으시는 질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거칠고 메마른 광야에 있는 생물들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무상의 은혜를 통하여 그들의 삶을 풍성하게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전혀 살지 않는 광야는 인간의 눈에는 별 것 아닌 것 같아 보여도 광야에도 동물들과 식물들의 다양한 생명체가 살고 있는 삶을 터전 입니다. 그곳에 조차 무상으로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님의 방식을 깨닫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모든 것은 내가 하는 것이다’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욥은 더 이상 하나님에 대항 할 수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일 뿐이었습니다.
바벨탑을 쌓던 성경초기 역사의 때처럼 사람들은 더 높이, 더 빨리, 더 멀리, 더 깊게를 외쳐 댑니다. 나라들마다 초 고층 건물들을 쌓아 올려 내가 최고임을 자랑하기에 혈안입니다. 만들때는 모릅니다. 그러나 공든 탑이 일순간에 흔들려 무너 질때는 압니다. 태풍 곤파스가 남한 땅을, 태풍 얼이 미국 동북부를 쓸고 지나갔습니다. 기억되는 몇 년전 카트리나 참사로부터 시작하여 요 몇년 사이에 천재지변이 그 정도를 더해 갑니다. 홍수로, 가뭄으로, 태풍으로, 기근으로, 여기에 인재성이 더해진 재해까지 더해져 아프리카에서도, 파키스탄에서도, 중국에서도 중남미에서도, 온 땅의 삶이 혼란에 혼란을 더 해갑니다. 이 천재지변들 앞에서 우리가 아는 것이 없고, 가진 것이 없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영화에 불과한 것이지만 ‘해운대’같은 천재지변이 발생하면, ‘지구멸망2012’와 같은 마지막이 현실로 우리에게 닥쳐 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진정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바라 볼 뿐입니다.
지금은 변화가 필요한 때입니다. 그러나 그 변화는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며,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존재’이며.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에서부터 시작 되어야 합니다. 죄만 지으면서 살아 왔다는 ‘나’라는 존재에 대한 회개로부터 시작되는 변화가 올바른 변화의 시작입니다. 나를 제외한 변화는 헛일입니다.
오늘 모든 것을 받아 들인 욥에게 하나님께서는 갑절의 은혜를 부어주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욥은 아들과 손자 사대를 보면서 나이 들어 기한이 차서 죽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똑같은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부어지기 시작 하는 귀한 아침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Thursday, August 26, 2010

나를 따르라(막1:15-17)

소대장과 사이가 안 좋았던 부대원들이 소대장을 골탕먹일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부대 지휘관들이 배석한 가운데 벌어진 도강훈련의 때였습니다. 소대장이 권총을 빼어 들고 목소리도 우렁차게 ‘돌격 앞으로!’를 외쳤습니다. 때는 ‘지금이다’고 생각했던 부대원들이 일시에 ‘뒤로 돌아 앞으로 가’했습니다.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이었습니다. 그날 그 소대장과 소대원들 모두 남한산성에서 특별근무를 명 받았다던 그 옛날 한심한 일화가 있습니다.

동해에서 미국과 함께 벌였던 해상합동훈련에 이어 서해에서 벌이고 있는 을지포커스 가디언 훈련을 두고 북한이 연일 신경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적군과 대치하고 있는 군은 언제나 정병강군으로 육성되어 유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정병강군의 기본은 군인의 기강이 확립되어야 하는 것이고, 군대 기강의 기본 요소는 바로 지휘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군사된 자들입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명령의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이 맡기신 일, 곧 소명을 감당하며 살아 갈 방법을 본문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1:15에서 먼저 ‘회개하라’ 말씀하십니다. 이는 성경중심의 가치관과 세계관으로 돌아가 올바른 크리스쳔의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역시 1:15에서 ‘믿으라’ 말씀하시는데 이는 교회의 본질적인 모습을 믿으라, 곧 예수님을 인격적이고 관계적으로 믿으라는 것을 말합니다.
세번 째로 예수님은 1:17에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머리 속으로, 관념적으로만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대로 행동으로 순종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에서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25번이나 말씀하셨는데 오늘 본문이나 막8:34, 그리고 요21:18-19에서 ‘나를 따르라’고 하신 말씀의 때와 장소를 볼 때 참으로 믿는 자로서 우리 성도들이 깊이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할 말씀인 것을 알게 됩니다.

마가복음을 예수님의 제자훈련이라는 관점에서 살펴 볼 때 예수님이 제자로 삼으려는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말하신 명령의 말씀은 바로 ‘나를 따르라’라는 말씀이셨고, 마가복음의 본래의 본문이 16장 8절에서 끝이나는 것이라고 할 때 마지막 명령은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들 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고 천사의 입을 빌려서 하신 것으로 이 말씀도 역시 그곳으로’ 나를 따라 오라’는 말씀입니다.

‘따른다’는 것은 제자됨의 기본요소인 동시에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때가 찼다,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라, 복음을 믿으라’는 하나님 나라의 대 전제를 선포하시면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동역자로 부르셨습니다. 그 처음으로 시몬과 안드레를 보시고 ‘나를 따라 오너라’하셨고, 다음으로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시므로 그들도 예수를 따라 나섰습니다.(막1:16-20) 여기서 네 명의 제자가 예수를 따라 갔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예수의 선포를 받아 들이고 그 일에 동참하겠다는 뜻입니다.
이때부터 예수께서는 여러가지 활동을 벌이셨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직까지 예수는 ‘내가 누구인가?를 묻지 않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다만 예수께서는 마음에 두신 사람들을 부르시고, 열두제자를 세우시고,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그들을 보내어 말씀을 전하게 하시면서 그들에게 귀신을 내쫓는 권능을 가지게 하시는 등 예수 제자들과 함께 하심으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동역하셨습니다. 이때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은 예수님의 모본이 되는 행동과 삶을 본받아 사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따라 간다’는 것은 예수와 함께하는 동역의 시작이었습니다.

갈릴리 지방의 사역을 거의 끝마칠 즈음에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를 떠나 가이사야 빌립보로 가셨습니다. 지금까지 제자들은 예수가 하신 일들을 목격하고, 예수가 하시는 일들을 대신해 왔는데 여기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예수 자신의 사역과 인격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알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물으신 질문이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물음(막8:27)이었습니다. 예수가 세례 요한, 엘리야, 선지자 중의 하나라는 입소문을 제자를 통해 들으신 예수께서 드디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질문에 성질 급한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하여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막8:29)라고 고백함으로 100점짜리 대답을 예수께 했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은 사람의 이름, 가족관계 또는 그 사람의 직업이나 신분을 말하는 것과 다른 것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한다는 것은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실현시키는 분이시며,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신 것을 말하는 것이며, 동시에 이것을 고백하는 사람도 지금까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이해가 변화되어 자신의 희망, 삶의 목표, 가치관들이 예수에게 맟추어 새롭게 변화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를 따라가는 사람은 예수가 누구이신지를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질문에 100점짜리 대답을 했던 베드로는 이제 완벽한 제자가 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완벽한 대답이 베드로의 제자됨을 완벽하게 만들었던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의 대답에 뒤이어 예수께서 당할 메시야의 영광스러운 고난, 즉 ‘고난받고,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다시 일어나야 할 일’(막8:31)을 말씀하셨을 때 예수께서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간했던 베드로는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극단적인 말씀으로 혼이 납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말 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이것은 지난 세월 예수를 베드로 자신에게 맞추려 하였지 자신을 메시야이신 예수께 맞추어 스스로를 변화시키기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따름의 도리’를 한차원 높여 말씀하십니다. 바로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막8:34)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를 따라 간다는 것은 자기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고난을 각오하고 예수를 따라가는 사람인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훈련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삶을 마감해야 할 시점에 이르게 되었을 때 예수는 제자들을 다시 한번 검증하시기 원하셨습니다. 그곳은 바로 골고다 언덕이었으며, 때는 바로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바로 그 시간이었습니다. 여기서 예수께서 제자들이 치루게 하신 시험은 이론적인 물음이 아니라 예수에 대한 실천적 태도를 확인하는 물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제자들은 시험을 포기했고, 모두가 그 시험장소에서 도망질 쳤습니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것은 빌라도가 내린 사형언도의 집행을 지휘하던 이방인 백부장이 예수의 마지막 운명을 지켜보며 고백한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막15:39)

제자들은 모두 도망질 쳤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또 한번의 기회를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천사의 입을 빌어 하신 막16:7의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갈릴리로 예수를 ‘따라 오라’는 말씀이십니다.
제자들은 갈릴리로 예수를 찾아 갔으며, 거기서 예수를 만났는지에 대해 마가복음은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은 채 끝이 납니다. 그러나 이 명령에 대한 답변은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 치라, 먹이라’는 세번의 말씀으로 베드로를 회복시키신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21:18) 고 말씀하시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어떤 죽음을 당할 것인가를 가리킨 말씀이셨습니다. 이처럼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 훈련 과정의 출발점과 중간점 ,그리고 마지막 종착지에서 반복해서 내리신 명령의 말씀이었습니다.
이 이후 베드로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사도행전을 통해 볼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행4:19-20) 사도행전의 막이 오름과 동시에 이미 베드로는 절대적으로 진리이신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따르는 삶을 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정경은 아니지만 베드로 외경을 보면 베드로는 결국 로마에서 사역하다가 체포 당한 후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처형 당하게 됩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의 군사된 자 들입니다.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주되신 예수 를 따르고 있습니까? 갈릴리에서 어부시대 초기 베드로처럼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나선 자들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2-3년 따라 다녔던 베드로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되 아직 내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을 끊임없이 저울질 하면서 세모로 만들까? 네모로 만들까? 갈까? 말까? 줄까? 말까? 뗄까? 붙일까? 온갖 세상적 생각에 번뇌하면서 예수를 따르는 모양만 그럴듯한 하늘나라 군사들입니까?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나의 삶 전체를 요구하시는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으로 이미 예수님과 ‘나’가 총체적으로 하나가 되어 예수와 ‘나’ 사이에 주객 분열을 극복하므로 예수를 따라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오늘도 ‘나를 따르라’ 말씀하십니다. 오늘, 믿는 자로서 나와 예수님과는 실로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확인하면서 예수를 ‘따라 간다’는 것을 깊이 생각해 보는 귀한 시간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내 자신을 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시니 감사합니다. 마음으로는 늘 하나님과 함께하는 길을 생각하면서도 실제의 삶 속에서는 자꾸만 마음 따로 몸따로, 입따로 머리 따로인 삶을 사는 것을 알게 되어 부끄러운 삶을 살게 됨을 회개합니다. 사랑의 주님 아무리 소원해도 겉과 속이 같은 삶이 참으로 어렵사오니 성령님 붙들어 주시고 이끌어 주시어서 예수 보시기에 합당한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것을 드림으로 따라 갈 수 있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믿사옵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Tuesday, August 3, 2010

Monday, July 26, 2010

당신은 행복자입니다.(롬 4:6-8)


성경을 통해 들어서 참 좋은 단어들이 있습니다. ‘은혜, 은사, 평화, 선물, 사랑’이라는 단어 같은 것들인데 우리는 특히 ‘복, 행복’이라는 단어를 참으로 좋아합니다. 복을 싫어하고 행복해지기를 마다 할 사람은 없을 것이지만 지나치게 복 복, 행복 행복하면 속물 같아 보일 것 같고, 지나친 행복 추구 역시 비 기독교적일 것 같아서 우리에게 끊임 없이 가치 혼돈을 가져다 주는 것이 복이나 행복입니다.

오늘은 행복이라는 주제에 대해 묵상하는 가운데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행복을 말하려면 먼저 세상이 말하는 행복이 무엇인지부터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래야 행복이라는 파랑새를 찾으러 다니다 평생을 다 허비해 버리는 안타까운 생을 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행복이란 무엇입니까? 행복은 특정한 시기에 느끼는 긍정적인 삶의 감정입니다. 행복의 정의를 이렇게 말하면 만족, 쾌락, 즐거움, 긍지, 자아실현, 지복 등과 같은 것도 결국은 행복이라는 말과 별반 다르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의 행복은 물질이나 요행으로 얻어지는 것이라고 해도 상관이 없고, 심지어는 상대가 무너져야 내가 이기는 것과 같이 타인의 불행을 전제로 하는 것이라고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정의로 말하는 행복은 과거와 현재와의 비교, 나와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서 찾을 수 있는 행복이라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연봉이 20만불인데 나 혼자만 15만불을 받는 직장과 다른 사람은 다 8만불을 연봉으로 받는데 나 혼자만 10만불의 연봉을 받을 수 있는 직장이 있다면 우리는 어떤 직장을 선택해야 합니까? 결정이 쉽지 않습니다. 계산상으로는 모든 사람이 15만불의 연봉을 받을 수 있는 곳을 선택할 것 같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자들가운데 가난한 사람으로 남느니 차라리 5만달러를 포기하는 길을 택함으로써 만족스러운 삶, 행복한 삶을 살고 싶어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심리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껏 열댓 평 아파트에서 소형차를 겨우 면한 승용차를 타며 알콩 달콩 행복한 삶을 살던 가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앞 동 50평 아파트에 대형 승용차를 타는, 고등학교 때 나보다 훨씬 못했던 친구가 이사를 왔습니다. 그 때부터 내 남편이 한심해 보이고, 그 때부터 그 집안에 부부싸움이 심심치 않게 되었다는 우스개아닌 우스개 소리가 있습니다. 이게 바로 욕구가 만족되어 부족함이나 불안감을 느끼지 않고 편안해 하는 심리상태를 행복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세상에서 찾는 행복이라는 것이 대부분 일시적인 것들입니다. 모든 것을 다 가졌던 솔로몬이 인생의 마지막 때에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인생의 회한은 바로 세상이 주는 행복은 일시적인 행복, 그래서 작은 행복인 것을 바로 알라는 교훈입니다. 세상이 주는 작은 행복이란 갈증을 풀어주는 시원한 물 한잔, 유쾌한 자리에서 먹는 맛있는 식사 한끼, 기대하지 않던 반가운 친구와의 해후, 즐거움, 기쁨, 쾌활함, 유쾌함 같은 것들 입니다. 그 때는 대단했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면 바로 덤덤해 지는 것, 그런 행복이 바로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작은 행복입니다. 조금 크다고 해 보아야 도취, 열광, 환희, 지복, 충일, 승리, 감격, 황홀, 몰아 이런 것들입니다.

요즘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온갖 중독에 빠져 삽니까? 그것은 사람들이 세상이 주는 작은 행복 찾기에 모든 인생을 다 걸기 때문입니다. 집에서 젖먹이가 굶어 죽는 줄 도 모르고 밖에서 컴퓨터 게임에 몰두 했던 비정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찾던 행복이 바로 세상이 주는 짜릿한 작은 행복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도박장을 찾고, 로또 놀이에 혈안이 되어 갑니까? 그것은 잃어 보아야 별것 아닌 것 같고, 따기만 따면 대박이라는 이루어지지 않을 황홀감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세상에서 찾는 행복은 소유에 있습니다. 패션모델인 동시에 가수인 힐튼가의 상속녀 패리스 힐튼이 끊이지 않고 구설수에 오르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자가용 비행기를 자랑하더니 또 자가용 요트를 자랑하는 모습이 매스콤에 실리면서 구설수에 올랐습니다.
패리스가 구설수에 오르거나 말거나 가끔은 ‘웬 복에!’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이게 대부분의 솔직한 심정이 아닙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자꾸만 더 많이 가지려고 애씁니다. 미국에서 비지니스 하나가지고 열심히 살면 그냥 저냥 살만 합니다. 그런데 비지니스 한 개 더하면 규모의 경제라고 좀 더 남을 것 같아서, 그러면 좀 더 나은 삶, 행복한 삶을 살 것 같아서 무리해서 한 개 더 벌렸다가 낭패보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봅니다. ‘네가 하니까 그런 거지, 내가 하면 잘 할 것’같은 그 욕심을 떨쳐 버리지 못해 빼도 박도 못하는 무리수의 삶을 사는 인생이 제 주변에도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살펴 본 세가지의 행복의 특장에서 보게 되는 행복은 큰 행복, 긴 행복, 참 행복이 아닙니다. 음식에 넣는 양념과 같아서 살면서 가끔은, 조금씩은 있어야 될 것들이지만 그것 때문에 우리의 모든 인생을 걸만한 행복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한글 성경을 기준으로 보면 ‘복’이라는 단어는 성경 전체에 574번이나 나오는데 ‘행복’이라는 단어는 구약 신명기에 두 번, 오늘 읽은 로마서에 두 번, 이렇게 네 번만 나오는 것을 보면 복받기는 쉬워도 행복해지기는 그만큼 어려운 것입니다. 모든 행복한 사람이나 가정이 다 고만 고만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반해 불행한 사람이나 불행한 가정의 원인이 되는 죄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오늘 본문은 우리의 온갖 죄, 우리 가정의 온갖 죄에도 불구하고 행복해 지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확실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실 사울 왕과 다윗을 비교해서 보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지 인간 다윗을 개인적으로 놓고 보면 다윗만큼 파란 만장한 인생을 산 사람도 드믑니다. 사무엘이 이새의 집안을 찾았을 때만 해도 다윗은 집안의 말째로 들판에서 양떼나 돌보던 집안의 천덕꾸러기 였고, 사울에 의해 부름을 받았을 때 잠깐 좋은 시절을 제외하고는 ‘천천 만만’사건 이후로 광야에서 방황하는 오랜 망명의 시절을 겪어야 했고, 왕이 되어서도 자신의 권위를 위협하는 수 많은 무리들 때문에 수도 예루살렘에는 들어오지도 못하고 헤브론 땅에서 7년이나 와신상담해야 했으며, 이후에는 정략적으로 혼인한 수많은 여성들 사이에서 생 고생하는 인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남의 떡이’어떻다고 공연히 저녁 나절에 이웃집 여자 밧세바를 넘보았다가 그 충직한 부하 우리아를 죽게 만들어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었으며, 일찌기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생긴 자식을 잃어 버리더니 늙으막에는 자식 압살롬의 반역으로 씻을 수 없는 치욕의 삶을 산 것도 모자라 못된 자식도 자식이어늘 압살롬, 그 자식을 앞서 보내는 비통함을 겪는 등 정말 복잡하고 고단한 인생을 산 사람이 다윗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오늘 로마서에서 다윗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바울이 다윗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한 것은 지금 우리가 세상에서 얻어 가지고자 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다만 이 격랑과도 같은 인생의 삶속에서 자신이 지었던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그래서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은 축복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행복은 돈과 권력과 승리와 쾌락과 명에에 있지만 다윗은 그것이 참 행복을 주는 근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처절한 삶 가운데에서 저질렀던 수 많은 죄를 통해 깨달았던 진리였습니다. 사람의 행복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땅에서는 지옥의 아픔을 겪는 삶을 살아도 그를 통해서 내 죄를 깨닫고, 그래서 예수를 만나고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다는 것 이상의 복은 없으며, 그 복을 깨달아 누리고 사는 사람은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인 것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지위로는 가까이 할 수 없는 분이 나와 함께 해주시는 교제를 누리며, 무엇이든 하실 수 있고 주실 수 있는 분이 아무 대가 없이 내 죄를 사하시고, 수없이 짓는 자범죄의 허물을 덮어 주시고,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삶을 사는 인생 이상으로 행복한 사람은 없습니다. 다윗은 바로 이 행복을 깨달았고, 이 행복을 누리면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예배하는 우리 모두가 다윗과 똑같은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행복은 소유에 있지 않습니다. 행복은 주신 복을 누리는 삶에 있습니다. 얼마전 월드컵 축구가 끝났습니다. 축구 경기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대리 만족을 누릴 수 있었고, 그래서 삶의 스트레스도 얼마간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월드컵 참가국 선수들의 기술과 기량이 참으로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선수들의 기술이 아무리 훌륭해도 상대가 있는 한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선수 한 사람이 공을 드리볼 할 수 있는 시간은 고작 몇 초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 말은 혼자 공을 잘 다룬다고 해서 경기에서 승리하기는 어렵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제공권을 장악하고 지상의 공간을 잘 활용하는 팀이 승리의 확률이 높은 팀입니다. ‘드리볼’하는 재주는 공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간을 활용하는 재주는 공을 즐기고 누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행복은 더 많이 소유하는데 있지 않고 소유한 복을 누리는 데 있습니다.

세상이 대박 대박한다고 우리 믿는 이들도 대박 대박해서는 안됩니다. 대박의 은혜도 때를 따라서는 필요할 터이지만 그 보다는 먼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 온 인생들에게 주시는 나날의 작은 은혜를 새록 새록 느끼면서 주신 복, 가진 복을 누리고 사는 사람이 오히려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크고 긴 참 행복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회개하고 구원받은 삶을 사는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일상의 삶에서 범하는 수 없는 자범죄의 허물을 덮음 받는 삶을 사는 우리는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날마다 주시는 작은 은혜에도 감사하며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귀한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닫는 우리 모두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라는 말씀이 이 아침에는 ‘복 타령 좀 그만하거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립니다. 돌아보면 광야 길 40년을 먹이고 입히신 하나님이신 것을 알겠건만 앞을 볼 때면 그저 깜깜하기만 우리의 믿음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앞 못보는 사람이 눈을 뜨고, 죽을 병에서 일어나 앉았는 것을 기적이요, 은혜요, 하나님과 함께하는 행복이라 생각케 마시고 내 힘으로 숨쉬며 하루하루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이 내게 베푸신 일용의 은혜인 것을 알게 하시고, 그것을 누리며 사는 것이 행복인 것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하옵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Thursday, July 15, 2010

가지에서 잘린 꽃은


이미 죽은 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아직 죽은 꽃은 아니지만 서서히 그러나 완전히 죽게 될 꽃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는 포도나무 비유이야기가 나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내가 저 안에 있으면 과실을 많이 맺을 것이나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치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져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진다고 했습니다.

교회사택에 자두나무가 몇 그루 있습니다. 매년 열매맺는 이 때를 통해서 위의 말씀을 경험합니다.
아무리 뜨거운 여름날, 햋빛이 바로 쪼이는 곳에 매달린 자두과실이라도 나무에 매달린 과실을 베어 먹으면 시원합니다. 강한 생명력이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응달진 그늘이 있어도 가지에서 떨어져 나간 과실은 그저 뜨뜨 미지근할 뿐입니다. 사람은 떨어진 과실이 아까워 괜찮은 것을 골라 보지만 새들은 참 기가차게도 땅에 떨어진 과실은 거들떠도 보지 않습니다. 그걸보면 어떤 때는 미물들이 사람들보다도 ‘존심(!)이 더 강하다’여겨지기도 합니다.

땅에 떨어진 것은 이미 죽은 것입니다. 포도나무가 예수님이심을 다 아는 것이로되 예수님이신 포도나무로부터 시시때때로 자꾸만 멀어져 나가려는 ‘나’또한 위험한 존재임을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Tuesday, July 13, 2010

나는 종이로소이다! (롬1:1)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예전에는 요리연구가라고 하면 맛있는 음식, 귀한 음식을 원전대로 만들어 내면 그것으로 족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음식 본연의 맛을 그대로 표현해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음식을 어떤 그릇에 어떤 모습으로 담아내느냐하는 문제는 음식의 미학을 더해주는 또 하나의 창작 분야가 되어서 이들 새로운 직종을 담당하는 전문가를 푸드 스타일리스트(food stylist)라고 부릅니다.

오늘날과 같은 무한경쟁의 시대에서, 특별히 경기의 침체로 인하여 청년실업이 증가하는 때에는 ‘나’라는 존재를 어떻게 표현해 PR하느냐의 문제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로 직결됩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물론이고 요즘세대 30%나 되는 남자들이 취업만 된다면 기꺼이 성형 수술도 받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라는 존재를 전략적, 전술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전문 학원에 등록하여 이력서를 쓰고,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는 방법을 배우고, 취업 면접에 대처하는 훈련을 하는 것이 하나의 추세가 된 것은 또 하나의 포장기술을 위한 노력입니다.
2,000년전 바울은 어떻게 자기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까? 오늘은 바울의 자기소개를 통해서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사도행전을 읽으면 바울이 세번째 전도여행 도중에 고린도라는 도시에 잠깐 머물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때는 겨울이었는데 바울이 고린도에서 여행을 멈춘 것은 단순히 휴식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여행보다 더 중요한 일 중의 하나로 로마 교회에 편지를 쓰는 일 때문이었습니다. 잘 아는 것처럼 바울은 로마교회에 무척 가보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길이 자꾸만 막혀 갈 수 없었습니다. 자꾸만 로마가 눈에 밟혔던 바울이 침침해진 눈 때문에 개인 비서 더디오를 옆에 두고 구술로 작성한 편지, 그리고 집사 뵈뵈의 손에 들려 로마에 있는 교회에 전해 주도록 한 편지가 바로 복음서 중의 복음서 로마서입니다.
로마서가 당시 환락의 도시, 음란의 도시 고린도에서 쓰여진 복음서, 그리고 이미 교회가 세워진 로마교회에 보내기 위해 쓰여진 복음의 편지라는 것은 물질과 쾌락 만능의 시대에 어떻게든 자신을 더 드러내 보여 세상적 성공을 쟁취하려는 이 세대에, 그리고 온 천지에 교회가 편만한 이 세대에 큰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포함해서 로마서 1장의 처음 일곱 절은 고대 라틴에서 편지를 쓸 때 사용하는 서론 같은 부분이지만 특히 로마서에서 편지를 보내는 사람, 즉 바울 자신에 대한 정체가 바울의 다른 편지보다 자세하게 되어 있는 것은 빠른 시일 안에 로마교회를 방문하기 원했던 바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소개하는 일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먼저 바울은 아직 한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는 로마 교인들에게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 즉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편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나를 올려 놓지 못해 안달인 세상입니다. 어차피 자신을 내세우지 못할 바에야 중간이나 하자고 가만히 있을 것이지 나를 ‘종’ 곧, 세상에서 ’졸’인 사람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덜 된 사람이 세상 천지에 어디 있을 것입니까? 그런데 바울이 지금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스스로도, 그리고 세상으로부터도 그렇게 허접하게 대접 받아야 할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빌립보서에서 스스로를 말한 것처럼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빌3:5)인 바울은 당대의 석학이면서 어떻게든 가져 보려고 사람들이 애썼던 로마 시민권을 나면서부터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했던 첫마디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인 것입니다.
종이란 바로 노예를 뜻합니다. 2,000년전의 노예는 과거 우리나라의 노비나 백정 같은 천민이 받았던 대접보다 훨씬 더 비참했습니다. 과거 천민 중의 천민이라고 하던 갓바치들은 그래도 자신의 식솔들을 일구어 살 수 있었지만 로마시대의 노예는 이름도 없고, 생각도 없고, 꿈도 가질 수 없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특히 오늘 바울이 자신을 말한 종, 둘로스(doulos)는 생사여탈권이 주인에게 주어져 있는 존재로 영화 벤허에서 보았던 것처럼 배 밑창에서 노나 저으면서 바같 세상을 마음대로 볼 수 조차없는, 그 가치가 새 한마리 값도 안되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종이란 것이 그런 존재인 것을 아는 바울이 왜 자신을 종이라고 불렀습니까? 우리는 ‘종’ 앞의 ‘그리스도’라는 말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종, 곧 노예였으되 고관 대작의 노예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노예였습니다. 바울은 노예보다 더 비참한 존재가 영원히 죄에 매여 종노릇을 하는 존재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죄에서 나를 자유하게 하신 분이 예수라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았기 때문에 스스로 예수님의 소유가 되기로 한 것입니다. 또 바울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한 것은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는 바울의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을 나타내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의 오랜 희망의 성취인 것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하므로써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야 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내 주인이신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므로 나도 십자가를 지고 따르겠다는 삶의 결단입니다. 나의 생사여탈권을 하나님이신 예수님에게 맡기고 예수님의 종으로 살되 죽든지 살든지 예수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삶을 살겠다는 고백이 바로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바울은 자신을 ‘작은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사울이었던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뒤로 바울이 되었다고 말하지만 야곱이 얍복강에서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 싸워 이긴 뒤로 이스라엘이 된 것과는 경우가 다릅니다. 우리 한국의 유명한 패션가 앙드레 김의 본명은 김봉남입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김봉남’이란 이름보다 ‘ 앙드레 김’이란 이름 쓰기를 더 좋아합니다. 바울도 그렇습니다. ‘사울이라 하는 바울’이라 했습니다. 사울이나 바울이나 다 한 사람의 이름입니다. 사울이라 불러도 되고 바울이라 불러도 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만나고부터는 사울이라는 이름보다 바울이란 이름 쓰기를 더 좋아한 것입니다. ‘사울’과 ‘바울’은 어떻게 다릅니까? ‘사울’은 ‘희망으로 하나님께 구한다’는 뜻의 큰 이름입니다. 어려서부터 똑똑했던 바울은 베냐민 지파의 희망이었으며, 그 집안 전체의 희망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에 합당한 대접을 받으면서 자랐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로마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었던 히브리 민족 중에서 로마의 시민권을 갖게 된 대단한 사람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랬던 그가 이제는 스스로 ‘희망’을 나타내는 큰 이름 대신 ‘작은 자’라는 이름인 바울(Paulos)로 불려지기를 좋아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 빼 놓고는 자신이 자신을 제일 잘 압니다. 사울이 그렇게 자타가 인정하는 출세한 인물로서 했던 일이 무엇입니가? 그것은 스데반을 돌로 쳐죽여 순교자로 만든 것, 목적이 잘못된 까닭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의 뒤를 좇아 다니며 못살게 군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강권하심으로 예수님이 사울을 만나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사울은 그 이름이 ‘못난 자, ‘작은 자’라는 뜻의 ‘바울’로 불려지기를 좋아 했습니다. 바울이 사울의 때에 잘못된 인생을 산 것을 깨달았고, 그 인생이 헛된 것임을 깨달았기에 ‘포기한다’는 뜻을 가진 단어에서 온 ‘파울로스’(paulos), 바울이 되기를 선택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가말리엘의 문하생, 다소 출신, 로마의 시민권자, 유대인이라는 모든 기득권을 배설물로 여기고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했던 자신을 가장 잘 알았기에 스스로를 작은 자로 부르기로 했던 것입니다.

세번째로 작은 자로서 바울은 감당할 수 없는 은혜로 예수 그리스 종으로 붙들림을 받아 사도로 세움 받은 자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부르심을 받은 자,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당시에는 크고 작은 전쟁이 이런 저런 이유로 일어나곤 했습니다. 전쟁이 나면 전면전에 앞서서 대표, 곧 사도를 적진에 보내 분쟁의 원인을 알아 보게 하고 타협하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로 보내진 대표의 수완이 좋으면 전쟁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승리의 소식,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좋은 소식, 유앙겔리온을 전해 주는 사람이 바로 사도입니다. 타협이 안되면 적군의 사도는 죽을 수 밖에 없었고, 그리고 나면 전쟁을 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전쟁에서 사도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반드시 있어야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 일을 위해 그렇게 세워진 또 하나의 존재가 바로 자신인 것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 첫머리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 ‘보냄을 받은 자’, ‘사도’(apostolos)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로마 교회의 뿌리가 바울 자신의 개인적 능력이나 지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사명에 있다는 것을 로마 교회가 바로 보도록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의 믿는 이들은 모두가 만인 제사장, 만인 사도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이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지혜를 갖췄고,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들 각자에게 은사를 허락하시고, 그 은사를 사용하시기 위하여 우리들 각자를 불러 세우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스스로를 사도라고 말하고 있는 이유인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본문에서 종, 작은 자, 사도 이 세가지가 바울이 말한 자기 소개의 모든 것입니다. 바울은 스스로를 종으로 인정하는 가운데 자신이 작은 자임을 받아 들이게 되었고, 종으로 낮아지므로 사도로 세움 받았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세상은 나를 크게 드러내려고 안달이고, 나를 과대 포장하려고 혈안이고, 그것이 나를 소개하는 ‘자기 소개서’의 핵심이지만 바울은 스스로를 낮춰 가장 허접한 존재가 되어 가장 작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붙들려 쓰임 받는 사도의 존재가 되었기에 오늘까지 믿는 자들에 의해 귀하게 입에 오르 내리는 존재가 된 것이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받을 교훈입니다.
특별히 종으로, 작은 자로, 사도로 억지로가 아니라 저절로 저절로 가는 것이 바로 복음의 길, 부흥의 길인 것임을 다시한번 깨닫는 귀한 우리 모두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어두움 가운데 있기를 한사코 고집하는 우리를 따로 떼어 두셨다가 때가 이름에 불러내셔셔 빛가운데 들어가도록 밀어 넣어 구원하신 주님 감사합니다. 모두를 왕같은 제사장으로 삼아 주시고 합당한 은사를 허락하셔서 하나님 나라 건설과 확장에 필요한 사역과 직분들을 감당하게 하시니 이 또한 감사합니다. 원하고 바라옵기는 이 모든 일들이 오로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임하신 까닭임을 깨닫게 하시어 저희들이 겸손함으로 허락하신 일들을 감당케 하여 주시옵소서.
어떤 상황에 처하든 예수의 사랑 안에서 화평함으로 평안을 누리는 삶을 살게하여 주시옵소서. 영적으로 육적으로 괴로운 가운데 있는 형제, 자매들 주님의 손으로 덮어 회복시켜 주시옵기를 소원합니다. 이루어 질 줄 믿습니다.
믿사옵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Wednesday, June 30, 2010

누군가 날 위하여...

언듯 보는 것과는 달리 사진은 앞서가는 큰 배가 뒤따르는 작은 배를 끌고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뒤에 가는 작은 배가 앞서가는 배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리 훌륭한 장비가 갖춰진 배라도 익숙치 않은 좁은 수로를 지날 때는 파일럿이라 부르는 안내하는 배가 뱃길을 인도해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지나온 과거는 아쉽기만 하고, 우리의 앞 날은 그저 불확실성이 함께 할 뿐이어서 답답할 뿐이지만 지금 우리가 안심할 수 있음은 우리의 뒤에서 때로는 우리의 앞에서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Monday, June 28, 2010

나이듦에 대하여(고후 4:16-18)



‘맥도날드에서 Senior Coffee를 청했다’고 했더니 나이드신 권사님 한 분이 ‘너무 좋아하지 말라’ 했습니다. ‘그 만큼 나이가 든 것’이고, ‘그 곳에 갈 날이 가까워 오고 있음’을 잊지 말라는 당부의 뜻이 숨은 줄압니다.

오늘은 어떻게 나이드는 것이 성경적으로 나이 드는 것인지 잠시 묵상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이후 예수가 탄생할 때까지 지구를 살다 간 인류는 기껏해야 2억 5000만~3억명 가량 일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제국 시대로부터 1800년 경 까지 인간의 평균 수명은 30세도 되지 못하던 것이 과학기술문명의 혁명과 더불어 어지간한 나라라면 남자는 평균나이 75세, 여자는 평균나이 82-3세가 넘어 20세기 중반에 두차려의 세계 대전을 겪고도2000년대에는 이미 60억명을 넘어선 까닭에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면 어디나 사람으로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은 바로 나이가 든다는 것입니다. 달릴 때는 몰랐는데 멈추고 돌아 보면 아주 먼 길을 지나 온 것처럼 나와 관계없이 언제나 내 밖에 있는 것이라 생각되던 것이 어느날 갑자기 내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을 깨달아 맥빠지게 하는 것이 바로 나이입니다. ‘나도 이젠 나이가 드는가보다’라는 스스로의 인정과 ‘다 늙어도 나는 안 늙어’라는 묘한 자만심이 서로 싸우게 하고, 스스로는 ‘나이가 들었다’고 인정하는 때에도 남으로부터는 ‘무슨 말씀? 아직도 젊으신데!’라는 말을 듣는 것이 훨씬 좋은 것이 바로 나이입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여자나 남자나 꼭 같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싫어도 누구나 나이를 먹습니다. 그리고 나이듦은 바로 늙어감을 뜻합니다.

그동안 사회의 각 기관들에서 노인계층은 한편으로는 생산에서는 제외되어 무언가를 써 없애기만하는 소비계층으로 보아 왔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돌봄을 받아야 사는 아무런 능력도 없는 계층으로 인식해 왔습니다. 지금까지 노인 세대는 전통적인 윤리의식 속에서 우리 국가와 사회의 발전에 고귀한 경험을 만들어 낸 세대로 대접받고 싶어하고 또 대접하려고 노력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현대 다원주의 산업사회와 그 사회가 중요시하는 배금주의는 노인들과 관련하여 많은 문제를 불러 오고 있습니다. 앞으로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노인과 관련한 사회문제는 세대간 단절로 인해 더욱 심해질 터인데 그렇기 때문에 적어도 우리 믿는이들은 성경적으로 노인을 생각하고 노인들의 문제를 이해하고 풀어 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먼저 성경은 나이가 든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성경은 노인을 나이가 많은 이를 지칭하여 청년 또는 젊은이의 반대어로 말하고, 부모 공경과 같은 맥락에서 노인을 공경의 대상으로 보고 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각 지역의 지도자들은 대부분 노인들이었습니다. 구약 성경 전체에 걸쳐 70인 장로들(민11:6)이나 재판장들(신21:2)은 중요한 특권을 가지고 있었고,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레19:32)는 말씀은 구약시대에 있어서 나이 든 어른에 대한 백성들의 태도를 엿볼 수 있게 합니다.
또 ‘젊은 자의 영화는 그 힘이요 늙은 자의 아름다운 것은 백발이니라’(잠20:29)라고 한 것같이 노년은 지혜와 명예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중요한 문제를 결정할 때나 어려운 일이 생길 때 노인들은 의논하고 조언을 구할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나이 든 사람에 대한 구약의 생각은 신약에도 그대로 이어 지고 있어서 바울은 딤전5:1-2에서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비에게 하듯하며 늙은 여자를 어미에게 하듯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노인의 슬기와 지혜를 말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대인이라고 지혜로운 것이 아니요 노인이라고 공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고(욥32:9)하여 노인의 무지와 불완전함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단지 나이가 많다는 선배의식만으로는 더 이상 참 접대를 받기에 부족함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막10:13-16에서 예수님께 축복받으러 나오는 어린아이들을 꾸짖는 제자들에게 화를 내시면서 ‘하나님 나라가 바로 이런 자들의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은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들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나이들어 늙어 가는 것 때문에 오히려 우리 마음이 순수하지 못하고, 그래서 하나님을 순수하게 믿고 신뢰하는 마음이 낡아지고 약해 지는 것을 경계하고 하신 말씀입니다.
또 장로를 택하는데 대한 바울의 가르침(딤전3:1-7)이나 참과부 존대에 대한 권면(딤전 5:3-10)을 보면 청년 곧, 젊은이들이 노인을 어떻게 대접할 것인가도 중요하지만 노인들 스스로 어떻게 나이들어 가야 하는가?의 문제 또한 중요한 것임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성경적으로 나이가 들기 위해서 깨달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먼저 겉사람은 반드시 늙는다는 것을 바로 깨닫는 것입니다. 나이드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나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때가 되면 늙어야 하고, 그래서 겉사람은 초라해져야 하는 것이 복입니다. 아무리 화장하고, 변장하고, 포장해도 세월이 갈수록 겉사람은 노쇠하고 무능력해 집니다. 겉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냄새맡고 맛보는 것, 만져 보는 것 등 현실적인 감각과 체험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겉사람은 나이가 들면 후패해지기 마련입니다. 이 사실을 바로 알고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인정하지 않으면 내 안의 ‘나’가 괴로워 할 뿐입니다.
그대신 나이가 들어 가면 겉사람이 아니라 속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속사람은 육신이 주는 감각적인 느낌으로 살지 않고 말씀으로 사는 것입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가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가 안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이 없어도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믿음으로 붙들고 살아가는 삶이 속사람이 사는 방법입니다.

겉사람은 후패해도 여호와를 앙망하는 삶을 사는 속사람은 피곤하거나 곤비치 않으며 언제나 하늘을 차고 오르는 독수리처럼 새 힘이 넘쳐 납니다. 이 힘은 나이와 관계가 없습니다. 속사람이 힘을 얻고 젊어지는 것은 나이와 관계가 없다는 말입니다. 욜2:8을 보면 속사람이 강건한 사람들은 ‘자녀들이나 젊은이나 늙은이가 모두 장래 일을 보고, 이상을 보고 꿈을 꿀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나이가 젊어도 속사람이 늙은 젊은이가 있는가 하면 나이는 들었어도 속사람은 여전히 젊어지는 늙은이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나이가 젊어도 하나님이 ‘오라’ 하시면 꼼짝없이 붙들려 갈 수 밖에 없는 것이 겉사람의 삶 입니다. 그리고 아파트 내 옆 집도 모자라서 동네 아파트 모든 집의 숫가락이 몇 개인지 젖가락이 몇 개인지 세는 삶은 겉사람이 사는 삶입니다. 동네사람 사돈의 팔촌이 뭐 해 먹고 사는지 미주알 고주알 따지는 재미로 사는 삶은 바로 겉사람이 사는 삶입니다. 그 대신 아직 힘이 있을 때 말씀 한 구절이라고도 더 듣고, 말씀 한 줄이라도 더 보려고 애쓰는 삶이 바로 속사람이 젊어지는 삶입니다.

둘째로 성격적으로 나이가 드는 삶은 노년기에 주어진 사명을 올바로 해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학생은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젊은이들은 아직 젊었을 때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나이들어 늙어가는 사람들은 어떤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야 합니까? 노인들의 사명은 바로 ‘타인과 화해’하는 삶입니다. 마음이 아팠던 일들,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과 화해하는 가운데 나이가 들어 가야 합니다. 살아 오면서 마음 속에 쌓였던 부정적인 감정들과 화해하고 용서하여 모든 것과 통합하는 관계 속에서 늙어 가야 합니다. 나이들어 가는 삶들의 진정한 힘은 축복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항상 건성이 아닌 진심으로 축복하고, 무슨 일이든 축복하는 일, 그 일이 나이들어 늙어 가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힘들어 지친 사람들의 도피성이 되어주고 피난처가 되어 줄 수 있는 나이든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어차피 제한적일 수 밖에 없는 인간관계인 것인데 교회 안에서 조차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얽매이다가 그만 발 목을 잡혀 상처 받는 삶은 이제 그만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사는 재미를 찾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사는 재미를 찾으며 사는 것이 성경적으로 나이든 사람의 사는 방식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날을 계수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가인의 자손들은 세월과 관계없이 일에만 몰두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일을 다 마쳤다고 생각했을 때 세월은 그들을 삼켜버렸습니다. 그러나 셋의 자손들은 일에만 몰두하는 대신 날을 계수하는 지혜를 발휘하며 살았습니다. 날을 계수한다는 것은 인생에 끝 날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끝 날이 이르기 전에 자신의 존재와 생명을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의탁하는 삶을 사는 지혜로운 인생입니다.
그 옛날 중국의 양자는 ‘사람이 1 백살을 산다고 해도 거기서 어린시절과 노인시절, 잠자는 시간과 깨어 있어도 헛되이 보내는 시간, 아프고, 슬프고, 괴롭고, 근심하고, 두려워 하는 시간을 빼고 나면 만족하며 보낸 날은 한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탄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나이드는 삶은 환상적인 삶입니다. 비로소 내면의 가치를 깨닫고 그 남은 삶을 영원한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의탁할 수 있는 삶의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나이가 들면 시간은 더욱 빠르게 흘러갑니다. 나이가 들수록 반복되는 일들만 하게 되고, 단조로운 생활이 호기심과 긴장감을 떨어 뜨리기 때문에 시간은 더욱 빠르게 흘러 가는 법입니다. 그리고는 그렇게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 때문에 덧없어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적으로 나이든 삶입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가도 남은 시간을 계수하며 지금이 바로 은혜받을 만한 때임을 깨달으며 한순간, 한순간을 겸손함으로 열심히 사는 것은 바로 성경적으로 나이들어 사는 삶입니다.

금년도 벌써 절반이 흘러갑니다. 아쉽습니다. 그러나 아쉬운 생각이 드는 이 때에 아픈 과거만을 기억하는 삶이 아니라 앞으로 내게 허락될 삶의 시간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가운데 영적으로는 오히려 더욱 충만해지는 삶을 살 수 있는 우리 모두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한해의 마지막 때에나 하던 ‘다사다난’이라는 말이 한 해의 절반을 산 지금 말한다 해도 하나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세상적으로 어려운 때를 살지만 오늘 여기까지 도우시고 인도하신 주님을 감사합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날로 후패하여 가지만 원하고 바라옵기는 우리의 영은 날로 새로워 지고 건강하여 지기를 소원합니다.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지금껏 수십년을 살아온 인생들의 그 마지막이 허접하게 마감되지 않게 하여 주시고, 건강한 몸으로 아름다운 영성을 지닌채 새하늘 새땅으로 이적해 갈 수 있는 영광된 인생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육체적으로 건강하지 못하고, 정신적으로 영적으로도 건강하지 못하여 고통하는 성도들 많사오니 이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어 권능과 치유의 손으로 덮어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믿사옵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Tuesday, June 8, 2010

전체 무게는 140t … 인공위성은 100㎏



지난해 실패한 나로호, 이번에 2차로 발사가 시도됩니다. 그래서인지 관심도 그만큼 높습니다. 알고 보면 더 재미가 있다는 신문기사가 정말 흥미로운 시사점을 던져 주기에 기사를 옮겨 적습니다. 무언가를 채워넣으면 커질 법한 것이 일반적 상식인데 채워 넣으면 오히려 줄어드는 것이 있었고, 바라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때를 기다려야 하고, 원하는 곳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자꾸 써 없애고, 버려야 하는 것이 있음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큰 시사점을 던져 줍니다.
"나로호에 숨겨진 첨단 기술을 알고 발사를 지켜보면 더욱 흥미롭다. 나로호는 하늘로 올라가면서 연료통이며 페어링이며 무엇인가를 자꾸 떼어낸다. 연료탱크에 연료를 주입하고 나면 연료통 자체가 줄어들기도 한다. 독자들의 궁금증을 질의응답(Q&A)으로 풀어본다.

Q. 연료를 태우는 액체산소는 극저온이라는데 나로호 몸체에 영향은 미치지 않나.
A. 나로호 1단의 길이 25.8m 중 14m 정도에 액체 산소 100t이 주입된다. 액체산소의 온도는 섭씨 영하 183도. 이렇게 차가운 액체를 받아들이는 연료통은 수축될 수밖에 없다. 전체적으로 통 지름은 12.7㎜, 길이는 60㎜가 수축된다. 이는 전체의 0.44%에 해당한다.

Q. 나로호를 하루 중 아무 때나 쏠 수 있나
A. 쏠 수는 있지만 거기에 싣고 가는 위성이 문제다. 나로호의 목적은 위성을 우주에 올려 작동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위성이 우주에 올라갔을 때 밤이 되거나 해를 보기 어려운 시간이라면 태양전지가 작동하지 않아 전력을 제대로 공급할 수 없다. 이번처럼 오후 4시30분~6시40분 사이에 쏘는 건 위성이 우주에서 태양빛을 가장 잘 받을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이를 ‘하늘문이 열리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Q.나로호가 제대로 비행하는지 어떻게 아나.
A.나로호 2단 로켓에는 동영상 카메라가 두 대 달려 있다. 하나는 1단 로켓 쪽(지구 쪽)을, 또 하나는 위성 쪽(우주 쪽)을 향한다. 이들이 찍은 영상은 실시간으로 지상 관제소로 전송된다. 또 내비게이션도 달려 있다.

Q. 나로호는 비행하면서 연료통 등 이런저런 부품들을 왜 떼어버리나.
A. 나로호는 2단 로켓 발사체다. 나로호가 발사되면 1단 로켓에 담긴 130t 가까운 연료는 229초 만에 다 타버린다. 발사 232초 후 지상 196㎞에 도달하면 다 쓴 1단 로켓을 떼어 버린다. 발사 453초 뒤에는 2단 로켓마저 다 쓰고 떼어낸다. 목표 궤도에 올라가기까지 불필요한 것을 없애 무게를 줄이기 위해서다.
나로호가 우주에 싣고 가는 위성의 무게는 100㎏에 불과하다. 그러나 연료를 꽉 채운 나로호의 무게는 140t에 이른다. "

Wednesday, June 2, 2010

우리는 다만 그 품 속으로 달려가면 됩니다.

다니엘의 믿음처럼(단1:8-17)

금년은 일제 식민 조국의 원통함을 달래기 위해 만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의사의 순국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안의사의 독립운동과 항일 계몽운동, 그리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았던 그의 생애는 100년이 지난 세월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에 빠져 버린 이스라엘은 남 유다가 기원전 586년에 완전히 멸망을 당하여 백성들이 70년간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게 된 것으로 끝이 나게 되지만 사실 유다의 운명은 이보다 10년쯤 전인 605년 느부갓네살의 유다 침략으로 이미 결정이 나버렸습니다. 느부갓네살 군대는 예루살렘을 짓밟고, 예루살렘 성전의 기구들을 약탈해 갔습니다. 이로써 유다 백성들의 신앙적 자부심은 말 할 수 없이 짓밟혔는데 이 때 다니엘과 세친구들이 많은 유다 백성들과 함께 적국인 바벨론 땅으로 끌려 갔습니다.
당시의 암울한 상황에 대해 시편기자는 후일에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로 시작하는 시편 137편으로 노래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다른 유다 백성들과는 조금 다른 상황의 포로였는데 오늘은 이들을 통해서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예루살렘을 침공한 느부갓네살은 유대 왕족과 귀족인 청년들을 포로로 잡아 갔는데 이들 중에 오늘의 주인공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이들은 육체적으로 흠이 없고, 지식적으로도 이미 탁월한 역량을 갖추었고, 유대인들이었던 만큼 히브리인의 가치관과 신앙교육을 제대로 받은 젊은이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패전국의 볼모 신분으로 승전국의 나라 살림에 도움을 주기 위해 끌려 간 것입니다. 그래서 포로이면서도 승전국의 특별한 대우를 받는 포로였습니다. 이들은 함께 끌려가서 고된 노역을 해야하는 다른 포로들의 부러움을 살만큼 일종의 특권을 가진 포로였지만 거꾸로 이들은 율법대로 살지 못하는 포로 생활에서 오는 말할 수 없는 영적 고통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이들은 유대민족으로서의 삶과 지배국인 바벨론에서의 삶이라는 이중성 속에서 정체성이 혼돈되는 삶을 살아야 하는 다시말하면 몸은 바벨론에 있어도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빌3:20)’는 육신과 영의 삶이 전혀 다른 이중의 삶을 살아야 하는 고통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정체성을 뒤흔들어 놓은 지배국 바벨론의 식민지 동화 정책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그것은 먼저 그들이 이름을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한자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의 이름에는 특별한 뜻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주신 육신을 귀하게 여긴 것처럼 부모가 지은 이름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히브리인들도 한국사람들 이상으로 이름에 대한 애착이 강합니다. 그런데 일본사람들이 내선일치 식민지 정책으로 우리 나라사람들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강압적으로 바꾸게 했던 것처럼, 다니엘과 그 세친구들의 이름도 바벨론 식으로 바꾸게 했습니다. 원래 그들의 이름은 어떤 뜻을 지녔습니까? 이들의 이름은 모두 하나님을 뜻하는 ‘엘’과 ‘야’를 가지고 있어서 ‘다니엘은 ‘하나님은 나의 심판자이시다’, ‘하나냐’는 ‘여호와는 인자하시다’이며 ‘미사엘’은 ‘하나님과 같은 이가 누구신가?’ ‘아사랴’는 ‘여호와는 나의 구원이시다’라는 뜻을 가겼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이름이 식민지 바벨론의 강압으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대신 바벨론의 신앙이 반영된 이름으로 개명되어 다니엘은 ‘바벨론의 만신 벨이 가장 아끼는 왕’인’ 벨드사살’, 하나냐는 ‘악의 권세인 달신’을 가르키는 ‘사드락’으로, 미사엘은 ‘악신과 같은 이가 누구인가’?라는 뜻의 ‘메삭’, 그리고 아사랴는 ‘신들의 종인 느보’, ‘아벳느고’로 바꿔 버렸습니다. 이들의 바뀐 이름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을 조롱하는 패러디인 것을 당장에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창씨개명으로 다니엘과 그 친구들은 당연히 심각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그 혼란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다니엘과 그 친구들이 겪었던 두번째의 정체성의 위기는 바벨론식 교육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교육은 단기적으로는 별반 힘이 없어 보여도 장기적으로는 큰 힘을 작용하는 국가적 요소입니다. 일제 36년 동안 식민지 교육의 효과가 그 얼마나 큰 것이었습니까? 한국의 시골 초등학교 모습이나 일본의 시골 초등학교 모습이나 똑 같습니다. 왜 입니까? 일본 식민지 밑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이 지금의 지식과학부인 문교부의 중요한 자리를 모두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뿐만아니라 일제 36년의 영향이 얼마나 컸던지 광복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국 사회 구석구석에 일제의 잔재가 남아 있습니다.
다니엘과 그 친구들도 바벨론식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3년 과정으로 갈대아 사람들의 학문을 배웠습니다. 아람어 대신 생소한 수메르어와 아카드어를 배웠고, 이런 문자를 배워 바벨론 종교와 관련된 비문을 해석하고 연구했을 것이며, 당시의 중요한 학문이었지만 비 기독교적인 점성술과 주술, 마술 등을 공부하고. 바벨론식 철학을 공부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흠없이 빼어난 유대인이었던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바벨론 왕실이 요구하는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바벨론 학문을 열심히 공부해야 했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고, 율법을 따라 살아야 했던 유대인들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모든 이교의 학문적 과업을 잘 감당해 낼 수 밖에 없었고, 또 어찌보면 그것은 나라가 망하고 적국의 포로가 된 상황에서 그들이 겪어 내야만 하는 일들 이기도 했습니다.

오늘의 교훈은 여기서 시작됩니다. 다니엘의 상황이 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과 비슷합니다. 세상 속에 살아가면서도, 하나님과 자꾸만 멀어지는 철학을 가진 육의 사회를 살아 가면서도,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이나 믿는 사람이나 똑 같은 일을 하고, 믿지않는 사람들과 어깨를 부대끼며 살아가야 하면서도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믿는 이로서의 ‘나’를 지키기로 결심한 이야기가 지금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바벨론식으로 이름도 바꿨습니다. 그리고 이교적 학문도 받아 들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가지 식민지 바벨론의 시도를 점잖게 거부하면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라히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8절의 말씀입니다. 다니엘은 왕이 하사하는 특별한 음식과 포도주가 자신을 더럽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 바벨론은 신의 은총인 곡식이나 풀을 먹고 자란 짐승을 먹을 수 있게 되는 것도 신의 은총이라는 생각 때문에 신에게 제사지내고 난 음식을 먹었고, 또 유대인의 정결법에 어긋나는 돼지고기나 말고기 같은 짐승의 음식를 먹었는데 이를 점잖게 그러나 분명하게 거부한 것이 었습니다.
모름지기 음식 문화는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민족적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이루어지는 생활 문화입니다. 더우기 종교적 차이가 끼친 음식 문화의 이질성으로 유대인으로서 받아 들일 수 없는 바벨론 음식 문제 만큼은 그냥 넘어 갈 수 없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입니다. 바벨론식 음식문화를 받아 들인다는 것은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뿌리부터 뒤흔드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음식을 통해 하나님을 믿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내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사실 아무리 똑똑한 청년들이라지만 지배국에 볼모로 끌려 온 이상 지배국의 명령을 거부하는, 특히 왕이 하사한 음식을 거부한다는 것은 지배국 바벨론의 미움을 받을 수도 있는 당돌한 결정이었음에도 그들은 당당하게 음식을 거부했습니다.

오늘의 교훈은 이렇습니다. 즉, 누구나 신앙생활을 하면서 웬만한 것은 다 양보합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다를 것이지만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는데 결정적으로 필요한 한 두가지 양보해서는 안되는 것까지도 육의 세상에 양보함으로써 더 큰 믿음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더 큰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중요하고 대단해 보여도 그것이 ‘나’와 관련된 일이라면 내려 놓고 버려도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단순해 보여도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의 시작이고, 하나님 나라 일에 방해가 되는 일이라면 양보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나’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다니엘과 그 친구들은 용기를 가지고 내린 결심으로 받은 축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먼저 이방 바벨론 왕궁 고관들에게 다니엘과 그 친구들이 하나님을 대강 믿는 청년들이 아닌 것을 확실히 알게 한 것이고, 하나님은 이들에게 지식을 더하시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셨으며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게 하신 것입니다. 무엇보다 값있는 축복은 하나님이 평가하시는 신앙기준에 합격 도장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 일을 확인하는데 얼마나 긴 시간이 걸렸습니까? 겨우 열흘이었습니다.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있듯이 결정하고 작심한 믿음의 생활을 열흘을 견디지 못해 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우리의 믿음생활을 흔히 보게 됩니다. 그러나 열흘만 견디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안중근의사가 그를 죽게 한 일본사람들에게서 조차 존경받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대의를 위해 목숨까지도 초계같이 버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육의 세상에서 우리 믿는 이들이 지켜야 내야 할 대의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윤리와 가치입니다. 이 시간, 다니엘과 그 친구들처럼 신앙생활에서 내가 버려야 하는 것들은 무엇인지, 또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하나님 보시기에 칭찬받는 믿음을 위하여 지키기로 작정하고 열흘을 견뎌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귀한 시간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충만한 축복을 받는 귀한 우리 모두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오늘도 말씀으로 기도로 하루를 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원하고 바라옵기는 하나님나라의 삶을 위해서 내가 버려야 할 것을 과감히 버리게 하시고, 또 내가 지켜야 할 것은 죽기 살기로 지켜 낼 수있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특별히 버릴 것과 지킬 것이 혼돈되어 뒤바뀌지 않게 성령님 함께하여 주시고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 모두 올바른 믿음의 생활, 하나님 나라를 향한 신앙의 생활로 나아 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믿사옵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Monday, May 17, 2010

이것은 내 몸이요 이 잔은 내 피라 (눅22:19-20)

새들이 떠난 숲은 적막하다고 했습니다. 언젠가는 어차피 독립함으로 헤어져야 할 아이들이지만 지난 20년을 넘게 키운 정이, 한 식구로 같이 살아 온 정이 아이들의 얼굴을 문득 떠 올리게 하고, 또 곁에 두고 부대끼고 싶은 생각이 들게 합니다. 흔히들 이웃사촌이 먼 식구보다는 낫다고들 하는데 정말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기관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교회와 가정입니다. 특히 가정은 하나님이 만드신 작품인 동시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귀한 선물로 모든 행복의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가정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오늘은 가정을 이루게 하는 가족을 생각해 보는 가운데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들의 삶 가운데 계시한 것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으면 다양한 사람들과의 관계로 인한 수많은 일들을 볼 수 있는데 그 가운데는 이웃이기 때문에 벌어질 수 밖에 없는 일들도 있고, 또 가족이기 때문에 생기는 일들도 있습니다.

먼저 이웃이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출애굽기 3장, 호렙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고 40년동안 출애굽 이스라엘 백성을 이끈 모세의 눈물겨운 역할은 우리 모두에게 새삼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수많은 비방과 모반사건을 겪었던 모세, 백성을 위해 중보했던 모세에게 믿음없는 백성들이 던진 돌에 맞아 죽을 뻔한 일이 발생합니다. 이 원망과 반역의 사건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진멸하려고 하셨으나 모세는 다시 하나님께 중보하여 그들의 진멸을 막게 되었지만백성들은 그 죄의 결과로 광야 길을 40년 동안이나 방황하게 되었습니다. 민13:1-14:10의 이야기입니다.

12지파를 대표한 12명의 정탐꾼 가운데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10명의 정탐꾼들이 가나안 땅에서 본 신장이 장대한 네피림의 후손 아낙 자손을 거론하며 가나안 땅을 악평하자 백성들이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울며 불며 난리 치며 모세를 돌로 치려하였습니다. 지금 가나안 초입에 당도하기까지 백성들은 바로에게 내렸던10가지 재앙, 홍해사건, 마라의 쓴 물 사건, 만나와 메추라기 사건 등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보이신 기적, 그리고 백성을 위한 모세의 눈물어린 수없는 중보를 보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정탐꾼들의 보고를 듣자 마자 앞의 일들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모세를 돌로 쳐죽이겠다고 저 난리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웃입니다.

다윗은 또 어떻습니까?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 다윗만큼 회자되는 인물도 없습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백성들의 이 노래 하나 때문에 장인인 사울에게 쫓겨 원치않는 광야를 헤매게 된 다윗이 아둘람 굴에 있을 때 그 소문을 듣고 한 사람 두사람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4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여 들어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소위 아둘람공동체라 말합니다.
‘환난 당한 모든 자 ,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삼상22:2) 다윗은 자연스럽게 우두머리가 되었으며, 그 400명은 위대한 다윗 왕국을 이루어 내는 일등 공신들이 되었습니다. 쫓기고 원통한 일 당한 사람들 중에서 군대 장관이 나오고 대제사장이 나왔습니다. 다윗의 충신들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왕국을 이룬 일군들이 다 아둘람 공동체에서 나온 것입니다. 아둘람공동체는 비참한 광야의 삶을 살았지만 비전을 가진 공동체로 언급되고 있는데 이 공동체를 이끌던 다윗도 사람들에게 돌에 맞아 죽을 뻔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전투에 참가했다가 블레셋 방백들에 의해 배척을 받은 다윗과 다윗의 용사가 그들의 거처 시글락으로 돌아오니 시글락은 아말렉의 침공으로 이미 불탔고, 다윗 용사들의 아내와 자녀들은 사로잡혀갔습니다. 이에 다윗과 백성들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 높여 울었는데 이 때 백성들이 마음의 슬픔을 억제하지 못해 다윗을 돌로 치려 하였습니다. 얼마나 처지가 급하고 한심했는지 다윗이 군급했다고 했습니다.

모세가 누구고, 다윗이 누굽니까? 백성들을 위해 울고, 백성들을 위해 몸바쳤고,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께 밤낮으로 기도한 우리들의 영웅이지만 지금 벌어지는 일이 지난 일을 새까맣게 잊게 합니다. 아무리 상황이 어렵다고한들 어떻게 돌로 쳐 죽이려 합니까? 이게 이웃의 한계입니다. 지난 일은 관계 없습니다. 지금 벌어진 일만 가지고 판단하고 대접하는 것이 바로 세상인심입니다.

이번에는 가족이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일들을 보려고 합니다. 그돌라오멜왕과 그 동맹이 소돔과 고모라땅을 침략했습니다. 이 때 롯의 재물이 빼앗기고 롯의 일가가 사로잡혀 갔습니다. 롯이 누구입니까? 롯은 하란의 아들로 데라의 손자이자 아브람, 곧 아브라함의 조카였습니다. 롯과 아브라함의 소유가 많아져 함께 할 수 없게 되자 아브라함이 동이건 서이건 ‘네 좋은대로 땅을 택해 떠나라’고 하자 아직 여호와의 동산같고 애굽 땅 같던 소돔과 고모라 땅이 들어 있던 요단 들을 보고는 한마디도 작은 아버지인 아브람의 생각은 물어 보지도 않은 채 냉큼 그 쪽으로 식솔들을 몰아 떠나 갔습니다. 참으로 싹수없는 위인이었습니다.
그랬던 롯이 그돌라오멜왕과 그 동맹군이 소돔과 고모라 땅을 침략했을 때 모든 재물을 빼앗기고 그의 식솔 모두가 사로잡혀 갔습니다. (창14:11-12) 이 소식을 들은 아브람은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자 318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단숨에 쫓아갔고, 밤을 타서 그들을 쳐서 물리치고는 빼았겼던 재물과 조카 롯과 가솔들을 다 찾아 왔습니다.
무엇이 아브람을 움직였습니까? 바로 피붙이의 정입니다. 아브람인들 조카 롯에 대해 괘씸한 마음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그 괘씸한 마음이 문제가 될 수 없었습니다. 피붙이인 조카, 그 식솔들을 구하는 것이 제일 급한 일이었습니다. 그 일이 조카 롯에 대한 모든 감정을 덮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가족이고, 가족의 정입이다.

유다 땅에 심한 기근이 들자 인근 이방 땅 모압으로 잠시 피난하여 집을 떠났던 엘리멜렉 일가가 패가 직전에 이르렀습니다.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그 두 아들마저 이방 땅에서 죽어버렸습니다. 이에 시어미 나오미가 두 자부에게 각각 본가로 돌아가라 권고했습니다.(룻1:7) 룻의 동서인 오르바는 시어미의 말대로 본가로 갔지만 룻은 자신의 결심을 말합니다.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라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룻1:16-17) 왜 그랬습니까? 잠시나마 부부로 산 그 정때문에, 그 남편을 낳고 기른 시어미에 대한 가족으로서의 정때문에 그렇게 했습니다. 다행인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나오미 가정에 있었기에 보아스를 만났고 그 가계를 통해서 예수가 탄생되는 영광이 그 가문에 있었습니다.

육신의 옷을 입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오셨던 예수는 이 사실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데 있어서는 모든 일꾼들이 ‘이웃’으로는 부족하고 그 대신 ‘가족’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는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이적과 표적을 보이셨는데 그 처음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든 사건입니다. 혼인잔치가 무엇입니까? 혼인잔치는 서로 남남이었던 남녀를 한 몸으로 이루게 하고, 한 가정을 이루게 하는 예식입니다. 예수와 성도가 부부가 되어야 하는 것을 보여 줍니다. 신랑은 예수요, 성도는 바로 신부입니다. 이후에도 예수는 여러차례 믿는 자들의 관계가 가족의 관계가 되어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모친과 동생이 당신께 말하려고 왔다’고 했을 때(마12:49) 예수는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마12:50)고 하셨습니다. 울타리가 짓는 한계를 뛰어 넘는 말씀이었습니다.
육신으로 맺어진 가족의 한계를 넘어 보편적 범주로 가족의 한계를 더욱 확장시킨 말씀은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신 채 하신 말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요19:26-27) 제자들은 어머니를 극진히 모셨을 것이고, 어머니 또한 제자들을 배 아파 낳은 자식 이상으로 지극한 정성으로 사랑하셨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는 믿는 이들의 관계를 끊임없이 가정 속으로, 그리고 가족의 관계 속으로 몰아 가고 계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우리가 성찬 예식에 자주 듣고 보는 말씀입니다. ‘ 이것은 내 살이요 이 잔은 내 피라' 살과 피는 바로 가족을 가족되게 하고, 그 가족들로 하여금 가정으로 머물게 하는 근본이고 힘입니다. 예수의 살을 나누고, 예수의 피를 나눈 믿는 이들은 비록 육적으로는 남남이지만 영적으로는 가족으로, 가정으로 살아야 하는 존재들임을 눈으로 보게 하시며 주신 말씀이 바로 오늘의 말씀입니다.
마지막 고것 하나 때문에 손가락질하고 정죄하는 이웃이 아니라 마지막 고것 하나 때문에 지나간 모든 것이 잊혀지고 덮어지는 가족으로 살아야 합니다. 서로가 너무나 가까운 존재여서 나도 모르게 문득 문득 생각나는 존재들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너와 나 사이에 쌓은 미운정, 고운정이 그렇게 만듭니다.

사랑은 외모로 말로 몸짓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지만 정은 조용히 저 깊은 땅이 지닌 열처럼 나도 모르게 마음의 맨 밑바닥에서 타오르는 것입니다. 백년해로하는 부부는 깝작거리는 사랑이 아니라 겉으로는 얼음장같지만 그 밑으로는 언제나 영상 4도의 물이 흐르는 것처럼 미지근하고도 은근한 정으로 사는 것입니다.
가정의 달을 맞아 다시한번 우리의 가정을 돌아보고 가족으로서의 우리 교회를 더듬어 보는 귀한 시간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감사합니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시고 우리를 동물처럼 떼로 살지 않고 가족으로 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사람마다 가정을 일구고 가정을 통해서 행복을 꿈꾸지만 많은 가정들이, 그리고 교회를 포함하여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공동체는 어느 것이건 조금 부족한 2%때문에 고통하고 갈등합니다.
원하고 바라옵기는 우리의 가정이, 우리의 공동체가 더 큰 사랑과 정으로 조금 부족한 2%가 채워 지게 하시고, 조금 부족한 것 때문에 생기는 모든 고통과 갈등이 덮어지게 하시고 녹아지게 하시옵소서. 사랑의 계절 5월에 우리의 가정을 다시 한번 생각하고, 우리의 교회를 다시한번 돌아보는 귀한 시간들을 허락하시옵소서.
믿사옵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Tuesday, May 4, 2010

네 자신을 확증하라 (고후13:4-5)



한국의 한 여성이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기도했는데 수면제가 가짜라서 죽지 않고 살아 났다는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를 일이고,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일입니다.
친구 포레스터 부인의 가짜 진주목걸이를 빌렸다 잃어버려 그것을 되갚느라 10년을 죽을 고생한 로와젤 부인의 이야기를 아십니까? 모파상의 목걸이라는 단편소설이야기입니다.

그래도 그 때는 애교가 있었습니다. 자존심이 상하기는 해도 있는 사람에게 가서 처지를 말하고 빌려서 치장하는 애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빌릴 필요가 없습니다. 눈 딱깜고 하나 사면 됩니다. 짝퉁하나면 아쉬운대로 ok입니다. 남은 몰라도 나는 안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입니다. 짝퉁이 있다는 것은 어딘가에 진품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마음 속에서 조용히 화가 나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인 것입니다.

짝퉁이란 말은 2004년부터 국어사전에 올라 갈 만큼 우리 사회에 일반화되었고, 보편화 된 용어가 되었습니다. 어찌되었거나 짝퉁이란 말은 사이비, 곧 진짜처럼 보이는 가짜란 말입니다. 사이비(似而非)란 말은 맹자의 진심장구 하편(盡心章句 下篇)에 나오는데 이곳에서 공자가 향원이라는 사람을 싫어했고, 그 이유가 향원이 사이비 학자였다는 것에서 그 출처를 찾을 수 있습니다.
짝퉁이 있다는 말은 진짜 명품이 있다는 말로 기술이 하도 좋아 진짜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잘 만들었거니와 명품인 진짜의 값이 너무도 비싸기 때문에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찾게 되는 것이 짝퉁입니다. ‘사이비’라는 단어나 ‘가짜’라는 단어보다는 법률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덜 문제가 되는듯 보여 쉽게 사용되는 용어이기도 한 것입니다.

짝퉁의 심리학은 어디까지나 욕심에 있다고 진단 합니다. 모자라면 모자라는 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하면 그 자체로서 극상품은 아닐지라도 가짜는 아닌 진짜인 법인데 욕심으로 그것을 꾸미고 변조하려는 마음을 먹는 순간부터 뱁새가 황새 쫓아가려다 가랑이 찢어지는 비극이 시작되는 것이라는 지적인 것입니다. 성경은 욕심 때문에 짝퉁 찾다가 빠지는 비극을 간단히 경고합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는다’ 약1:5의 말씀인데 짝퉁은 물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논문, 학력, 경력, 각종 집회, 설교, 인격에 이르기까지 온통 짝퉁이 곳곳에 드러나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어서 짝퉁의 천국 중국 상하이 시장은 ‘사람빼고 모두다 짝퉁이있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오늘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한 말은 고린도 교인들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인하라는 말, 다시말하면 그들이 진품인지 아니면 짝퉁인지를 확인하라는 뼈아픈 충고의 지적입니다. 당시 거짓 사도들로 인하여 여거 가지 어려운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데 대하여 바울은 조만간 고린도 교회룰 방문하게 되는 때에 교회의 지도자로서 그 불미스러운 일들을 짚고 넘어갈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을 자신을 사적 감정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 안에 있는 두세 사람의 증인들과 함께 처리할 것임을 말하면서 고린도 교회 안에 벌어지고 있는 모든 문제들이 너나 할 것 없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죄악으로 벌어진 불미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오늘의 현실을 두고 누가 누구를 손가락질하며 파당을 지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돌아 보아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올바로 확인할 것을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본문 속에서 고린도 교회가 처한 문제의 해결점을 다른 데서 찾을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찾을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신 삶이기 때문에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행한 것과 똑 같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자가 온전히 하나님이신 예수 안에 있을 때 본인 뿐만 아니라 공동체로서 교회를 둘러싼 모든 문제를 풀어가기 위한 해결점을 찾을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모든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능력을 온전히 믿는 믿음, 예수 안에서 경험하는 체험의 신앙을 가진 성도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가지고 있는가를 먼저 확인하라는 말입니다.

앞서 공자가 향원이라는 짝퉁 학자를 싫어했던 것처럼 예수님도 짝퉁을 싫어하셨습니다. 예수는 마13:24-30에서 가라지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추수 때에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성경에서 보는 짝퉁의 원조는 사탄, 곧 마귀입니다. 사탄이 짝퉁인 것은 사탄이 거짓의 아비로서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기 때문인데(고후11:14, 요8:44), 예수가 이땅에 오신 목적은 바로 이 짝퉁 사탄의 일을 멸하러 오신 것이기도 합니다. (요일3:8)

성경을 보면 여러가지 짝퉁이 등장합니다. 요일 4:1에는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라고 하여 거짓 선지자, 고후 11:13에는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거짓 사도’, 마7:15에는 ‘노략질하는 거짓 예언자’, 벧후2:1에는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거짓 선생’이 나옵니다. 또 마24:24에는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게하는 거짓 메시야’가 그리고 갈 2:4에는 ‘가만히 들어와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하는 거짓 형제들’이 나옵니다.

오늘날과 같은 마지막 시대 끝자락의 때에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은사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영분별의 은사입니다. 오늘의 시대는 구약의 사사시대와 같은 혼란의 시대, 무질서의 시대, 불신과 배신과 반목의 시대, 곳곳에 거짓이 판을 치는 시대, 마구잡이가 범람하는 시대입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조차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분별하기가 무척 어려운 시대가 바로 오늘의 시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믿는 성삼위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따라 대장되시는 예수님을 따라 마귀를 대적하는 길에 모두 함께 나서야 합니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4:7)고 성경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선진국이라고 해서 짝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도를 넘거나 사회문제가 될 만큼 심한것이 아닙니다. 온통 짝퉁이 난무하는 현상은 대체로 후진국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입니다. 진정한 명품은 사물자체가 자기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가치이자 실질적인 사용가치를 웃도는 아우라를 지닌 물건을 일컫는 말입니다. 오래 숙성된 브랜드의 이념 속에서 세대를 뛰어 넘어 자신만의 향기와 가치를 일관되게 갖는 물건입니다. 값만 비싸서 명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대물림 할 수 있는 질이 보증되고, 쓰면 쓸수록 빛를 발하는 것, 그리고 쓰는 사람에 의해서 만든 사람의 마음이 이해되는 하나의 예술품, 그것이 바로 명품입니다. 이것이 명품에 대한 정의라고 할 때 예수님은 제자인 동시에 성도인 우리가 이 땅의 명품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당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너희 빛을 사람앞에 비취게 하여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5:16말씀입니다.

믿음의 공동체를 살다 보면 조용히 자신의 자리에서 드러나지 않게 헌신하며, 믿음의 형제들을 굳게 세우며, 자신의 이름대신 하늘의 소망을 쌓아가는 명품 성도를 가끔 만날 수 있어서 험한 세상에서 큰 위로와 힘을 얻을 때가 있는 반며 저마다 큰 목소리로 세리의 기를 죽이던 바리새인이나 서기관과 같은 이중인격을 지닌 짝퉁성도들 때문에 마음으로 한없이 낙담되어 속으로 한없이 되새김의 소리를 지르곤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개인적으로 고난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개인적으로 부흥을 사모하여 간구합니까? 그 때 우리는 자신을 조용히 돌아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쫓는 믿음 안에서 굳게 서 있는지 자신을 확증해 보아야 합니다. 공동체로서 교회가 부흥하기르 소원한다면 교회가 명품 공동체로서 믿지 않는 이들에게 빛을 발하는 사명을 감당하며 살고 있는지 확증해 보여야 합니다.

명품을 요란스럽게 광고하지 않습니다. 명품의 상표는 되도록 작게 표시해서 잘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명품 그리스도인은 나대지 않습니다. 조용합니다. 그래도 아는 사람은 다 압니다. ‘반짝이는 것은이 다 금이 아니듯’ 예수 믿는다고 다 명품 그리스도인이 아닌 현실 속에서 ‘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주기도문의 마지막 구절로 말씀을 맺습니다.

Tuesday, April 20, 2010

제비가 돌아 왔습니다



문득 끝머리에 꽈리 깨무는 새소리가 들린다 싶어 고개를 들어 보니 제비가 돌아 와서 전기줄에 앉아 울고 있었습니다. 반가웠습니다. 제비가 반가운 것은 제비가 해충을 잡아 먹는 익조로 알려져있기도 하거니와 또한 흥부놀부의 정서가 우리 몸에 배인 탓이겠지요.

‘이상기후로 겨울이 덥다, 비가 예년보다 많이 온다. 꽃샘추위가 왔다 ‘ 어쩐다 하여 말들이 많았지만 이처럼 제비는 돌아 올 때가 되어 돌아 온 것입니다.
길 바닥이 온통 고추씨를 흩어 놓은 것 같길래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피니 역시 모르는 사이에 감람나무들이 온통 눈을 맞은 듯 하얗게 새봄의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흔히들 시간을 크로노스의 시간과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나누어 말합니다. 단순히 현재의 시간만을 말해 주는 보다 덜 의미있는 시간을 크로노스의 시간이라 말하고, 정해진 인생의 어디 쯤에 있는가?와 같이 조금더 의미가 있는 때를 카이로스의 때라고 말합니다.
날씨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들을 많이 하지만 세상은 하나님이 정하신 그 때에 맞춰 돌아 가고 있음을 금년에도 어김없이 때가 되어 돌아 온 제비를 통해서, 그리고 또 때가 되어 하얗게 꽃을 피운 감람나무를 통해서 알 수 있었습니다. 제비나 감람나무나 사람들이나 금년 한해도 또 하나님이 정하신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가 계신 것일까?라고 불신앙의 생각을 가끔은 하게도 되지만 세상이 아무리 어수선해도, 그래서 사는 것이 버거워도 하나님은 이미 내 마음 깊숙히 들어 와 계심을 우리가 깨닫지 못할 뿐인 것입니다.
내 안에 이미 들어와 계신 하나님을 깨달을 때 우리는 좀 더 가벼워진 어깨로 살 수 있을 줄 압니다.

Monday, April 19, 2010

어느 쪽이 맞을까!


오래된 화재비상벨을 감싼 그물망 안에 작은 새가 둥지를 틀었다. 이 둥지는 그물망 안에 갇힌 것일까? 아니면 안전하게 그물망의 보호를 받고 있는 것일까?

Friday, April 16, 2010

밤이 맟도록 수고하였으나 (눅5:3-10)


모든 일에는 언제나 출발점이 있는 것처럼 진리 탐구에도 출발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진리 탐구에서는 시간이 출발점이 되기도 하고, 내놓을 만한 가정이 출발점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은 진리탐구의 시작점으로부터 성숙되어 가는 과정을 묵상하는 가운데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신약성경에는 열두사도들의 명단이 네군데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10장, 마가복음 3장, 누가복음 6장, 그리고 사도행전 1장입니다. 이곳에 나오는 사도들의 명단들에서 맨처음 등장하는 이름은 언제나 베드로이고, 베드로는 열두제자 무리의 리더이면서 대변인 격으로 두드러진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시몬 베드로의 직업은 원래 어부였습니다. 형제인 안드레와 함께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한 어업을 가업으로 물려 받았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베드로인 시몬이 예수님의 공식적인 제자가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상황입니다. 사실 오늘 이전에도 시몬은 예수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대화한 적도 있었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말을 들은 적도 있었습니다.(마4:18-22, 막1:16-20) 예수님이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는 것도 보았고, 심지어 시몬의 가족이 예수님의 자비와 권능으로 혜택을 입은 적도 있었습니다.(4:38-41) 그런데도 지금까지 시몬이 보고 들은 예수님의 모든 것들은 나와는 별반 상관이 없는 일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날은 상황이 달랐습니다. 고기잡이로 잔뼈가 굵은 이 노련한 어부인 시몬이 고기를 한마리도 잡지 못한 때가 그 날이 처음은 아니 었을 텐데도 그날처럼 밤이 맟도록 수고하고, 빈 그물로 돌아 와 그물을 씻고 이제 빈 손으로 집에 돌아가야 하는 마당에 느끼게 되는 허전한 마음이 아마도 그 날 만큼은 특별하게 새로웠나 봅니다. 그래서 시몬은 말합니다.’밤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수고하여 이미 잡은 고기가 많았는데도 예수의 말씀을 듣고 그물을 내렸겠습니까? 그 빈 그물이 앞으로 시몬을 베드로로 변화하게 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면 누구나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삽니다. 그러나 수고하며 애쓰는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다는 지금의 자기 인식이 바로 신앙의 삶을 향한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애쓰며 살았고, 그 결과 이만큼 지니고 살게 되었다는 자신감이 내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내 목에 힘이 들어 가 사람들을 내려다 보는 한 아직도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기에는 이릅니다. 한시라도 빨리 “밤이 맟도록 수고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다”고 올바르게 내 자신의 현실을 인식해야 합니다.그리고 그것은 바로 축복의 시작점이 됩니다.

고기잡는 일과는 관계가 멀었던 예수님의 말대로 물에 씻어 정리했던 그물을 깊은데로 다시 내린 시몬은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에운 그물을 다른 어부들의 힘을 빌어 겨우 끌어 올릴 수 있었습니다. 눅5:5에서 예수를 “선생”으로 불렀던 시몬이 5:8에서는 예수를 “주”라고 부르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환상을 보았을 때 그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6:5)라고 한 것처럼 시몬은 지금 자신의 죄와 무가치성을 깨닫데 되었습니다. 시몬은 지금껏 사람들이 병에서 고침을 받는 것을 직접 목격하기도 하였고, 예수의 가르침을 들은 적도 있었지만 그것들은 모두 아직은 강건너 김첨지네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그날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고기를 잡게 하신 그 사건을 통해서 시몬은 예수에 대한 환상을 보는 것도 아니고, 예수에 대한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아니고,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시몬은 무릎 꿇고 엎드려 말합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예수님의 정체성과 그로 인해 그 분 안에 계시는 거룩함을 깨달았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곧바로 회개하는 일입니다.. 회개는 무엇입니까? 회개는 생각이 변화하는 경험입니다. 지금까지의 나에 대한 생각이 바뀌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나는 대단한 존재인듯 살아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존재에 대한 정체성을 깨닫는 순간 나는 죄인일 뿐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깨닫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시몬의 회개의 마음을 보신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눅5:1)) 그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좇게 되었고, 시몬도 공식적인 예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올바른 자기 인식이 마라톤의 출발점에 서는 일이라면 회개는 바로 마라톤의 첫발을 내어 딛는것, 올바른 신앙생활의 시작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의 활동을 선지자의 활동이나 엘리야가 와서 활동하는 것으로 오해했습니다. 이 때 예수가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사람들이 내게 대해서 이러구러 말하는 것은 접어두고)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16:13)) 이 질문에 단연 성질급한 베드로가 예수의 존재성에 대해 명답 중의 명답을 말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되 예수를 무엇으로 알고 믿느냐는 것은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앞서 말한대로 내 자신의 현실을 바로 인식하는 때가 진리탐구에 있어서 시간적 출발점이 된다면 이제 예수를 그리스도로,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는 것은 진리탐구를 위한 올바른 가정과 전제의 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인것을 입술로 고백한 자는 새로운 존재로 거듭납니다. 이를 두고 바울은 고후5:17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 거듭난 새로운 존재입니다. 그리스도와 영적인 교제를 갖게 되므로 인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창조행위가 일어나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육의 몸을 입고 동일한 육의 세계를 살므로 언제나 육체의 욕망과 죄에 굴복당 할 가능성을 안고 살아도 지금까지와는 달리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 세계에 대하여 새로운 관계 속에서 살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그리스도를 핍박하였으나 이제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고, 과거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를 인정했으나 지금은 오직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만이 있다고 생각하는 삶을 살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존재가 나아가야 할 곳이 어디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엡4:13이 말씀하십니다. “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믿는 이들의 최종 목적지는 예수그리스도를 온전히 닮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유년기를 벗어나 영적으로 성숙한 인간으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안에, 그리고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과 능력을 채워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무것도 아니었던 한 인간, 고기잡이 베드로가 예수를 믿고, 그의 제자가 되어 그의 믿음을 완성시켜 나아갔던 길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바로 우리들이 지금 걸어 가고 있고, 또 앞으로도 걸어 가야 할 길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모두 다 밤이 맟도록 수고하고 이 자리에 있습니다. 모두 다 우리의 손을 들여다 보십시다. 그 손으로 지금껏 무엇을 이루었습니까? 밤이 맟도록, 이 나이가 들도록 수고하고 애썼는데 무엇이 우리 손 안에 남아있습니까? 허망할 뿐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세상 인생이 헛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에겐 희망이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새로운 피조물로 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우리가 밤이 맟도록 수고한 우리 손에 아무 것도 남겨주지 않아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충만을 약속하십니다. 이 땅에서도 충만된 삶을 살게 하시고, 저 세상에서는 더욱 확실하게 만물이 통일된 세상을 살게 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 증표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날마다 성령님을 바라보고 살고 말씀을 붙들고 살 수 있으니 그저 감사 할 뿐입니다. 다만 지금 나의 존재론적 현실을 올바로 깨닫는 그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때입니다.
다시한번 나를 올바로 깨닫는 귀한 은혜가 이 아침에 있으시기를 소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오늘도 먼저 예배드리는 시간으로 하루를 시작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지금껏 내 손으로 무언가를 이루며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이룬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빈마음이 바로 나로 하여금 은혜 받기에 합당한 시간이 되는 줄을 믿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사는 것이 참으로 버겁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여 주심으로 인하여 큰 힘을 얻어 승리하는 삶을 사는 오늘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믿사옵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Monday, April 12, 2010

잡초에게 배우는 교훈


White clover. Plantain, Chickweed, Spruge. Dandelion, etc. 제초제를 담은 포장부대에 인쇄되어 있는 잡초의 이름들이다. 입맛을 돋구어 준다해서 마켙에서 한 묶음에 1,50$이 넘는 가격에 팔리는 민들레도 잔디를 키우는데는 영락없이 잔디로 취급되어 제초의 대상이 된다.
간만에 작년 년말에 비가 많이 왔고, 금년들어서도 심심치 않게 내려주는 비때문에 가뭄에는 큰 도음이 되고 있지만 잔디를 가꾸고 키우는 일에는 잔디와 더불어 맹렬하게 자라는 잡초 때문에 부가적인 일이 만만치가 않다.

그러나 사실 사람들의 눈에 잡초이지 하나님께서 다 이유가 있어서 자라게 하신 잡초의 입장에서 보면 제초제를 맞고 죽어가야 하는 잡초 처지는 그만 처절할 뿐이다. 잡초의 생태를 바라보노라면 신앙의 길을 걷는 개인이나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생각해 볼 만한 교훈이 있어 함께 나누고자 한다.
첫째, 끼리끼리 모여서 산다. 민들레는 민들레끼리 클로버는 클로버끼리 모여서 산다. 아마도 종족번식의 방법이 더 용이해서 그런지 몰라도 끼리 끼리 모여서 번성하는 것을 본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끼리, 내 수준에 맞는 사람들 끼리만 가까워지는 것이 교회에는 없는지! 그래서 교회 안에서 오히려 더 외로운 존재는 없는지 … 반면에 주변의 좋은 신앙의 모델 그룹에 섞이면 올바르게 신앙의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을런지를 생각해 보기도 한다.

둘째, 비가 오고 난 후를 보면 잔디가 자라는 속도보다 잡초가 자라는 속도가 훨씬 빠르다. 뽑히기도 잘하고, 쓰러지기도 잘하지만 그 자라는 속도는 참으로 빠르다. 그래서 조금만 마음으로 놓으면 천지가 잡초로 변해 속수 무책이 된다. 그래서 잡초는 매일 조금씩 뽑아야 한다.

셋째, 죽기 살기로 자란다. 분재는 살기 힘든 토양에 더하여 물주기등을 식물이 살기 어렵게 만들어 인위적으로 자람을 더디게 만들어 즐기는 식물가꾸기이다. 잡초도 자꾸 깎으면 분재같은 현상이 발생한다. 식물이란 나름대로 뿌리를 내려 자라고 열매를 맺고 씨를 맺어야 할 터인데 자꾸 깎아 주다 보면 분재처럼 키가 한없이 작은데도 꽃을 피우고 씨를 맺는다. 한마디로 죽기 살기로 자란다.

두번째와 세번째 잡초의 특성을 보면서 신앙의 삶이란 늘 깨어 경성해야 하는 것임을 배운다.
흔히들 인생을 잡초에 비유한다. 당연히 교회 내에도 잡초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다만 많고 적음의 차이만 있을 뿐… 이들 잡초를 다 뽑아내고 난 후의 교회는 어떤 모습일까? 뽑는다고 다 뽑을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잡초가 다 뽑힌 교회만이 정말 에덴 동산처럼 아름다운 모습일까? 내 안에서 끊임없이 자라오르는 신앙의 잡초는 또 어찌해야 하는가? 생각이 복잡해 진다.
밖에 자라는 잡초는 호미로 솎아내고 제초제로 그 생명을 끊어 없애도 내 안에 자라는 잡초는 어찌하지 못해 늘 답답할 뿐이다.

종족보존과 확산을 위해 식탁에 올리는 곡물도 옛날에는 잡초의 하나였는데 인간이 그 중 쓸모있는 점만 택해 개발한 것이 작물이자 곡물이고, 인간의 관리에서 벗어나 버려진 듯 막 자란 것이 잡초이듯 잡초같은 인생이라도 하나님의 관리의 손길 안에만 들면 쓰임받는 존재로 일순간에 바뀔수 있는 것이 지금의 잡초같은 나의 인생이 아닐런지!

하나님께서는 잡초나 잔디나 똑같이 사랑하신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Monday, April 5, 2010

내 영혼아 내 주를 찬양하라! (엡1:3-14)

무엇인가가 채워지지 않은 상태를 ‘허전함’이라고 말합니다. 한 끼 식사를 거르면 허전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정도는 다르지만 모두 허전함 속에서 삽니다. 부모와 자식 지간이, 아내와 남편지간이. 선생과 학생지간이 허전합니다. 심지어는 교회생활에서 조차 허전함을 느낍니다.
배속이 허전하면 음식을 먹으면 될 일이지만 마음이 허전하면 무엇으로 채울 수 있습니까? 마음의 허전함이 오래 계속되면 살아 온 인생이 억울하고 그래서 인생이 허무해 집니다. 반대로 곽 채워진 상태는 어떠합니까? 배고픈 갓난아이가 제 양껏 젖먹고 트름하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대견합니까? 보는 부모가 대견할진데 본인이야 얼마나 충만하겠습니까?

부족하면 허전함을 느끼게 되고 사람들은 그 허전함을 다른 무엇으로 채우려고 듭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 만큼 열심히 일에 몰두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 허전함을 술로, 마약으로, 도박으로 채우려 듭니다. 사람이 무엇인가에 집착하게 된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마음에 구멍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이도 저도 안되 자살로 인생을 마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연전에 탤런트 최진실이 자살로 세상을 떳고, 며칠 전에는 그 동생 진영이 자살로 세상을 떳습니다.
원문성경에서 폭포수가 쏟아져 내리듯 ‘찬송하리로다’라는 말을 시작으로 사도바울이 한문장으로 쏟아 부은 본문이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오늘은 바울이 찬양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로 본문을 묵상하는 가운데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엡1:3) 사도 바울이 이렇게 찬송으로 감사 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늘 아버지께서 신령한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영혼 구석 구석을 신령한 복이 주는 충만함으로 채우고 있음을 순간 순간마다 확인하며 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모든 신령한 복’을 다 받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모든’은 모든 종류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있는 모든 종류의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다 주셨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 원하는 복은 하늘의 신령한 복이라는 사실입니다. 성도가 받는 신령한 복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께 속한 복을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입니다.
하늘의 신령한 복은 이 땅에서 사는데 필요한 물질적인 축복은 좀 부족해도 나로 하여금 평안가운데 풍성하게 살게 하는 복입니다. 하늘의 신령한 복은 고픈 배를 라면 한 그릇으로 때울 수 있는 것과 같은 말초적인 복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은 구체적으로 어떤 복입니까? 사도 바울은 그 복을 4절로 14절에서 길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선택의 축복입니다. 그것은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신’것입니다.(엡1:4a)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의 모든 것을 아시는 지식과 판단으로 ‘나’와 ‘여러분’모두를 개별적으로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일방적으로 저와 여러분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부정하고 악한 우리를 택하시고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흠없는 존재로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몸으로 마음으로 알았으므로 그 받은 복에 감격하면서 ‘찬송하리로다’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은 양자됨의 축복입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성도가 받은 두번째의 복은 바로 수양의 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로 입양되었다는 것은 본래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음이 전제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신분의 존재였습니까? 우리는 본래 불순종의 아들이었으며,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하시려는 계획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실현하셨고,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누리시는 아들의 권리를 똑 같이 받아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어느날 갑자기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 오셔서 죄의 종된 신분에서 우리를 불러 내셔서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 주신 복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 나기도 전에 우리의 부족함을 아시고 그것을 보셨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미리 작정하시고, 때가 되어 태어 나게 하시고, 또 때가 됨에 그 누군가를 통해 목음을 들어 받아 들이게 하시므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바울은 이 복을 인하여 하나님께 찬송하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세번째 신령한 복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주신 ‘구속’과 ‘죄사함’의 복입니다.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 그리고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음을 아는 사람은 죄사함을 받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가를 알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다윗의 시편을 인용하면서 죄사함 받은 사람의 행복을 노래합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는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롬4:7-8, 시32:1-2) 그리고 바울은 본문 7절의 말씀을 통해 죄사함 받은 감격을 밝히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성자 예수님에 의한 구속과 죄사함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이루어 졌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에 압도 당한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네번째 신령한 복은 하나님께서 하늘의 비밀을 성도인 우리에게 알려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비밀을 알려 줄 시기와 방법을 신중히 결정하셨고, 알려 줄만한 대상을 지혜롭게 선택하셨는데 그 대상이 성도의 무리이고, 그 무리 가운데 저와 여러분이 포함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려 주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특별한 존재로 대우하시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에게는 큰 복이 되는 것입니다.
12절로 14절을 보면 ‘우리’와 ‘너희’ 그리고 또다시 ‘우리’가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2절의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소망을 가진 우리’에서 ‘우리’는 이방인들보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유대인 성도들 입니다. 13절의 ‘그 안에서 너희도’의 ‘너희’는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유대인 백성과 동일하게 구원받은 이방인들입니다. 13절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려는 것은 유대인 성도들과 이방인 성도들이 함께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 되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과거 내가 어떤 신분의 사람이었든지. 가진 자든지 못가진 자이든지. 배운 자이든지 못 배운 자이든지 하나님에 의해 택함을 받아 성도의 무리 가운데 들어 가게 된 것, 같은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 믿음의 공동체에 속함으로 이루어 진 것, 이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이처럼 믿음 때문에 생겨진 공동체입니다.

14절에서 바울은 ‘우리의 기업’을 말합니다. 바울은 기업이라는 말을 통해서 하늘의 신령한 복을 다시 한번 정리하고 있습니다. ‘우리 기업’은 유대인 성도들과 이방인 성도들이 동일하게 받아 누리게 될 기업입니다. 그리고 기업은 바로 신령한 복입니다. 베드로는 벧전 1:3-4에서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이처럼 기업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 하신 것으로 모든 신령한 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인치심을 통해서 백성들이 자기 소유임을 주장하시고 앞으로 천국에서 누릴 영광스러운 생명과 모든 복들이 머리 속에서나 그려보는 환상이 아니라 실재적인 것임을 보증하시고, 또 성령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지금 이 땅에서 하늘에 속한 영광스러운 생명과 복을 미리 맛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이 모든 것을 하니님이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힘을 주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땅의 삶이 갈수록 힘이 듭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 본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보물의 가치, 신령한 복의 가치를 깨닫게 되면 이 세상의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의 육적인 삶이 우리를 둘러싼 환경과 조건 속에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어도 신령한 복들로 인해 사도 바울처럼 찬송하며, 감격하며 소망을 가지고 살아 갈 수 있을 줄을 믿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소원이십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부활절이 뒤에 맞는 첫 아침, 하나님이 주신 신령한 복의 의미를 다시 한번 깨닫는 귀한 은혜가 있으시기를 소원합니다 누군가 꾀꼬리의 울음 소리는 귀로 들어도 뻐꾸기의 울음소리는 가슴으로 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소리는 귀로 들어도 하나님이 주시는 영혼을 살리는 복음의 소리는 가슴으로 들을 수 있어야 은혜가 됩니다. 그래서 지난 날의 아련한 은혜 때문이 아니라 하늘의 신령한 복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하신 이 아침의 은혜 때문에 가슴이 벅차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며 사는 우리 모두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마치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Thursday, April 1, 2010

비둘기 수난


그 여인의 힘이 어린 양에 미치지 못하거든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새끼 둘을 가져다가 하나는 번제물로 하나는 속죄 제물로 삼을 것이요…(레12:8)
이처럼 비둘기는 없는 사람들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켜 줄 수 있는 희생제물감으로 손색이 없었습니다.

굳이 성경을 말하지 않아도 바둘기는 역사적으로 쓸모가 많았습니다. 어린 비둘기의 고기는 인기가 있어서 기원전 3천년 전부터 애용되어 왔고, 배설물은 비료와 화약의 원료로 요긴하게 쓰여 유럽에서는 정부에서 주기적으로 수거해 가기도 했습니다. 건물에 원통형 비둘기 집을 설치하는 것은 유럽 상류층의 상징으로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강한 귀소 본능으로 전쟁시에는 전령 비둘기들이 이름과 군번까지 부여 받아 맹활약을 해서 2차 대전 때만해도 미군 비둘기 부대에 5만 4천마리의 비둘기가 150명의 군인과 함께 복무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던 비둘기가 수난의 시대를 맞고 있습니다. 비둘기가 유해 조류로 지정이 되고 정부가 직접나서서 서식을 억제하고 관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조치는 이미 구미각국에서도 실시되고 있는 조치이기도 합니다. 실로 기구한 운명을 맞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원인은 인간이 만든 환경 변화에 놀랍게 적응한 결과입니다.

닭둘기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도시에 서식하면서 스레기통이나 공원 등에서 먹이를 마구 먹어 닭처럼 피둥 피둥하고 잘 날지도 못하는 비둘기를 뜻하는 신조어입니다. 닭둘기는 이둘기라고도 불리는데 이것은 비둘기에 이나 진드기 등 기생충이 많이 붙어 서식하고 있음을 빗댄 말입니다. 한 때 평화의 상징이었던 비둘기가 비둘기에 대한 신조어가 말해 주는 것처럼 세계 각국에서 오늘날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유해조류가 되어 천더구러기가 된 것입니다.

사회 조직에서도 까딱하면 사람들도 닭둘기, 이둘기처럼 천덕구러기가 됩니다. 예로부터 사람, 곧 인재를 세부류로 나누었습니다. 첫번째 인재 (人災) 는 있으면 오히려 해가 되는 사람이고, 두번째 인재(人在 )는 있나 마나한 사람이며, 세번째 인재(人才) 가 바로 사회가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처음에는 세번째 인재, 곧 사회가 필요로 하고 인정하는 그런 사람이었더라도 사는 동안에 삶의 무게에 짓눌리는 가운데 전통적인 삶의 방식에 고착화되어 매너리즘에 빠져 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닭둘기 같은 존재가 되어 천덕구러기가 됩니다.

나이먹어 뒷전으로 물러날 수 밖에 없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삶의 이치라해도 그냥 저냥 살다가 닭둘기 신세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날마다 새로운 환경에 관심을 갖고, 새로운 것을 습득하고, 알아 들으려고 , 적응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조금이나마 닭둘기 같은 신세로 내몰리는 시간을 연장해야 합니다. 이것은 구차스럽게 생명을 연장하려는 삶이 아니라 말 그대로 명퇴를 원하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내 나이가 얼마이건 그냥 늙어버려서는 안됩니다.

Tuesday, March 23, 2010

빈들에 마른 풀 같을지라도(사32:15)


한 15년 쯤전에 여행 삼아 미국 땅에 처음 왔을 때의 느낌이란 여유로움 그 자체였습니다. 맥도날드에서 32oz 컵에 담아 주는 얼음 섞인 코카콜라, 평지 골프코스에 품어대는 스프링클러, 이름모를 회사 국기 게양대에 매달려 한가롭게 나부끼는 큼지막한 성조기, 5번 프리웨이, 101번 프리웨이로 한없이 펼쳐지는 벌판, 이들이 주는 느낌이란 바로 미국적 여유로움 그것이었습니다.

산천은 그 산천이었지만 10년전부터 이민의 삶을 사는 동안 내 안에서 바뀌어 버린 환경 때문에 15년 전 그 여유로움은 간데 없이 일종의 자괴감만 남았었습니다. ‘저 넓은 땅에 내 집 지을 땅은 한평도 없구먼!,”, “넌 그 동안 무얼하며 살아왔나!”

이번 휴가를 감사함으로 받아 똑같은 길을 가보았습니다. 도시를 벗어나 곧 펼쳐지는 그 광활한 광야, 벌판을 바라보는 가운데 감동으로 떠 오르게 하신 찬송이 방금 부른 ‘빈 들에 마른 풀같이’였습니다. 그리고 길지 않은 여행 내내 빈들의 의미를 새겨 보았습니다.
광야는 어떤 곳입니까? 광야는 텅 비어 있는 곳입니다. 텅 비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광야는 모든 것을 정화하고 새롭게 만들어 가는 역사의 빈들, 마음의 빈들입니다.

성경은 빈들에 관해서 자주 말합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평화의 왕 예수가 태어났다는 소식도 빈들에서 밤새워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제일 먼저 전해졌고, 하나님의 구원의 소식은 텅 빈 광야의 어둠 속에서 추위에 떨며 밤새워 남의 양떼나 지키던 희망 없는 사람들에게 제일 먼저 전해졌습니다.
목자들이 밤새워 양떼를 지키던 빈들은 홍해의 기적을 체험한 이스라엘이 40년 간 헤매던 그 빈들이었고, 이스라엘이 한때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과 정의와 평화가 넘치는 공동체를 이루기로 순결하게 다짐했던 그 빈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언자 호세아는 부패하고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빈들로 나가자고 호소했습니다. 빈들에서 하나님에 대한 옛 사랑을 되찾고, 정의와 평화의 공동체를 다시 시작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때묻은 삶을 청산하고 광야로 나가서 여호와 하나님과 다시 시작하자는 것입니다
광야는 또 이 세상은 ‘할 수 없는 일이 더 많은 세상’임을 깨닫게 해 주는 장소입니다. 바싹 마른 잡목과 바싹 마른 풀들이 널려 있는 빈들이건 끝없이 모래 사막으로 펼쳐진 광야이건 우리가 그런 곳에 홀로 버려졌을 때 우리에게 드는 느낌은 어떤 것입니까? 황량하고 부족함, 쓸쓸하고 외로움, 고통스러움과 견디기 힘듬, 이런 것들입니다. 왜입니까? 멀리서 바라보면 바싹 마른 풀들조차 황금색의 물결로 아름답게 보이는 곳이기는 해도 잠깐 머무는 곳이 아니라 나 홀로 버려지는 곳이라면 이처럼 부정적인 느낌이 드는 것은 광야, 빈들에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별반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기술 혁명과 전문가 시대는 ‘ 할 수 있다’의 긍정적인 사고의 길로 우리를 자연스럽게 인도해 갔습니다. ‘열심히 돈만 벌어 봐라!’ ‘세상에 뭐가 무섭겠나?’ 그 일이 아무리 무시무시하고, 어려워 보여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인간이 달 나라에 간 것은 이미 그 옛날 일이 되어 버렸고, 그 먼 우주 공간에 우주선을 띄워 보내고, 우리가 사는 지구 바깥을 우주 왕복선을 타고 왔다 갔다 하는 판국에 그 문제에 딱 들어 맞을 전문가들만 있으면, 그들을 고용할 재력만 있으면 해결되지 않을 .일이 없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과거의 경험과 기회, 기술 혁명, 전문가 집단의 존재는 긍정적인 사고의 힘을 무조건 믿게 만드는 요인이 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사실 많은 광야들이 개척되어 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에겐 과거의 기술과 경험, 전문가 집단이 어쩌지 못하는 새로운 광야, 새로운 빈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지금까지는 우리를 둘러 싼 외적 환경을 바꾸기 위해 애써 왔다면 이제부터는 우리 스스의 가능성를 발견하려는 노력, 우리의 인간 내면 자체가 새로운 개척지, 새로운 광야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자기 중심의 탐닉 시대를 만들어 내게 하였습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물질적으로 더 많은 것을 누리며 사는 시대가 되었지만 우리네 인간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진한 허탈감에 빠져 사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난 할 수 있다’는 정신 무장으로 힘껏 노력하고 거기다가 하나님의 은혜까지 더해져 목표했던 것을 이루어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삶은 그곳에서 끝나지 않기에 또 다시 부족한 것이 생기고 마련이고, 게다가 그 부족한 것들 중의 어떤 것들은 살아 생전 결코 이루어 질 수 없는 것들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아무리 일년 열 두달을 하루 같이 긍정적 사고에 젖어 살아도 내 욕구의 모든 것이 이루어지지는 않는 인생의 한계가 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비애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네 인생들입니다. 이처럼 우리 모두는 이루지 못한 꿈의 아픔을 안고 살아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여기서 광야는 바로 삶의 긴 여정 속에서 우리네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별반 없는 곳임을 깨닫게 해 주는 곳입니다.
특별히 그 문제가 우리의 영적인 문제인 때에, 그 문제가 우리의 죄와 관련된 문제인 때에 광야는 우리로 하여금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곳임을 깨닫게 해 주는데 더 없이 좋은 장소 입니다. 그 옛날 예수도 이 사실을 진작부터 깨달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광야에 나가 시험을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가 시험받은 유대광야는 죽음의 바다인 사해 근처에 있습니다. 요단강은 갈릴리 호수에서 발원하여 사해로 흘러 들어갑니다. 갈릴리 호수는 수량이 풍부하고 물고기가 아주 많은 생명의 호수이지만 사해는 너무 짜서 아무것도 살 수 없는 죽음의 바다입니다. 요단강은 생명의 호수 갈릴리에서 발원하여 죽음의 바다인 사해로 흘러 들어갑니다.

그런데도 예수는 갈릴리 마을들로 들어가기 전에 사해 옆에 있는 유대 광야로 들어가서 시험을 받습니다. 죽음의 바다 길목의 빈들에서 그는 마지막 남은 번뇌의 씨앗을 소탕한 것입니다. 굶주림과 고독 속에서 천국과 지옥 사이를 넘나들며 내면과의 외로운 싸움을 통해 마침내 대 자유를 얻게 된 것입니다.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를 잃는 대신 더 큰 나를 얻는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의 신비 안에 들어 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는 그 빈들에서 문명의 치장이 없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인간의 힘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빈들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생명의 신비 안에 있는 사람으로서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날아오를 수도 있게 되었고, 해와 달과 교감할 수도 있게 되었으며, 새들과 말하고, 벌레들의 소리를 알아 들을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온 우주에 가득 찬 생명의 기운들을 느낄 수 있게 되었고, 상처받은 영들의 탄식과 기쁨의 소리를 들을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뭇 생명과 하나가 되어 함께 울릴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때 비로소 예수는 갈릴리 마을들로 들어가 인류 구원의 역사를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광야는 우리에게도 참으로 소중한 의미를 갖습니다.

긴 인생을 사는 동안 우리는 종종 광야의 삶을 동경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에 배어든 습관화되 기질, 습기(習氣)를 떨어 내고 싶은 마음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빈 곳에 오래 머물러 있고 싶은 사람은 많지 않은 것은 우리의 힘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한계상황에 오랫동안 있는 것 자체가 별로 유쾌한 일이 못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네가 아무리 버텨도 결국에는 갈 수 밖에 없는 곳이 인생살이의 ‘빈 들’입니다. 그 빈들의 이름은 다름아닌 실패, 절망, 고독, 우울, 무기력, 허무 등입니다. 이런 것들이 만들어 내는 한계 상황 속에서 우리 스스로를 찬찬히 돌아 볼 때 빈들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에게 흘러들어오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삶의 빈들은 또 다른 은혜가 됩니다.

지금 인생의 빈들에서 서성이는 우리들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 빈들에는 오직 죽음만이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에도 생명은 살아 있습니다. 지금은 비록 바싹 마른 풀들만이 눈에 보여도 이제 하나님이 철따라 우로를 내려 주시면 그곳에도 초목이 무성하게 되어 생명은 살아 움직일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미 경험으로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망을 갖습니다. 지금 우리가 인생의 빈들을 살아도 하나님의 성령의 빗물이 우리에게 가득 넘쳐 흘러 내리기만 하면 우리의 심령도 새생명으로 가득차게 된다는 그 확신에서 큰 믿음을 갖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말씀하십니다.’필경은 위에서부터 성신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눈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삼림으로 여기게 되리라’

말씀을 정리합니다.
빈들은 황량한 곳이기는 하지만 분주한 현실을 떠나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 영적 정체성을 돌아 볼 수 있는 좋은 곳입니다. 빈들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영적으로 마지막의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일입니다 일상의 숨가쁜 회전 속에서 내가 누구인지?, 왜 사는지?를 잠시 돌아 보는 여유를 가지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꼭 광야로 빈들로 나가야만 되는 일도 아닙니다. 대신 수많은 군중 속에 섞여 사는 힘없는 존재이지만 광야같은 마음, 빈들과 같은 마음으로 우리 자신을 주님 앞에 내어 놓고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으려고 애쓰면서 사는 것이 바로 빈들의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가 회개하라고, 빈 마음이 되라고 선언한 것은 우리의 빈 마음에 예수가 찾아 올 수 있고, 우리의 빈 마음에 그리스도의 새로운 나라가 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오랜 가뭄으로 몸도 마음도 온통 먼지 투성이입니다. 성령의 단비로 후련하게 씻김을 받는 귀한 시간 되기기를 소원합니다. 빈들의 삶을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큰 은총을 경험하는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Monday, March 15, 2010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






이제는 겨울이 다 지나갔는지 벌써 해가 많이 길어졌고 어느덧summer time이 시작 되었습니다.


하루의 일과를 끝내면서 무심코 서쪽 하늘을 바라 보면 가끔 해가 지는 석양 무렵에 햇빛을 한껏 머금은 구름을 볼 때 감탄을 하게 됩니다.
사실 구름은 변화 무쌍한 모습때문에 그간 많은 사진작가들이 선호하는 주제 중의 하나가 되어 왔었습니다. 특히 사진사에서는 근대사진의 개척자로 알려진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 미국, 1864~1946)의 ‘구름’ 사진 시리즈가 유명하고, 한국사진에서는 중견사진가 김광수의 구름사진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스티글리츠의 구름 사진은 은퇴 후 쓸쓸하게 노년을 보내는 작가의 마음을 상징하고 있고, 김광수의 구름 사진은 현대적인 구조물과 연계되어서 현대 문명의 특정한 단면을 반영하거나 강한 컨트라스트의 구름 사진은 언어 밖에 있는 작가의 심리적인 흐름을 표출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미국 땅 태평양을 마주한 캘리포니아에서는 일출의 구름보다는 석양의 구름이 더 보기 쉬울지도 모릅니다. 정말 가끔은 한숨을 자아내리만큼 그 자태가 아름답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그러면서도 섬듯해집니다. 저 모습이 얼마나 오래 갈까? 저 구름에 내 인생을 싣는다면 어찌 될까? 하나님의 심사가 저 구름처럼 변화 무쌍하다면 이 각박하고 어려운 세상 삶속에서 하나님마저 어찌 믿을 수 있을까?

그러나 우매한 나의 마음을 미리 간파하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 분은 신실하고 식언치 않으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라고...

우리는 구름에 달가듯이 하나님의 운행하심에 그저 우리를 내어 맡기면 될 뿐입니다.
그래서 또 한번 감사합니다.

(신 7:9)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민 23:19)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Tuesday, March 9, 2010

꽃샘추위


“많이도 온다.”
우수와 경칩이 지나면 대동강물이 풀린다고 해서 완연한 봄을 느끼게 된다고 하는데 때늦은 함박눈이 얼마나 많이 오는지 서울 종로구 청운동에 내리는 눈 풍경사진을 곁들여 기사를 실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미국 땅에도 금년에는 지역에 따라 비도 많이오고 눈도 많이 내렸습니다.
경칩이지나 추위가 끝나나 싶을 때면 영락없이 소위 꽃샘 추위가 한두번 찾아 옵니다. 한겨울 추위 같으면 미리 맘먹고 대비해서 두꺼운 옷도 미리 입어 보지만 이제 추위는 그만 이다 싶고 한낮의 햇살이 때로는 이마의 땀마저 맺히게 하는 때에 갑자기 찾아 온 추위에는 맥을 못추게 되는 법이지요.
이때의 추위는 그냥 추운게 아니라 때늦은 비를 동반하거나 시속 30-40마일의 강풍과 함께 하는 추위라서 정말 뼈 속까지 추위를 느끼게 마련입니다.
그런데도 이 때늦은 꽃샘 추위를 보면서 이 추위가 가진 의미를 생각해 볼 때 감사함을 느끼게 됩니다.

섬기는 교회에는 큰 나무가 몇그루 있는데 그 가운데 전나무 비슷한 소나무와 속에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고 해서 붙여진 너도 밤나무가 있습니다. 전나무는 사철 푸른나무라고는 하지만 겨우내 여기 저기 나이들거나 병든 잎을 붙이고 있었고, 너도 밤나무는 지난해 늦은 11월 까지 달려 있던 단풍든 잎을 다 떨구고 겨우내 속빈 밤송이 같은 열매를 떨구고 있었습니다. 시커멓게 변색된 그 잘난(!) 열매는 우수와 경칩이 지난 지금 까지도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꽃샘 추위로 찬 비를 맞고, 시속 30-40마일을 강풍을 맞고 나면 사정이 달라지게 됩니다. 끈질기게 붙어 있던 전나무의 고엽도, 너도 밤나무의 열매도 더 이상 가지에 붙어 있을 재간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새 생명을 보게 됩니다. 차가운 비를 맞고, 강한 바람에 뒤흔들린 나무는 이제 졸린 눈을 비비고 땅으로부터 힘차게 물을 빨아 올리고 새생명의 잎을 밀어내어 또 한해를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늦은 꽃샘추위에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지요.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이제는!” 해보지만 아직도 고난과 고통이 남아 있는 것을 느끼며 삽니다. 그러나 그 고난과 고통에도 다 뜻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마음가운데 남아 있는 더 내려놓아야 할 것들, 떼어 버려야 할 것들을 떼어 버리게 하시려는, 그래서 새로운 축복으로 덧입히시려는 하나님의 깊는 뜻이 있으신 줄 압니다.
말처럼 쉽지않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마지막 남은 견딜 수 없는 그 고난과 환란을 오히려 감사해 보십시다. 그 뒤에는 새생명의 축복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Monday, March 8, 2010

거꾸로 사는 삶(눅9:58, 갈6:8)



말태우면 경마잡히고 싶다고 사람의 욕심은 좀, 점잖은 말로 인간의 욕구는 한이 없습니다. 똥차라도 좋으니 내 차 한대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가도 어느새 지나가는 8기통 반짝 반짝 새까만 차를 보면 나도 모르게 눈이 휘둥글 돌아가는게 보통 사람들의 심리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의 마음을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을 만큼 크게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꽤 오래 전에 매슬로우라는 사람이 인간이 지닌 다양한 욕구를 잘 정리 해 놓았습니다. 오늘은 매슬로우가 사람들의 욕구를 저차원 욕구로부터 고차원 욕구로 정리한 것을 예수님의 삶과 비교하는 가운데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무엇때문에 그 힘든 일을 합니까? 사람들에 물으면 별별 소리 다합니다. 어떤 사람은” 일이 좋아서 한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일이 즐거워서 한다’고 폼잡으며 말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먹고 살만 하니까 그런 소리가 나오는 법입니다. 사람들이 그 힘든 일을 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먹고 살기 위해서, 내 가족, 내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입니다. 이처럼 먹고 사는 일과 자손 번식의 욕구를 생리적 욕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런 생리적 욕구는 말 못하는 동물들에게도 있는 욕구이기도 한 것인데 한 나라가 온통 맛있는 음식 찾아 먹기에 눈이 충혈되어 있는 것 같은 한국의 ‘맛자랑 멋자랑’같은 TV프로그램을 보노라면 정말 전 국민이 아직도 먹고 사는 일인 기본적인 욕구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아 입맛이 씁쓸해 지기도 합니다.

출애굽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랬습니다. 그 고생 고생 애굽의 종노릇을 뒤로 하고 홍해의 기적을 보며 애굽을 나온 후 겨우 두달 보름 밖에 안되 이스라엘 온 백성이 신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 도다”(출 16:3)이 아우성 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광야에 나와 배고파 죽겠다고 난리치던 백성이 구워먹고, 삶아먹고, 쪄먹어도 되던 만나에 싫증이 나기 시작하니까 또 집단적으로 타박했습니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의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없도다”(민11:4-6)

우리의 예수는 처음부터 달랐습니다. 예수가 공생애를 앞두고 마지막 남은 인간적인 번뇌의 씨앗을 소탕하기 위해 스스로 굶주림과 고독의 장소 광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고통가운데 가장 힘든 때에 사탄이“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마4:3) 먹는 문제를 가지고 예수를 시험했습니다. 예수는 단호히 대답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마4:4) 예수는 사람들의 먹는 문제를 부정하지 않으시면서도 사람은 먹는 문제에만 매달려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시므로로 사탄의 시험에 단호히 대처하셨습니다. 역사상 우리는 먹는 문제에 정신이 팔려 영원한 생명을 잃어 버린 경우를 수 없이 보아왔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입으로 먹는 것은 우리의 생명을 잠시 연장할 뿐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생명을 영원히 보장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란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잠깐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조금 더 편한 직장, 좀 더 좋은 직장을 찾습니다. 그래서 3D업종이란 말이 생겨나게 됐습니다. 집주인의 생각이 바뀌면 이사가야 하는 전세집은 이제 그만 살고, 게딱지만해도 내 집을 가져 살기를 원합니다. 소위 안전 욕구라고 말합니다. 좀더 욕심을 부려서 남 눈치 안보고 내 사업을 해보고 싶어 이 궁리 저 궁리에 머리가 아프기 시작하고, 많은 경우 이 돈 저 돈 끌어 모아 사업이랍시고 벌였다가 낭패 보기 시작하는 단계가 이 단계입니다.
그러나 예수에게 애초부터 안전욕구는 없었습니다. 태어날 때는 방이 없어 마구간에서 태어났고, 고향에서도 홀대를 받아 집한칸 없었습니다. 마8:20은 말합니다.”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이 말씀은 하찮은 짐승들 조차도 보금자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세상의 주인이고 창조자이신 그리스도가 자신의 셰계에 와서는 안식처가 없는 나그네, 사람들의 거주지에서는 내쫓김을 받는 방랑자가 되었다는 말로 예수는 말그대로 편히 살 집 한칸도 없는 방랑자로서 공생애 사역을 감당하고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결혼해서 가정을 가지고 자식 낳아 허리를 조금이나마 펼 때가 언제입니까? 아쉬운대로 좀 여유있는 전세집, 아니면 게딱지 같은 아파트라도 내 집한칸 어렵사리 장만하고, 첫 아이 고등학교 졸업할 무렵 둘째놈 중학교에 다닐라 치면 슬슬 고개를 쳐드는 욕구가 있습니다. 바로 사회적 욕구입니다. 지금껏 가정를 일구느라 정신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내 집하나 갖자고 열심히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허리를 펴고 하늘을 바라보니 남자랍시고 회사에서 이 눈치 저눈치 보느라 나는 온데 간데가 없고 그 친했던 고등학교 동창, 대학 동문들 어찌 사는지 얼굴 본지도 까마득, 아이들 뒤치닥거리, 그 잘난 남편 뒤치닥거리하는 사이에 내 이름 석자는 온데 간데가 없고 큰애 이름 끝자락에 붙은 아무개 엄아, 시집살이 이 눈치 저 눈치에, 내 가정 하나 잘 먹고 잘 살자고 친정도 저 만치에 두고 살았던 인생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허리를 좀 펴 볼만 하니까 나타나는 욕구가 바로 사회적 욕구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누군가와 어울려 살고 싶다는 말입니다.

동창들도 만나고, 이제 까지 참았던 군대 동기생 모임에도 나가고 싶고, 이제 까지 미뤘던 여고 동창들도 만나고 싶고, 꾹꾹 눌러 두었던 앞동 아파트 계 모임에도 나가고 싶고, 사람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외로운 가운데 혼자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가장 무서운 병은 에이즈도 아니고 요즘 유행하는 H1A1신형 독감도 아니고 외로움이라는 질병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회적 욕구는 잘 관리되지 않으면 정말 문제가 커집니다. 요즘 유행처럼 번지는 방송국 막장드라마를 아시지요? 물론 드라마니까 현실보다는 과장된 측면이 있지만 드라마는 우리 사회에서 있는 이야기, 있을 법한 이야기가 소재가 되는 법입니다. 그래야 재미가 있는 법이거든요. 재미있다고 보는 막장드라마도 없는 것을 억지로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주위에서 흔하게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어쨋든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나라는 존재를 잊고 살다가 이제는 사람답게 살아 보자는 내 안으로부터 밖으로 표출되는 욕구가 바로 사회적 욕구입니다.

예수는 어땠습니까? 예수도 잘 나갔습니다. 진리의 말씀 전파에, 치유와 회복의 역사에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무리가 예수의 뒤를 따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구약 유대의 오실 메시야로 알고 왕으로 세우자고들 난리 법석이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예루살렘 중심에 터 잡고 찾아오는 사람들로부터 이 대접 저 대접 받으며 말그대로 사회적 욕구를 폼나게 즐기며 채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달랐습니다. 우리가 찾던 사회적 욕구 충족이 가능하던 때에 예수는 오히려 아직 날이 채 새기도 전에(눅4:42) 한적한 곳으로 기도하러 갔습니다.(마1:35) 이것은 예수 자신이 공생애 기간을 통해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분명히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사회가운데 있으시되 항상 기도하는 삶을 모본으로 보여주는 삶을 사신 분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육의 세상을 사는 우리들은 인간적인 사회적 욕구와 영적인 욕구 간의 균형을 원만이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제 자식들도 장성하여 분가하여 사람 구실하여 살고, 두 부부 누구의 눈치 안보며 살만해지면 고개를 드는 욕구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존경욕구입니다. 쉽게 말하면 바로 대접받으며 살고 싶은 욕구입니다. 이 때가 되면 식당도 분위기 찾아갑니다. 조금 먹어도 고급을 찾아 먹습니다. 자신들의 분위기에 맞는 사람들만 골라 만납니다. 라이온스 클럽에도 들고, 로타리 클럽에도 나가고, 골프릎 쳐도 명품 클럽으로 쳐야 하고, 핸드백을 들어도 명품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즈음에 교회 주보를 만드는 사람은 무척 조심해야 합니다. 교우 동정란을 특별히 신경을 써야 합니다.이 욕구는 배운 사람 못 배운사람, 가진 사람 못가진 사람 별차이 없습니다. ‘존경’이라는 근거를 통해 하나의 카테고리를 이루는 욕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어땠습니까? 바로 이때 예수는 바로 빌라도의 법정에 있었습니다. 채찍질을 했습니다. 군병들이 침뱉고, 손바닥으로 때렸습니다.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팻말을 붙이고, 발가 벗겨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존경과는 정반대, 수치 중의 수치로 예수를 대접했습니다.
자아실현 욕구가 인간들의 인본주의 논리에 따른 마지막 욕구입니다. 이 세상에 살다간 증거를 남기고 싶은 욕구 이것이 사람들의 마지막 욕구입니다.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그 유지에 따라 아주 큰 돌맹이의 밑자락에 작은 글씨로 새겼습니다. 그게 작은 비석입니까? 어쨋든 사람들은 누구든 이 세상에 살다간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웃으면서 죽는 사람은 별로 없다고들 하지요?. 개똥 밭을 굴러도 이 세상이 좋다고 몸부림치다가 할 수 없어 저 세상으로 떠나는 사람들이 상대도 안되게 더 많다고들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는 어땠습니까.? 가상 칠언을 남기고 ‘다 이루었다’는 말로 만족하며 이 세상에서 육적인 삶을 마감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인본주의적 삶을 살아야 합니까? 아니면 예수님처럼 신본주의 삶을 살아야합니까? 아니면 어디에 무엇을 얼마만큼 섞은 삶을 살아야 합니까?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또 해결점은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우리는 예수님 처럼 기도하는 삶을 살야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바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그 난리법석이었던 ‘노사모’의 ‘노’자도 이미 잊혀졌고, DJ의 ‘D’자도 벌써 잊혀져 갑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땅을 떠난지 2000년이 지났는데도 이 세상 곳곳에서 편만하게 기억되는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원하고 바라옵기는 인간의 욕심 따라 살다가 죽은지 사흘이면 벌써 잊혀지기 시작하는 삶이 아니라 이 땅에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게 하시고 죽은 후에는 또한 곧 바로 저 부활하여 영생하는 소망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세상 사는 일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수고하지 않는 공중의 새를 먹이시고, 수고하지 않아도 솔로몬 보다 아름다운 옷을 들꽃에 입히시는 하나님, 우리의 쓸것을 미리 아시는 하나님을 굳게 붙잡으므로 필요없는 걱정과 염려를 먼저 하며 사는 불신앙의 삶을 살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믿사옵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Monday, March 1, 2010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강산이 한번 바뀌고도 남을 시간이 흐른 뒤에야 한국에 사는 동생을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 잠시 구경삼아 나온 곳, 휴게소 언덕너머로 물을 잔뜩 머금은 구름이 이른 저녁 햇살에 쌍무지개를 떠 올렸습니다.




평신도의 모델, 스데반(행7: 54-60)


벌써 10년이 훌쩍 넘은 일이었지만 한국 서점가를 화들짝 놀라게 했던 한 권의 책이 있었습니다.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쓴 한국 한국인 비판’이라는 이케하라 마모루라는 일본인이 쓴 책입니다. 이케하라는 이 책에서 경제는 1만달러, 의식은 1백달러인 한국인이 지닌 사회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통렬히 꼬집었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 이케하라는 맞아 죽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주인공 스데반은 정말로 맞아 죽었습니다. 스데반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배반자들과 살인자들에게 신실하게 복음을 전했고, 이로 인하여 스데반은 숱한 돌에 맞아 죽은 것입니다.

스데반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스데반은 어떤 사람이었기에 하나님께서 그 영광스러운 자리에 서기에 합당한 순교의 은혜를 주셨습니까? 이 영광스러운 순교는 과연 어느 날 갑자기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까? 오늘은 초대교회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의 삶을 묵상하는 가운데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1세기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영향을 끼친 몇 명의 인물 가운데 한명을 꼽으라고 할 때 아무도 의심할 수 없는 한 사람이 바로 사도들에 의해 세운 바 된 ‘일곱 사람 중의 한 사람’인 오늘의 주인공이 청년 스데반입니다.
‘면류관’이라는 뜻의 이름을 지닌 그는 헬라파 유대인 중 한 사람으로서 예루살렘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항상 이방인 취급을 받아 왔던 사람입니다. 스데반의 회심한 나이가 20세 후반이었다면 그가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지금 그의 나이는 이제30대 후반의 나이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스데반이 회심 후 오랜 시일이 지난 후에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은 사람들을 쓰실 사람들이 어느 정도의 나이가 될 때까지는 맡길 사역을 위해 오랫동안 준비시키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이유에 따라 스데반도 교회 내에서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인정해 주는 신앙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보내실 때까지 오랜 기간 동안 훈련을 받아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먼저 스데반은 과연 어떤 과정을 통해 초대교회 교인이 되었습니까? 스데반이 누구인지 어떤 삶의 배경을 가지고 있는지 성경은 자세히 말하고 있지 않지만 우리는 사도들이 일곱 사람을 세우기 위해 내걸었던 조건, 특히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언급한 스데반이 겸비했던 자질(6:3,5,10)을 통해서 능히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스데반은 예루살렘에서 수천명의 사람들과 더불어 세례를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방언의 은사를 받은 것도 아니었고, 특별히 하늘에서 내려오는 특별한 권능이나 징조를 받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또 열광적으로 복음을 전하던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아직까지는 그저 그렇고 그런 보통의 신앙인이었을 뿐 입니다.
두번째 과정은 세례 이후 곧바로 뒤따라 왔습니다. 스데반은 예루살렘에 머물기 위해 고향에 두고 온 가족과 친구와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는 베드로의 권고에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그 자리에서 결단을 내리고 교회에 남았던 사람입니다.
세번째 과정은 교회를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하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스데반은 한마디로 말해 하늘나라의 복음에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린 지금 그에게 남은 것은 시간과 마음뿐이었지만 모든 삶을 드리는 복음의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삶이 순식간에 일어났던 사람입니다.
마지막 네번째 과정은 예루살렘에서 회심한 수십명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가정 교회 공동체에 들어가 신앙공동체의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평소같았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만 은혜받은 스데반에게 있어서 신앙공동체의 삶은 귀한 나날들이었고, 스데반은 이 공동체 생활을 통해서 새로운 삶을 경험하고, 새로운 삶을 실현하는 가운데 신앙을 성장시켜 갈 수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경험하는 것처럼 스데반도 당시 새로운 삶으로 인해 수없는 실수를 범하기도 했고, 신앙생활에서 큰 실망을 겪기도 했을 것임이 분명합니다. 신앙공동체 생활에서 이해하기 힘든 별의별 일들과 사건들 때문에 견디기 힘든 고충을 겪었을 것도 확실합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이해와 용서를 배워야 했습니다. 얼마만큼이나 올바른 신앙의 삶을 살 수 있을런지 때때로 자신을 의심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어두운 삶의 비전을 밝게 비춰 주시고, 그가 가야 할 길을 인도해 주셨습니다.
아직 젊기 때문에 교회에서 큰 일을 맡지는 못했지만 이것 또한 스데반에게는 오히려 잘 된 일이어서 주님의 3년 반 공생애 기간을 따라 다녔던 사도들이 배웠을 섬김의 도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통해서 스데반 자신이 가진 은사를 더 깊이 다지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스데반은 차근 차근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경험하고, 예수 안에 거하는 삶을 익혀 나갔습니다. 복음을 전할 준비된 그릇을 찾고 계셨던 하나님은 그 모습을 보시면서 드디어 스데반의 삶을 사역자로서의 삶으로 주장하시게 된 것입니다. 준비된 그릇으로서의 스데반을 확인하신 하나님은 이그 후 날이 갈수록 평범했던 스데반에게 권능을 부어 주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스데반이 복음을 선포했을 때 모든 사람들은 그 말씀이 참된 것이지 아니면 입으로만 말하는 거짓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스데반이 행하는 기적이 결코 마술이 아니라, 성령에서 비롯된 능력인 것도 잘 알았습니다. 사람들은 스데반이 거룩한 척하는 위선자가 아니고, 스데반의 모든 표현이 자기 자랑이 아니라 겸손함으로 이루어진 것임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스데반이 세움을 받았을 때 아무도 마다하지 않았고, 아무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오늘 주제의 결론 부분을 나누는 가운데 말씀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초대교회에는 아직 두개의 그룹만이 있었습니다. 그 하나가 사도그룹이었고, 다른 하나는 바로 회심자 그룹이었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사도들 외에 다른 사역자들이 있었으면 어떨까?’라는 생각들을 가지게 되었을 때 ‘일곱사람’의 평신도 사역자들을 세울 필요가 생기게 되었고, 그 때 스데반과 같은 평신도 사역자들이 전격적으로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초대교회 내에 스데반과 같은 평신도 사역자로서 일군들이 바르게 세워졌을 때 어떤 결과가 일어났습니까? 첫째로 말씀이 왕성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이것은 성경 교훈의 양이 많아지고, 교훈의 질이 깊어 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들이 말씀에 전심을 쏟게 되자 말씀의 가르침이 넓어지고 깊어진 것을 말합니다. 이 때 성경 말씀이 교회와 성도들에게 확고하게 자리 잡히게 되고, 교회는 말씀이 살아있는 교회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둘째로 교회가 부흥하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심히 많아지고”, 말씀이 강해지고 말씀의 깊이가 깊어지고, 말씀의 넓이가 넓어지자 교회가 부흥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교회가 수적으로 양적으로 성장하게 된 것입니다.
셋째로 세상이 항복하게 되었습니다.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건실한 일꾼을 세운 교회는 이처럼 놀라운 영향력을 발휘하였으므로 회개와 개종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지금까지 스데반을 말한 것은 평신도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닫기 위함입니다. 교회는 수세기 동안 이런 사람들에 의해 발전되고 유지되어 왔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견뎌내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신앙으로 고난을 이겨낸 사람들, 곧 평신도들이 교회를 지켜왔던 것입니다. 1억5천만명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수가 증가한 오늘의 중국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금년에 우리는 ‘두날개로 날아 오르는 건강한 교회’를 표어로 내걸고 6단계 양육시스템을 우리 교회가 부흥할 수 있는 귀한 도구로 알고 제도의 정착과 활성화를 위해 교회의 모든 지체가 애쓰고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 모두가 다시한번 건강한 교회를 위한 평신도의 역할의 중요성을 생각할 때입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위해 주신 이 귀한 제도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의 평신도들이 깨어나야 합니다. pre-encounter, 일군반, 제자반 , 바나나사역, 알파학교, 중보기도학교, 치유사역과 각종 사경회, 그리고 기타 성경공부반 등 오랜 기간 동안 교회를 통하여 준비시키신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이 모든 일들이 결국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 사역을 위해서 그동안 평신도들을 세워 사용하시려는 하나님의 큰 뜻이었음을 다시 한번 깨달아 알고, 한 사람의 평신도들이 스스로 깨어 날 때 금년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비전은 성공할 수 있습니다.
성패는 우리 모두가 뜨거운 열정과 사랑을 가진 스데반과 같은 평신도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련받고, 양육받은 하나님의 군사는 오로지 하나님이신 성령의 손에 붙들려 있을 때에만 진정한 하나님의 군사가 될 수 있는 것임을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Wednesday, February 24, 2010

꼴찌들에게 보내는 위로(히12:1-3)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목청껏 소리를 지르고 손뼉을 치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삽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우리에게는 좀처럼 이런 갈망을 풀 기회가 사라졌습니다. 환호가 아니라도 좋으니 속이 후련하게 박장대소라도 할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그럴만한 기회도 없습니다. 그저 하루하루를 덤덤하게 살아 넘길 뿐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의례적안 미소아니면 조소,냉소, 고소가 고작입니다. 나를 포함하여 이런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보노라면 얼굴 모양까지 얄궂게 변해 버릴 것 같은 걱정마저 들게 됩니다.
속 시원히 사람의 마음을 풀수 있는 기회는 뭐니뭐니해도 잘 싸우는 운동경기를 볼 때가 아닌가 합니다. 그런 점에서 지난 3월에 있었던 한국야구나 김연아 선수는 그 역할을 톡톡히 해낸 효자요 효녀였습니다.

흔히들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합니다. 그리고 운동경기 중에서 마라톤 만큼 우리들의 환호와 갈채를 받는 경기도 없습니다. 순간의 짜릿한 승부에 묘미가 있다는 100미터 단거리 우승자에게는 감탄을 하면서도 보다 긴 호흡의 승부인 마라톤 우승자에게서는 감동을 느낍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숨이 멎는 듯한 무서운 고통의 시간과 길고 긴 고독이라는 터널을 통과하는 인간 한계를 극복한 그 노력에 후한 점수를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의 여정을 마라톤과 같다고 할 때 우리 믿음의 여정을 또한 마라톤에 비유해도 하나도 지나칠 것이 없습니다. 오늘 히브리서 기자는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 갑시다’라고 평범하지만 가시 돋친 격려를 하고 있습니다.
또한 힘겨운 믿음의 길이지만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구름처럼 우리를 둘러 싸고 있으니’ 우리도 믿음의 선배들을 본받아 믿음의 길을 달려 마침내는 후대 사람들에게 믿음의 증인으로 본이 되자’고 굳센 각오와 결의를 요구하고 있으며, ‘우리 믿음의 근원이 되시며 완성자가 되시는 예수’를 닮아 ‘우리를 얽어 매는 온갖 무거운 짐과 죄를 벗어버리고’ 끝내는 믿음이라는 신앙 마라톤의 결승점에 도달하자고 매섭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히브리서 기자의 권면을 볼 때 우리가 달려가야 할 믿음이라는 신앙 마라톤의 여정은 설익은 낭만의 길이 아니라 오히려 뼈와 살을 깎는 진지한 장거리 경주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신앙의 마라톤 여정을 달리는 나로 하여금 자꾸만 발목을 무겁게 하여 그 자리에 주저 앉히려는 방해가 끼어 듭니다. 그것은 먼저 내가 얼마나 먼 길을 달려 왔으며, 또 앞으로 얼마나 먼 길을 달려가야 할 것인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나를 더욱 무겁게 하는 것은 도대체 나는 몇 등으로나 이 길고 긴 뜀박질의 길을 달려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마라톤은 아무리 힘들어도 42.195km만 달리면 됩니다. 그런데 인생 마라톤, 신앙 마라톤은 얼마나 먼 길을 달려야 하는 길인지?, 그리고 나는 얼마나 먼 길을 달려 왔으며, 또 얼마나 먼 나머지 길을 달려가야 할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달려 온 길은 이미 다 잊혀졌고, 그대신 앞길에 숨막히게 할 언덕이 몇 개나 남아 있을런지, 맞바람을 받으며 달려가야 할 내리막 길은 또 얼마나 더 있을런지 도대체 알 수가 없고, 그 생각만 하면 숨이 턱턱 막힙니다. 그래서 요즘처럼 산다는 것이 견디기 어려울 만큼 정말 너무 너무 힘이 들 때에는 어서 빨리 이 땅의 삶을 정리하고 저 곳의 삶터로 옮겨 가는 것이 더 현명할 것이라는 불신앙적인 생각을 아주 가끔은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재 보고, 저렇게 재 보아도 내가 선두그룹을 달리는 마라톤 주자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내가 어느 그룹을 달리는지를 알아야 힘을 더 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알게 아닙니까? 내가 제대로 뛰고 있는지 어떤지를 알 것이 아닙니까?그런데 도무지 알 재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심란해지고, 그래서 자꾸만 그 자리에 주저 앉고 싶어 집니다. 아를 어찌해야 합니까?

그러나 우리가 자꾸만 그 자리에 주저 앉고 싶은 충동을 떨쳐 내기 위해서는 42.195Km를 내어 달려야 하는 육상 마라톤과 신앙 마라톤과의 차이를 깨달아야 합니다.
먼저 신앙마라톤의 길은 쪽 대본을 들고 달리는 경주라는 사실입니다. 신앙 마라톤의 여정은 쪽 대본을 들고 연기하며 뛰는 마라톤의 길입니다. 육상마라톤은 이미 눈으로 확인 해 본 정해 진 길을 달려가는 경주이지만 신앙 마라톤의 길은 극을 전개해 가면서 작가가 계속 대본을 쓰는 쪽 대본에 따라 연기하며 달리는 마라톤 경기입니다. 설사 내 인생 여정, 내 신앙 여정을 위한 한편의 대본이 모두 완성되어 있다고 해도 절대로 그 대본은 한번에 내 손에 주어 지지 않는 법입니다. 그저 매일, 매회 주어지는 쪽 대본을 들고 연기하며 달릴 뿐입니다. 장래 일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물안하게 사는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는 경우 장래 일을 모른다는 것만큼 오히려 감사한 일은 없습니다. 내일 일을 알지 못하고, 우리가 죽을 날을 알지 못하고 살 수 있다는 것은 감사할 일입니다.
성경을 보면 쪽 대본을 받아 들고 달려간 믿음의 선배, 신앙의 선배들로 가득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이 바로 그런 사람들을 가득 담은 믿음의 장입니다. 아브라함도 쪽 대본을 받아 들고 달려간 믿음의 대표적인 증인입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쪽 대본을 들고 바로 그 곳 까지 달려 갔습니다.’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는 쪽 대본을 들고 곧장 모리아 땅 까지 내어 달렸습니다. 그 다음에는 또 어떤 길이 펼쳐 질지도 모른채 어떤 장면이 펼쳐 질지도 모른채 주신 쪽 대본을 들고 지시하는 곳 까지 연기하며 달려 간 것입니다.
지금 달려 가는 앞 길이 아무리 궁금해도 내 손에 들려진 쪽 대본에 따라 연기하며 달려가면 됩니다. 그러면 내일 이면 또다른 쪽 대본을 주실 것이고. 그 쪽 대본에 따라 연기하며 하루하루를 충실히 이어 달려가면 언젠가는 골인 지점에 영광스럽게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을 것은 이 쪽 대본들이 모두 모여 한편의 완결된 대본을 만들것이로되 이 모든 것은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을 이루어 가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둘째로. 신앙 마라톤은 남보다 먼저 달리는 경주가 아이라 모두가 함께 달리는 경기입니다. 육상 마라톤은 신기록 달성과 일등에 대한 집착으로 달리는 경주입니다. 육상 마라톤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예외가 없는 규칙에 따라 달리는 경기입니다. 이에 비해 신앙 마라톤은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더욱 엄중한 공의의 규칙으로 달리지만 이와 더불어 무한한 사랑의 규칙이 동시에 적용되는 경기입니다. 여기에다 신앙 마라톤은 처음부터 끝까지 실수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단숨에 잘 달릴 수 있는 선수는 아무도 없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경기입니다. 다만 골인 지점을 향해 달리며 ‘내 힘으로 가능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창조주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하나님을 더욱 의뢰해야 함을 배우고, 깨달으며 달리는 경주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마라톤에서는 등수에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천로역정에서 보는 것처럼 중간에 코스를 이탈했어도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경주이고, 더 이상 못가겠다고 아예 주저 앉는 사람들 모두를 축하와 격려로 손잡고 함께 달리는 일종의 이색 마라톤 경주인것입니다.
그래서 감탄보다는 감동이 넘칩니다. 왜냐하면 100m 경주 에서처럼 감탄은 탁월함에 대한 감정 표현이지만 감동은 훌륭함에 대한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신앙 마라톤은 신기록 수립이나 월계관을 쓰는 일등을 목표로 삼는 경쟁 마라톤이 아니라 예수가 주신 새계명(요13:34)’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사랑하라’는 명령을 목표로 삼는 동거 동락의 마라톤이기 때문에 경쟁 의식도 필요없고, 늦게 출발했거나 도중에 넘어지거나 하여 소비한 시간 때문에 피해 의식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신앙 마라톤이 가진 이런 특징들은 마라톤 주자인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그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는 우리가 누구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꼴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는 교육과 부와 사회적 지위와 업적이 어떠하건 우리는 모두 다 죽은 인생들이었습니다. 모태 신앙인이건 저 처럼 인생 40대 후반에 예수를 믿게 된 늦깍이건 우리 모두는 은혜시대 끝자락을 다행히 놓치지 않고 신앙의 마라톤을 함께 뛸 수 있는 주자가 된 은혜입은 꼴찌들임을 감사할 뿐입니다. 그리고 또한 감사한 일은 육상마라톤처럼 아직 가지 않은 미지의 골인 지점을 향해 뛰는 마라톤 경주가 아니라 영적으로는 이미 도착해 있는 그 골인 지점을 향해 뛰는 마라톤 경주라는 점에서 더욱 감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마음에 품은 것은 이미 이룬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5:4) 우리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이미 옮겨진 그 곳을 향해 뛰어 달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소망으로 달릴 수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모두 신앙 마라톤 경주의 꼴찌 주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실망하지 않고 소망으로 달릴 수 있습니다. 우리를 둘러 싼 허다한 증인들이 우리를 응원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앞서 가셔서 모든 것을 다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앞에서 친히 바람막이가 되어 주시고, 우리 꼴찌들 바로 옆에서 ‘으쌰, 으쌰’를 외쳐 주십니다. 우리 꼴지들이여, 우리는 다만 영광스런 골인 지점을 향해 하루 하루를 열심히 달려 갑시다.

Monday, February 22, 2010

Saturday, February 20, 2010

나는 너를, 너는 나를...



산업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용자와 피고용자, 즉 부리는 자와 부림을 당하는 자 사이에는 항상 긴장이 있어 왔다. 그리고 양자가 주고 받는 것에 대한 공평성에 대하여 편차가 클수록 그 긴장의 강도는 커지는 법이다. 언제나 부리는 자에게는 ‘그것으로 충분”(That’s enough)이라는 논리가, 부림을 당하는 자에게는 언제나 ‘더 많이’(The more, the better) 의 논리가 작용해 왔다. 언제나 가진 자가 힘을 가졌었지만 딱 한번 가지지 못한 자가 가진 자의 세상을 뒤집어 엎었던 시도가 있었고, 그것이 성공한 것처럼 보였던 것이 바로 성공한 실패70년 역사의 볼세비키 사회주의혁명이었고, 지금껏 살아 남은 것이 그 아류인 북한의 공산주의이다. 그러나 그것도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이 보기에는 이미 확실히 실패한 사회이념임이 분명하다.

성공하는, 발전하는, 그래서 누구나가 소속하고 싶은 조직이란 어떤 것일까? 그것은 간단하다. 주는 것만큼 열심히 일할 수 있는 사람과 일하는 만큼 충분히 공급해 주는 사용자가 만나는 곳이다. 이 논리란게 참으로 간단한 것 같아도, 실상은 그렇지 못해 그 오랜 역사에 있어서 That’s enough와 The more, the better가 싸워 온 것이다.

큰 아이가 미국 해군에 입대했다. 사람에게는 죽을 기회가 세번, 살 기회가 세번 찾아 온다고 했는데 이번 기회가 큰 아이가 큰 나라에서 좀더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기회라 여겨져 입대를 결심했고, 길지않은 시간이지만 고난의 훈련기간을 은혜가운데 마치고 졸업을 하였기에 남은 식구가 어려운 발걸음으로 시카고 훈련기지를 찾아 반가움을 나누고 서로 덕담을 나눌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졸업식에서 육군 편제로는 대령인 부대장 Captain의 훈시에서 받는 감동이 컸기에 여기에 소개하고자 하는 것이다. “Do your job, the Navy will take care of you’ (맡은 바 소임에 최선을 다하십시요, 여러분이 복무하는 해군은 여러분을 돌 볼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여 나라에 충성하는 세계 각 나라 출신들의 군인들 한명 한명을, 피부색이 다르고 지금까지 살아 온 배경이 달라도 미국이라는 국가를 위해 충성하기로 결심하는 사병 한명 한명을 해군이 책임지고 돌보겠다는 부대장의 훈시와 권면이고, 해군을 대표한 부대장으로서의 약속인 것이다. 나라를 위해서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하는 개인이 모인 미국 해군과 이들을 끝까지 책임져 주는 미국 해군이 어찌 세계 막강의 해군이 될 수 없을 것인가!

5학년 5반을 살아오는 동안 나름대로 이런 저런 조직에 속해 보았지만 아쉽게도 사람의 입을 통해서는 ‘최선을 다하십시요, 내가 끝까지 당신을 책임지겠소’라는 말을 들어 보지 못했고, 안타깝게도 아직껏 그런 조직에 몸 담아 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결국은 오늘 하나님으로부터 그 말씀을 들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8장 20절 말씀이다. 이 세상에서는 어려운 논리일지 몰라도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것이 기본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곳은 더 이상 다툼과 갈등이 필요없는 곳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Thursday, February 18, 2010

큰 아이를 격려코자!






사람에게는 살 길이 세번, 죽을 길이 세번 찾아 온다고 합니다. 큰 아이에게 더 넓은 세상에서 좀 더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기회로 찾아 온 줄 알고 해군에 지원했고, 고난의 훈련을 은혜가운데 마치고 졸업을 하게 되었기에 어려운 발걸음으로 남은 식구들이 시카고 훈련장을 찾아 그간의 노고를 치하하고 앞길을 격려하는 자리를 갖고 잠시 외출하여 사진을 찍었습니다.

인생의 흉년에 붙들어야 할 손(룻1:1-5)



인생은 돌아 올 수 없는 차표를 들고 떠나는 나그네 길입니다. 그 나그네 길에서 우리는 오늘 보다 조금 더 나은 내일을 찾아 어디론가 끊임없이 움직여 갑니다. 살아보면 어차피 알게 될 일이지만 어제 떠나 온 출발지 그 곳보다 오늘 도착된 목적지가 딱히 나은 것도 아닌데도 그걸 위해 그렇게나 수고하고 애쓴 것을 생각하면 억울하기 짝이 없는 것이 우리네 인생 나그네 길입니다. 게다가 작은 꿈을 안고 떠나 도착된 그 곳이 언제나 더 나으라는 법은 없는 것이어서 때론 거기서 오히려 더 못한 상황이 펼쳐 질 때에는 그저 말문이 막힐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나오미 일가가 그랬습니다.
베들레헴의 옛 이름 ‘에브랏’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고 백성의 소망하던 곳인데 그곳에 말로 다 못할 흉년이 들었습니다. 그 흉년을 피해 ‘하나님은 왕이시다’는 이름을 가진 남편 엘리멜렉을 따라 모압땅에 내려 온 나오미 일가가 흉년을 피하기는 커녕 완전히 망가져 내리는 인생의 흉년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나오미는 진실로 처절한 인생의 흉년 가운데 서있습니다. 배우자는 죽으면 땅에 묻지만 자식은 죽으면 부모의 가슴에 묻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객지에서 남편 잃고, 자식도 그것도 둘이나 잃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과부는 먹고 사는 일도 편치 않고 서러운 법입니다. 그런 과부 나오미가 두 자부와 함께 이방 땅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저 막막할 뿐 입니다.
웃음짓는 소수의 승자 뒤에는 피눈물 흘리는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패배자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승패와 우열이 확실하게 구분되는 글로벌 무한 경쟁시대를 삽니다. 우리가 사는 미국의 실리콘 밸리는 성공의 요람이라고 하여 한 때 발 붙일 곳이 없도록 붐비던 곳이었자만 사실 그곳은100개의 새로운 벤쳐가 나타나면 그 가운데 겨우 하나만 살아 남고 99개는 피어 보지도 못하고 죽는 실패의 요람입니다. 손맛 하나만 믿고 부지런히 노력하면 먹고는 산다는 식당도 1000개가 생겨야 겨우 6개가 살아남아 1%의 성공율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경쟁이 심합니다. 이처럼 처절한 한계 경쟁의 시대가 바로 오늘의 경쟁시대입니다. 참으로 피하고 싶은 착잡한 현실입니다.

인생이란게 다 그렇고 그런 것이어서 풍년이 들다가도 흉년이 드는 법이고, 흉년에 고생하다가도 또 풍년이 들어 언제 그랬나 싶게 흉년의 고생을 말끔히 잊어 버리는 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흉년을 맞아 먹고 살기가 막막한 사람들에게는 과거 풍년에 대한 기억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고 이 기회만 잘 넘기면 또 풍년의 풍성한 시절이 찾아 온다는 위로의 말도 별반 소용이 없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쓰러져서 다시 일어나는 일은 여전히 어려운 일입니다.
실패한 모두가 그들 인간적인 노력만으로 다시금 다시 일어 설 수 있다면 뭐 그리 대단하게 실패의 고통을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누가 실패의 고통 속에서 폐인으로 마지막 남은 삶을 연명하며, 누가 실패로 인해 스스로 인생을 마감하는 삶을 살겠습니까? 아무리 다시 서려고 노력해도, 해도 해도 안되니까 선택하고야마는 그 길이 일본과 같은 자살대국에서처럼 한계 경쟁사회에서 패자들이 걸어 가는 삶의 마지막 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는 우리들은 인생의 흉년을 맞아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그것은 먼저 인간의 눈으로 볼 때 한없이 한심하고 억울해도 인생의 흉년 가운데 처한 모든 문제가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인생의 흉년을 만나면 힘들고, 아프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이 흉년의 상황이 어서 빨리 사라져 주기를 바라고 기대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인생의 흉년 가운데 숨겨진 의미를 찾기 보다는 우리를 흉년 가운데 던져 넣은 그 상황이 없어져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평소때와는 달리 사생결단의 기도로 주님께 매달리는 신앙의 열심을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인간적인 생각으로’이번 기회만 잘 넘기면’을 곱씹으며 발버둥 쳐보지만 하나님은 엘리멜렉을 이방 땅에서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게 하셨고, 두 아들 마저도 데려가 결국은 나오미와 두 자부를 회생키 어려운 한심한 처지에 몰아 넣으신 것처럼 우리들도 다시는 회복할 수 없을 것 같은 처지에 몰아 넣으실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룻기의 처음 이야기를 살고자 발버둥 치는 우리들의 입장에서 보면 처음 이야기의 결말이 너무 허무하고 비극적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흉년에 닥친 문제들을 그대로 얼마동안 머무르게 하시거나, 아주 해결해 주시지 않거나, 때에 땨라서는 오히려 우리의 생명마저도 거두어 가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이 노년에 허락하신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기 위해 아무런 의문과 미련없이 제단을 향해 길을 떠나는 아브라함이 가졌던 신앙의 자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인간적 기대를 포기하게 하는 삶은 잘못하면 자포자기의 삶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기대를 포기하면서도 더 이상의 희망이 없을 것 같은 그 흉년 가운데에도 아직도 희망의 불씨는 살아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룻기의 처음 이야기에서 나오미 가정이 몰락하는 한심한 처지의 이야기는 1장 1절로 5절까지가 전부입니다. 오늘 룻기의 본문을 보면 인간의 죽음 , 더구나 한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던 남성들의 죽음이 너무나도 간단히 기록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한 가정을 책임지던 남자들의 삶이 그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믿는 우리들에게도 똑같은 슬픔의 이야기가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이야기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한심하고 억울한 처지를 통해서도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패자 부활의 계획이 있음이 룻기에서 더욱 중요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룻기에서의 희망의 새로운 삶은 5절의 ‘남았더라’라는 단어가 그 전조가 됩니다. 룻기의 초반부에는 슬픔과 괴로움과 고독의 처절한 가뭄이 가득했지만 그런 가운데도 여전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때문에 가능한 사막의 오아시스같은 새 삶은 바로 ‘남았더라’는 단어를 통해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때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더 이상 스스로에게 의지할 만한 것이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만을 온전히 의뢰하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집니다.
6절을 보면 나오미는 이방 땅에서 고국 땅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그것은 나오미가 고국 땅에서의 풍년 소식을 들은 것이 이유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고국 땅의 백성을 돌보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오미는 그 소식을 듣자 마자 곧바로 행동으로 옮겨 고향으로 돌아 갔습니다.
그래서 룻기는 1장 1절로 5절에서 끝나지 않고 마지막 4장까지 이어졌고,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룻기의 비극은 사라지고 점점 더 기쁜 일을 향해 달려 가는 것입니다. 룻이 보아스를 만나는 극적인 이야기의 결국이 다윗의 조상이 되고 다윗 왕국을 이룬다는 사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 자손 중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룻기의 이야기는 패배의 이야기가 아니라 더 없이 풍성한 패자 부활의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비록 암담하고, 소중한 가족들이 죽을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하나님의 크고 넓은 구속사 속에서는 더 큰 풍년을 위한 희망의 불씨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현실 역시 계속되는 흉년의 때이지만 모든 것을 잃는다 해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 남는 우리는 새로운 역전의 패자 부활의 이야기를 쓰는 위대한 역사 가운데 설 수 있고, 인생의 흉년 가운데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 같아도 우리에게 남는 영원한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어떤 어려움 가운데서도 희망을 노래 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흉년을 극복한답시고 잔머리를 쓰며 현실을 도피하는 삶은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결국은 낭비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도피성 현실 극복이 아니라 흉년의 현실 속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 분을 즐기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 올바른 신앙인이 살아야 할 삶의 자세입니다.
하나님을 내게 맞추는 삶이 아니라 나를 하나님께 맞추는 삶, 남은 자의 소망을 가지고 이 어려운 현실을 살아내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만이 인생의 흉년에 우리가 붙들어야 할 손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호랑이한테 쫓기던 햇님과 달님이 ‘우리를 살리시려거든 우리에게 튼튼한 동아줄을 내려 주시고, 우리를 죽이시려거든 썪은 동아줄을 내려 주세요’ 기도했고, 오누이는 하늘에서 내려 온 튼튼한 동아줄을 붙잡고 하늘로 오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어릴적 듣던 동화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 사는 일이 참으로 어렵다 보니 우리의 어리석음이 세상이 내미는 이 손 저 손을 생각없이 붙잡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고난 가운데 붙들어야 할 손은 하나님의 손 밖에 없습니다.
원하고 바라옵기는 우리를 향한 그 많은 손길들 가운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참 손만을 붙들 수 있는 굳은 믿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손을 내미시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인내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믿사옵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